[KISTI의 과학향기]글 - 과학향기 편집부

나, 노새의 어머니는 말, 아버지는 당나귀다. 부모 자랑을 해보자면, 세상 짐승 중에 기운 좋기로 소문난 자가 어머니요 끈기로 이길 자가 없는 이가 아버지다. 게다가 나는 운수 좋게도 부모의 좋은 점만 닮아 기운이 좋고 인내심이 강하다. 외모가 아버지를 닮아 목이 짧고 우스꽝스럽게 생기기는 했으나 체격 조건을 보자면 나무랄 데가 없는 미남자다.

나는 조금 춥거나 더운 날씨를 가리지 않고, 가파른 산을 넘고 길고 긴 행군을 하라 해도 잔병 치레 없이 이긴다.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타고 넘은 게 백마가 아니라 실은 이 몸 노새였다는 것, 하도 많은 짐을 다 나른 덕에 이솝우화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것도 이 몸이다. 오죽하면 '짐'하면 '노새'를 떠올리는 시인이며 소설가가 그리 많겠는가.

나, 노새는 그렇게 구약성서에서부터 등장했던 바, 인간의 역사가 동틀 무렵부터 인간과 함께 해온 동물이다. 그러나 이런 나를 두고 어느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슬픈 동물'이라고.. 그렇게 긴 시간동안 우리가 살아온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애석하게도 그 말은 틀린 것이 아니다. 나의 종족 노새는 길고 긴 역사가 있는 동시에 역사가 없다. 수 천년을 살아오면서 우리에게는 항시 낳아준 어머니, 아버지가 있었지만 우리가 자식을 낳은 일은 없었다.

나, 노새는 부모보다 훨씬 수명이 길어 50년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새끼가 나고 크는 것은 보지 못한다. 굳건한 체력과 생명력을 생각한다면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때로 우리 동족 암노새와 가족을 이루고 새끼를 낳는 꿈을 꾼다. 하지만 인간 과학자들은 노새와 노새가 만나 새로운 노새를 낳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는다.

나, 노새의 슬픈 운명은 이렇다. 내 어머니 말과 아버지 당나귀는 종이 다르다. 피부색이 다르다거나 사는 대륙이 다른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부모님은 나에게 모든 좋은 점들을 모두 물려 주었지만 새끼를 낳을 수 있는 능력만은 주지 못했다. 당나귀의 정자는 31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으며, 말의 난자는 32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당나귀와 말 사이에 태어난 노새는 63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는 샘이다.

이때 노새는 성체로 발달 할 수 있는 체세포 분열에는 문제가 없지만, 유성생식을 하는 진핵생물에서 생식세포를 형성하는 과정인 감수분열이 일어나지 않아 생식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암 노새 중에는 간혹 새끼를 낳는데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 종족의 슬픈 운명을 거스르기엔 역부족이다.

나, 노새의 강인한 생명력을 두고 '잡종 우세'라 칭하는데, 이 말은 칭찬이면서 동시에 사슬이기도 하다. 잡종 우세가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만일 부모인 어머니-말과 아버지-당나귀의 순서가 뒤 바뀌어 수컷 말과 암컷 당나귀 사이에서 태어나는 경우에는, 버새라고 부른다. 체력이 좋은 편이나 나, 노새 보다는 약하기 때문에 버새의 탄생을 반기는 이는 많지 않은 형편이다.

물론 세상에 이 슬픈 운명을 타고난 짐승이 노새만은 아니다. 수사자와 암호랑이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거도 있다. 부모 보다 체격이 좋고 훤칠하지만 역시 생식 능력이 없다. 애초에 나, 노새는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우리 종족의 숙명을 인지하고 있었고, 때로 험하게 고집을 피우기도 하지만 한 평생 짐을 져 나르며 묵묵히 일하다 가리라 가면 그뿐,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마음 편히 먹고 지내는 날이 대부분이다.

헌데 살다 보니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낙타와 라마(llama)가 교배해 'RAMA'가 태어났는데, RAMA는 잡종임에도 생식능력이 있어 자손이 기대된다고 한다. 게다가 말을 복제하는 일은 몹시 어렵다고 여겨졌는데 말 복제에도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미국에서는 말의 난자에 당나귀의 태아 체세포를 이식해 대리모 암말을 통해 노새를 출산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인간 과학자들은 노새 대량 복제의 길이 열렸다며 즐거워하는데 수 천년을 자손 없는 일회성 인생에 익숙한 나, 노새에게는 그저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노새의 행복 보다는 인간의 편의를 위한 것인 줄 알고 있으니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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