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녕 이성만 저 '연구원은 무엇으로 사는가'
연구원 특성에 맞는 조직 문화로 전기차 배터리 등 '퍼스트 무버' 성취
14년간 경영하며 연구원 정원 4배…1,300명→5,500명

코리아 프리미엄이 이야기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한국이 훌륭하게 대처하며 한국 제품에는 더 높은 값을 쳐준다는 것. 북한 리스크 등으로 제값을 받지 못하던 코리아 디스카운트와는 상전벽해의 변화이다.
 
이 변화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과학이 튼실한 뒷심이 돼주었다. 특히 민간의 역할이 컸다. 민간 연구소는 출범 당시에는 공장 한 켠의 곁방살이 정도였다. 그것이 연구결과가 사업실적으로 연계되며 식구도 많아지고, 공간도 독자 건물에서 독립 부지로 점점 발전했다.
 
1970년대 한국 연구개발 예산은 정부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컸다. 전체의 90% 비중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기업들이 연구에 투자하며 민간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해 현재는 3대7 혹은 2대8 비중으로 역전됐다.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나 현대차, LG화학 등은 연구인력이나 투자비 등 외형도 세계적 수준이다.
 
그런 가운데 LG화학 연구소의 경영 원칙을 담은 책이 최근 출간돼 화제이다. 삼성전자나 현대차 등도 규모나 업적은 크지만 관련된 자료나 서적은 매우 드물다. 기업 연구의 속성상 외부로 밝히기 꺼리는 것도 있겠지만 아쉬운 일이다.
 
14년간 LG화학 연구원을 이끌며 국내 최대를 세계 3위로 업그레이드시킨 유진녕 원장이 연구소의 조직문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책을 최근 내놓았다. LG화학 기술원장으로 14년, 그 전에 부속 연구소장으로 8년 등 22년간의 경영 경험을 서술했다.
 
14년간 LG화학 연구원을 이끌며 국내 최대를 세계 3위로 업그레이드시킨 유진녕 원장이 연구소의 조직문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책 '연구원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최근 내놓았다.<사진=출판사 제공>
14년간 LG화학 연구원을 이끌며 국내 최대를 세계 3위로 업그레이드시킨 유진녕 원장이 연구소의 조직문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책 '연구원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최근 내놓았다.<사진=출판사 제공>
'연구원은 무엇으로 사는가'.(유진녕 이성만 공저, 미래의 창刊)
 
한국은 이제 캐치업 혹은 팔로우업 경제에서 선도 혹은 퍼스트 무버 경제로 차원 이동을 했다. LG화학 연구원은 처음에는 선진국 모방을 했으나 2천년대 중반부터 세계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도전을 시작했다. 그 결과 9년만에 세계 최고 전기차 배터리를 만들어 내며 현재까지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번 코로나 19계기로 새삼 알게 됐듯이 AC(After Corona)시대에는 한국이 선도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이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많은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도 이 책은 흥미를 끈다고 하겠다.
 
LG화학 연구원은 1979년 대덕단지에서 35명 규모로 소박하게 출발했다. 점차 커지며 2000년 650명, 2019년 5700명으로 규모가 수직 상승했다. 참고로 같은 화학분야 정부 출연연구소인 화학연구원은 1976년 18명으로 출발해 2000년 355명, 2020년 628명 규모이다.
 
유 원장은 골수 LG화학 연구원이다. 설립 초기인 1981년 신입 사원으로 입사했고, 80년대 중반 회사 지원으로 유학을 가 90년 복귀한다. 그러다가 1995년 고분자 연구소장으로 연구소 경영을 시작했다. 8년 뒤인 2005년 기술연구원 원장으로 취임한다. 이후 14년간 경영하며 1300명이던 연구원을 그가 떠나던 2018년 5500백명 수준으로 훌쩍 키워 놓았다. 변방의 자그마한 연구소를 세계 5위 수준으로 키워 놓은 것이다.
 
물론 그에 앞서 최남석 초대 원장이 15년, 여종기 2대 원장이 10년 동안 재직하며 연구소 토대를 다졌고, 인재를 키운 것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유 원장은 입버릇처럼 자신이 한 것은 조직내부에만 신경 쓴 것이라고 말한다. 전임 원장들의 기반 위에, 오너인 구본무 회장의 지원이 가세하며 연구소가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는 것.
 
이 책에는 그 조직 내부를 어떻게 추스르고 한 방향으로 해왔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연구 기관장 혹은 경영자의 고객이라 할 수 있는 연구원이란 존재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기반해 고객 지향의 경영 방침을 세우고, 일관성 있게 그 원칙을 밀고 나간 이야기이다. 연구원 경영의 정도가 담겨 있다고 할까.
 
유 원장이 연구경영을 하면서 기본방침으로 삼은 자료가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 기사이다. 연구원의 특성을 요약한 것. 한국경제신문에 번역된 것을 오려서 지갑에 넣고 다니며 각인을 시켰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연구원은 자율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성취 지향적 연구원은 일에서 삶의 동기를 찾으며 관리자 감독을 극도로 싫어한다.

2. 연구원은 고도의 기술 개발 활동에서 자아를 성취한다. 조직의 방침이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서 벗어날 때 일할 맛을 잃는다.

3. 최신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등장하는 전자산업에서와 같이 자신의 성과가 추세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진다고 느꼈을 때 좌절한다.

4. 회사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연구원 집단의 원칙과 윤리 의식에 더 충실하다.

5. 조직의 목표에 열광하는 편은 아니지만 제대로 방향이 잡혔다고 생각하면 무섭게 집중한다. 따라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취소하거나 다른 프로젝트를 강요할 경우 치명적일 수 있다.

6. 독립성이 강하지만 지나친 경쟁 분위기는 불안감을 조성해 연구에 차질을 빚게 할 수 있다. 연구원들은 대부분 자료와 지식을 교환하는 동료 집단의 일원으로서 소속감을 중요시한다.
 
6가지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조직문화를 고민한 끝에 그는 3가지 원칙을 정한다. 자율과 창의, 협업, 도전. 이 3가지를 기반으로 조직 운영 실행방안을 마련했다.
 
자율과 창의를 위해서는 비전과 가치, 전략을 공유해야 한다. 동시에 기여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공유와 평가를 위해 자유로운 주제의 연구 동호회 운영, 유사한 분야 사람들이 모이는 기술 실행 중심 공동체 활동, 전략을 공유하는 콘센서스 미팅 등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연구원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임원급 연구원 제도를 도입했다. 일정 단계에 이르면 보직 코스나 연구 코스 가운데 하나를 택해 전념하도록 하는 듀얼 래더 시스템도 시행했다.
 
협업을 위해서는 조직 내외의 개방형 혁신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조직 내부 혁신으로는 다양한 소통 채널을 만들었다. 웹을 통해 연구 과정의 문의와 답변 코너를 운영했다. 해답을 찾으려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도 마일리지를 부여했고, 답변자에게도 물론 보상을 했다. 매월 연구 과제를 소개하고 난제를 공개 토론하는 포럼을 열었다.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전문가가 모이는 프로그램도 열었다. 이와 함께 외부 혁신 프로그램도 가동시켰다.
 
연구팀을 보완하기 위해 코팅이나 분석 등의 기반 기술들을 제공하는 별도의 팀을 운영했다. 이들도 연구팀의 일원으로서 업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도록 했고, 그 결과 더욱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며 연구팀 전체의 효율을 높였다.
 
도전을 위해서는 우수한 아이디어는 받아들여 아이디어 제안자가 주도적으로 별도의 연구팀을 운영하도록 독려했다. 실패에 대해서도 열심히 한 부분이 있으면 그에 대해 긍정적 피드백을 주어 연구원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했다. 또 1P1F(one project one future item) 제도를 도입해 하나의 프로젝트에는 반드시 하나 이상의 와해성 혁신 기술을 포함하게도 했다.
 
다양한 제도가 해를 더하며 내실을 다져갔고, 연구 벌레들이 연구에 빠져들도록 하는 환경이 갖춰졌다. 후배나 동료 등 좋은 사람들을 데려오는 문화가 만들어졌고, 온 사람들이 기존 구성원과 어울리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등 선순환이 이뤄지며 세계 최고의 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유 원장이 연구원장에 취임한 2005년 1300명의 연구원은 14년 뒤 연구원장직을 마칠 때는 5500백명이 됐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차 배터리와 3D 디스플레이용 광학 필름 등등 연타석 홈런을 쳤다.
 
유 원장은 이와 함께 리더로서 중시해야 할 왜란 질문과 조직 운영의 각종 영업 비밀(?)을 책에서 풀어 놓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조직원으로서 프로 자세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조직에서 인정받는 4가지 힘을 몰입력(집중하는 힘), 전문 지식에 기반한 실력, 자기혁신력(끊임없는 재충전), 동원력(남의 힘을 활용할 수 있는 힘)이라며 후배 과학자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한다.
 
유 원장은 조용한 스타일이다. 소리내지 않고 조곤조곤 설득하는 스타일이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최대한 안전을 확보하며 건넌다. 그 자신 전형적인 연구원 스타일이다. 그런 사람이 일은 크게 냈다. 패스트 팔로워를 퍼스트 무버로 만든 것이다. 이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다. 퍼스트 무버는 게임의 룰을 만든다. 팔로워는 그 만들어진 룰 내에서 움직인다. 팔로워가 무버가 되려면 차원이 다른 발상을 해야 하는데 이게 어렵다. 시간과 돈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도 보통 사람은 인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LG 화학이 퍼스트 무버가 된 대표적 제품은 자동차용 배터리이다. 리튬이온 방식인데 가전 등 소형 전자기기에 적합하다는게 업계의 상식이었다. 소형 가전 부분 특허는 일본 기업들이 다 갖고 있었다. 자동차 등의 대용량에는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업계에서는 생각했다.
 
다른 발상과 접근이 필요했다. 향후 전기 자동차 시대가 올 것이라는 분석 아래 자동차용 전지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00년부터 시작해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비용도 1500억원 이상 들어갔다. '돈 먹는 하마'라는 비난을 받으며 중간에 두 번이나 좌초 위기가 있었다. 이때 총수인 故 구본무 회장이 뚝심있게 밀어줘 성공할 수 있었고 이제는 GM 포드 르노 폭스바겐 현대차 등등 대다수 차에 공급된다. 글로벌 1등이 됐고, 기업에도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퍼스트 무버 위치를 계속 점하기 위한 후속 개발도 지속되고 있다. 2019년 이 분야 매출만 4조6000억원이었다. 연구 개발이 리스크가 크기도 하지만 한 번 성공하면 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오너의 지지가 있어 가능한 프로젝트이기도 하지만 줄탁동기(啐啄同機)라고 연구현장에서의 끈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끈기를 끌어낸 것이 유진녕 원장의 리더십이고, 이 책은 그 리더십을 잘 정리해 놓았다.
 
평연구원으로 들어와 조직에 유학을 보내줘 견문을 넓힌 뒤 다시 조직의 장이 되어 조직을 일등연구기관으로 만든 한 과학자의 30여년의 땀과 기쁨이 담긴 책이다. 그 자신이 이공계 사람들의, 직장인의 롤 모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책임자로 기관을 운영하는 사람이나 혹은 지향하는 사람, 혹은 현장에서 한창 활동 중인 사람들께는 하나의 선물과 같은 책이라도 할 수 있겠다.
 
참고로 LG화학 연구원의 초대 원장인 최남석 원장은 2년 전 회고록을 출간했다. '비행기에는 백미러가 없다'란 제목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는 소제목을 붙였다. 유 원장의 책이 조직문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노하우를 이야기한다면, 최 원장의 책은 경영자는 10년 앞을 내다보며 인재를 키우고, 사업 아이템을 만들어야 함을 강조한다. LG화학이 세계적 기업으로 발전한데는 오너의 뚝심 및 신뢰 경영과 전문경영인들의 비전과 조직문화가 조화가 밑바탕이 됐음을 두 책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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