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대덕 50주년 출발 원년···생태계 구축긴요
과학자, 적극적 참여 및 주도하는 '시민' 자리매김

2020년이 시작됐습니다. 많은 변화가 예상되는 한 해입니다. 총선도 있고, 과학계에 현안도 많습니다. 무역 마찰에 따른 기술 자립의 문제와 늘어난 예산에 호응하는 결과물 등의 숙제가 있습니다. 

특히 대덕으로서는 의미가 깊습니다. 2023년이 50주년입니다. 올해부터 본격적 준비에 들어가야 의미있는 반세기를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 외길을 걸어온 대덕넷도 올해 20주년을 맞이합니다. 주위의 성원이 있어 가능한 약관의 세월이었습니다. 백년 기업으로 가는 토대를 마무리 짓는 한 해이고, 함께 해주신 독자분들께 무한 감사 드리는 365일이란 다짐을 올립니다.

대덕넷은 20년 동안 과학계를 지켜보아왔습니다. 다양한 시도도 해왔습니다. 업그레이드 사이언스 코리아란 연속 기획을 통해 우리의 과학 현장과 민간 및 외국 연구 현장을 들여다보며 개선책을 제안해 왔습니다. 연구현장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알려 R&D정책 추진의 일방성을 해소했으며, 전무했던 국가 연구소의 재교육 시스템을 태동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과학자 시리즈와 대표 연구실 특집을 통해서는 연구자들에 초점을 맞춰 연구 고수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노하우가 공유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대덕단상과 다양한 기획 등을 통해 연구현장의 가야할 길에 대해 함께 고민해 왔습니다. 온라인 보도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과학자와 끊임없이 만나며 한국 과학계가 나아갈 방향을 논하고 그 지혜를 보도했습니다. 

많은 공감과 합심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과학 생태계가 만들어졌다고 보기에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적극적으로 과학계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고민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내 문제가 아니면 상관없다는 현상이 목격됩니다. 일례로 연구환경 개선이나 국가R&D정책, 탈원전 정책, 공동관리 아파트 활용방안 등등에 있어 참여는 제한적입니다.

대덕은 특히 50년 가깝게 축적된 자원과 인재들로 세계적 창업 거점 혹은 과학산업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기대되는 곳입니다. 특구로 지정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대 대비 활성화 정도는 아쉽다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대덕의 초기 건설자들인 박정희·최형섭·오원철 세 분의 뜻대로 한국의 두뇌 역할을 했다면 여기에서 나온 세계적 발견이 이미 무수하게 있었을 것입니다. 대덕특구로 지정된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축사에서 밝혔듯 벌써 대덕은 5만 달러 소득이 되고, 여기서 나온 지식들이 넘쳐 주변으로 흘러갔어야 합니다. 이에 비해 현실의 대덕은 사일로에 갇혀 있는 모습이고, 국부 창출의 발전소 조짐은 안보입니다. 여전히 많은 예산은 배분되고 소진되나 내외의 한계로 성과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왜일까요? 대덕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요령 피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다 바쁘고, 열심히 삽니다. 그런데도 큰 흐름은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 상황이면 3년 뒤도, 5년 뒤도, 10년 뒤도 큰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대덕 구성원들과 오랜 동안 호흡하며 느낀 것중의 하나는 파편화, 개인화입니다. 특구로서 가져야 할 비전이 형성돼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기관 목표와 연구실 목표만 있고, 이것이 모여져서 어떤 미래를 만든다는 좀 더 큰 그림은 없습니다. 또한 팀으로 일하는데 익숙치 않고, 개인의 고과나 목표, 감사에 초점이 맞춰져 내 문제에는 민감하고 그 밖에는 관심을 안둡니다. 개별 팀 내 팀워크는 좋아도, 전체와의 조화에는 서투른 대목도 나옵니다.

개인은 강한데 전체는 약하다고 할까요. 이유가 뭘까요? 한국의 대표적 과학사가인 박성래·김영식 두 원로의 진단은 같습니다. '중인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한국 사회가 신분제 사회의 인습을 다 깨지 못했는데 그 가운데 과학자들은 중인 의식을 자의든 타의든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관료와 정치인은 최고 계층으로 군림합니다. 일반인들도 정부와 정치인에 민원을 제기하고 해결을 요구하고 기대합니다. 과학자들은 일반인들에게 제한적 기대의 대상입니다. 큰 문제는 정치인과 관료가 풀고 전문적인 것은 과학자들에게 기대한다고 할까요.

과학자들도 이에 익숙합니다. 판을 만드는 것은 정치인과 관료이고, 과학자들은 그들이 만든 여건 혹은 그들이 낸 과제를 푸는데 재미를 느낍니다. 그러다가 여건을 만들거나 비전을 만들어야 하면 그것은 내 관할이 아니고 흥미도 없다고 손을 내젓습니다.

선진국에서는 과학자들이 어떠한 역할을 해 왔을까요? 이들도 주어진 문제를 풀며 적당히 처세를 해왔을까요? 과학사에서 잘 알 수 있지만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 뉴튼, 아인슈타인 등등은 스스로 문제를 내고 풀어오며 세상을 만들어 온 사람들입니다. 현재의 창업자들에게도 유전자는 이어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과학적 관찰과 성과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꿔온 사람들입니다.

우리 과학자들은 왜 현실적응적일까요? 조선시대의 중인은 전문직 관료들입니다. 역관과 의관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일정한 신분이 보장되고, 보상도 적절하게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의사결정권은 없습니다. 때로는 억울하게 피해도 당하고, 의사결정권자로부터 멸시도 당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받는 안정성에 비하면 일시적이기에 참고 넘어갑니다. 동시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 이상의 사고와 변화는 위험성이 높아 자기통제를 하며 시도 자체를 안합니다.

현재 과학계가 비슷합니다. 과학도로 성장과정 자체가 그렇습니다. 이과를 택하면 전문성 훈련을 주로 받습니다.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대학원에서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전문성이 깊어질 수록 전체에 대한 이해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렇게 훈련받아 연구소에 가게되면 비슷한 성향이 이어집니다.

나이가 들어 퇴직 즈음에 들어가면 후회를 합니다. 젊은 날의 행동에 대해.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렇다고 후배들에게 회한을 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악순환이 반복되며 과학계에서 중인 의식은 고착화됩니다.

과학계만이 중인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니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학력이 높을 수록, 직책이 높아질 수록 이런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관료들도 내 업무만 보고, 정치인도 내 지역구에 소속당만 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간혹 패러다임 전체를 바꾸는 사례가 있기도 하나 과학계는 거의 없다는게 다른 점입니다.

중인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시민'입니다. 이들은 집단이나 개인이나 주체적이고 주도적입니다. 세상에 대해 관심 갖고 있으며 바람직한 상황을 만들러 본인들이 행동합니다. 누구에게 기대거나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상황을 만들기 위해 먼저 움직이고 연대합니다.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 존재입니다.

서구 사회가 대표적 시민 사회입니다. 신분제를 본인들이 무너뜨렸고, 천부인권론, 민주주의, 투표권, 대의제 등을 본인들이 구상하고 관철시켰습니다. 그 사회에서는 시민이 주인이고, 관료나 정치인은 시민의 심부름꾼입니다. 서구 시민사회에서 과학자들은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데 견인차 역할을 해왔습니다.

과학자들이 풍부한 지식을 활용해 창출한 부를 바탕으로 사회의 리더 역할을 했습니다. 자연을 관찰하고, 세상을 탐험하며 새로운 기회를 누구보다 먼저 발견했고, 도전의 결과 쌓게 된 부를 기반으로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영국의 루너 소사이어티, 미국의 내쇼날 지오그래픽 클럽 등등이 그런 사례입니다.

한국의 과학계도, 과학자들이 집적돼 있는 대덕에서도 필요한 것은 '시민'의식 혹은 정신입니다. 시민 의식은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전공 지식은 기본이고, 사회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앓고 있는 문제에 대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앎을 바탕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시민의식은 문화입니다.

한국 사회는 많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지역간 불균형, 세대 갈등, AI와 로봇의 대두, 국방 문제, 데이터 경제, 인구 감소, 소외 계층, 글로벌화 등등의 난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난제에 대해 과학계도 이제는 주체로 나서야 합니다. 대덕은 특히 이공계 인력이 집중돼 있고, KAIST가 있으며, 세종에 정부 부처와 경제인문사회 국책 연구기관들이 인접해 있습니다. 이런 여건을 기반으로 국가 비전은 물론이고 세계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중심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한국의 과학계가, 특히 과학자들이 모여있는 대덕이 중인 의식이란 미로에서 탈출해 시민으로 거듭나는 2020년이 되기를 바래 봅니다. 대덕넷도 그에 일조하는 한 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신년 특집으로 좋은과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사회의 중인이 아닌 과학시민이 추구하는 좋은과학의 이상형을 도출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한국 과학기술계의 좋은 연구개발 생태계 모습과 좋은 과학자상, 그리고 바람직한 과학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현장의 지성을 보도할 예정입니다.
 
4월 과학의달에는 대덕넷의 대표기획 시리즈 ‘업그레이드 사이언스 코리아’를 부활시킬 방침 입니다. 한국 과학계가 중인의식을 넘어 과학시민으로 거듭나는데 필요한 기획으로 준비될 예정입니다. 또, 지역의 로컬 크리에이터들도 발굴해 대덕 공동체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가 되도록 일조하려고 합니다.
 
오프라인에서도 활발한 분야별 부문별 네트워크 활성화를 촉발시킬 예정입니다. AI 뿐만 아니라 국방, 바이오헬스, 창업 등 다양한 분야의 과학기술자들과 산업계 네트워크를 가동해 새로운 과학시민 운동이 일어나도록 모임을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등 관계기관과 함께 보조를 맞춰 앞으로 나갈 계획입니다. AI지식축제와 사이언스 슬램D, 짜고치는 과학영화해설, 해외과학탐방 등 다양한 과학대중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과학자와 시민이 왕성하게 소통하도록 해나갈 예정입니다. 

무엇보다 대덕넷은 20주년을 맞아 지난 20년을 성찰하며 부족한 역량을 다지고 끌어 올려보고 싶습니다. 일터와 놀터·삶터가 같은 현장의 많은 주체들과 더 많은 소통을 이뤄내려고 합니다. 그럼으로 과학계와 지역 혁신 주체들의 확실한 서포터즈로 역할할 수 있도록 대덕넷 임직원 모두 똘똘 뭉쳐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대덕넷의 작지만 풍성한 활동들은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과학시민 사회로 가는 프로젝트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라 어렵겠지만,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뜻을 이뤄나가게 되길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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