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논문 못써 미안' 유서…"연구환경 변화 적응 못한듯"
과학자들 "기초 연구환경 기반 구축 선진화해야"…애도의 물결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던 우리나라 유명 물리학과 교수가 자택에서 투신한 것으로 밝혀져 과학기술계가 충격에 빠졌다.

24일 오후 3시30분께 서울 마포구 한 아파트 화단에서 L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가 숨져 있는 것을 경비원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L 교수가 웃옷 호주머니에 "물리학을 너무나 사랑했는데 잘하지 못해 힘들다. 큰 논문을 발표해야 하는데 가족과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점으로 미뤄 신변을 비관해 투신자살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L 교수는 세계적인 초전도체 분야의 권위자로 '노벨물리학상' 후보로도 거론되던 세계적 인물이다.
초전도체 재료전문 연구자 오상수 한국전기연구원 박사는 "L 교수님은 세계 최초로 MgB2(마그네슘다이보라이드, 이분화마그네슘) 초전도 박막을 제작해 사이언스지에 발표하는 등 우리나라 초전도체 연구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분"이라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초전도체 시스템 분야 고득용 한국기계연구원 박사는 "지난 22일 월요일 기계연에서 개최된 2010 초전도 공동 워크샵에서 첫 번째 연사로 초청돼 발표하실 때까지만 해도 L 교수님 모습이 좋아보였다"며 세계적인 초전도체 권위자의 죽음을 깊히 애도했다.

L 교수는 한국물리학회 학술상과 '한국의 노벨상'으로 통하는 한국과학상 물리학부문 상을 받았다. 200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물리학회 초청 강연도 했다. 20여년간 포항공대에서 교편을 잡다 지난 2008년 모교인 서강대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 온화한 성품에 연구 밖에 모르는 진정한 연구자였다는 평이다.

◆ "세계적 실험실 셋업 안돼 비관한듯"…기초과학 현장 개선 시급

학교 관계자 및 연구 동료들 증언을 종합해 보면 L 교수는 지난 2008년 포항공대에서 모교로 자리를 옮긴 뒤 최근 연구실적 등의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비교적 연구환경이 잘 갖춰진 포항공대에서 최고 수준의 성과를 내왔던 연구자가 아무래도 일반 대학의 열악한 기초과학 연구환경에서 실험하다 보니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대개 연구자들이 학교로 옮기면 2~3년 동안은 실험실 셋업 문제 때문에 매우 힘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연구현장의 정설이다. 돈 문제가 아니다. 연구공간이 주어져도 공사를 해야되고 장비도 구입해야 되는 등 실험이 제대로 가동되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린다. 세계적 연구그룹들과 벌어지는 시간 싸움에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다름아닌 사람 전쟁이다. 실험활동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 해내는 것. L 교수의 경우 20여년간 포항공대의 우수 연구인력을 자연스럽게 확보하다가 서강대로 자리를 옮긴 뒤 연구인력 확보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광서 서강대 물리학과장은 "L 교수의 경우 세계적 연구성과를 위해 대충 실력있는 학생을 절대 안뽑았다"며 "보통 실험을 하려면 박사 2~3명, 석사를 포함해 적어도 10여명은 돼야 하는데 5~6명 채 안되는 새내기 학생들만 있어 힘들어 했다"고 말했다.

박 학과장은 "최근 해외학술대회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좋은 논문을 발표하는 모습들을 보고, 또 그들이 이 교수에게 '어떤 새로운 연구를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은 못하고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다"며 "세계적 과학자지만 본인으로서는 열악한 연구환경 변화에 대해 굉장한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성균관대 물리학과 한 교수는 "현재 대학의 물리학과 등 기초과학 교수들은 매년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몽골이나 베트남 등으로 출장을 다닌다"라며 "고인이 된 L 교수는 우리나라 기초과학 연구현장의 개선이라는 중요한 국가적 화두를 던지고 떠나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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