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나무들]글 : 고규홍 나무 전문 칼럼리스트

<사진=대덕넷>
<사진=대덕넷>
깊어진 수목원의 가을은 달콤합니다. 사뭇 표정이 바뀐 가을의 깊이만큼 깊어진 가을 나무의 향기 때문입니다. 게스트하우스인 측백나무집에서 초가집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면 안개처럼 습기처럼 스며드는 가을 꽃의 짙은 향기가 있습니다.

목서(Osmanthus fragrans)의 꽃에서 피어나오는 향기입니다. 나뭇잎 겨드랑이마다 피어난 꽃송이들을 찾아내기 전부터 향기는 걷는 사람을 끌어당기지요. 목서가 서있는 좁다란 오솔길 맞은 편에는 여름에 매우 짙은 향기를 뿜어내는 멀구슬나무(Melia azedarach var. japonica)가 있지요.

한여름에 짙은 보랏빛으로 꽃을 피우는 멀구슬나무의 향기 또한 무척 강합니다. 물론 멀구슬나무의 꽃은 이미 떨어졌지요. 여름 지나고 멀구슬나무가 길쭉한 구슬 모양의 열매를 알알이 맺는 가을 깊어지자, 순서에 맞춰 오솔길을 덮었던 향기를 목서가 대신한 겁니다.

▲노란 꽃잎을 가진 목서. ⓒ2009 HelloDD.com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목서의 종류로 흔히 금목서(Osmanthus fragrans var. aurantiacus)와 은목서를 이야기합니다. 노란 꽃이 피어나서 금목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고, 그와 대비해 은목서라고 부르지만, 흔히 목서로 부르는 나무가 곧 은목서입니다. 이밖에 구골나무(Osmanthus heterophylla), 박달목서(Osmanthus insularis) 등도 목서와 가까운 관계의 나무이지요.

일부 지방에서는 구골나무를 목서로 부르기도 한답니다. 천리포수목원의 오솔길을 짙은 향기로 뒤덮은 위의 나무는 목서의 품종입니다만, 꽃의 모양은 목서의 원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목서는 중국이 고향인 상록성 나무인데, 잎사귀의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나기도 하고, 밋밋하기도 합니다. 향기를 내는 유백색의 꽃 한 송이는 5밀리미터를 조금 넘는 크기로, 잎자루가 돋아난 잎겨드랑이에 모여서 피어납니다.

▲자줏빛 꽃을 피운 뻐꾹나리. ⓒ2009 HelloDD.com
목서 꽃의 향기를 한참 바라보고 서있는데, 그 아래 낮은 땅에서 자줏빛 꽃을 피운 뻐꾹나리(Tricyrtis dilatata)가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 토종 식물인 뻐꾹나리는 다 자란 것이 50센티미터 정도 크기입니다. 늦여름부터 피어나는 뻐꾹나리는 꽃의 생김새가 독특한 식물입니다. 꽃잎은 분홍빛인데, 그 위에 검은자줏빛 반점이 총총히 박혀 있습니다. 표범 가죽의 무늬를 닮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뻐꾹나리의 꽃에 찾아온 검정꼬리박각시의 날갯짓이 한창 바쁩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뻐꾹나리 꽃에 찾아든 곤충은 검정꼬리박각시 뿐입니다. 수목원의 다른 곳에 피어있는 뻐꾹나리 꽃에도 유난히 검정꼬리박각시가 많이 찾아옵니다. 큰 덩치의 검정꼬리박각시 때문인지, 다른 곤충들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검정꼬리박각시는 다른 곤충들을 내치고 뻐꾹나리와 깊은 사랑에 빠진 듯합니다. 바삐 이 꽃 저 꽃 들락이지만, 뻐꾹나리를 떠나지는 않습니다.

▲뻐꾹나리의 꽃에 찾아온 검정꼬리박각시. ⓒ2009 HelloDD.com
뻐꾹나리 꽃 송이의 화피는 여섯 개로 갈라지며 피어납니다. 꽃 송이 안쪽에는 암술대가 꽃잎 위로 불쑥 솟아올랐지요. 암술대는 솟아오르면서 셋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끝 부분에서 둘로 또 나눠집니다. 그리고 암술대를 둘러싼 겉으로 여섯 개의 수술이 돋아납니다. 암술과 수술이 꽃송이 위로 훌쩍 튀어나와 은근히 도도해 보입니다.

하나의 꽃 송이는 위에서 볼 때 약 4센티미터 정도로 벌어지며 피어납니다. 불규칙하게 돋아난 반점은 암술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언뜻 보아 강인한 인상을 갖췄습니다. 여러 개체가 한데 모여 피어나서, 뻐꾹나리 꽃이 피어난 부근은 보랏빛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합니다. 우리 수목원에서는 초가집 앞 오솔길 뿐 아니라, 큰 연못의 빅버사 목련 옆 화단 등 여러 곳에서 뻐꾹나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규칙적인 잎사귀를 가진 뻐꾹나리. ⓒ2009 HelloDD.com
뻐꾹나리의 잎사귀가 돋아나는 모습도 재미있습니다. 제법 규칙적이지요. 이처럼 잎 나는 형태를 어긋나기라고 부릅니다. 잎 나는 방식에는 어긋나기 외에 마주나기, 돌려나기, 모여나기 등이 있지요. 앞에 보여드린 목서의 경우, 마주나기 형태로 잎이 돋습니다. 어긋나기든, 마주나기든 잎 나는 방식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잎사귀들 사이에 햇살 다툼을 벌이지 않도록 적당히 양보한다는 것이지요.

마주나기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지요. 마주나기는 뻐꾹나리와 달리 나뭇가지에 잎이 돋아날 때 한 쌍의 잎이 서로 마주보며 같은 자리에서 돋아나는 방식이에요. 한 쌍의 잎이 마주보며 돋아나고, 다시 위쪽에 새 잎이 한 쌍씩 돋아나는 방식입니다. 이 경우 새 잎 한 쌍이 돋아날 때는 놀랄만큼 정확하게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서 돋아납니다. 새로 나는 잎사귀가 먼저 나온 잎이 받아야 할 햇살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거죠.

▲암술대가 꽃잎 위로 불쑥 솟아오른 뻐꾹나리. ⓒ2009 HelloDD.com
돌려나기나 어긋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씩 자리를 양보하면서 햇살을 나눠 쬐는 것입니다. 모든 식물에서 새로 나는 잎은 어찌 됐든 먼저 나와 한창 빛을 모아 양분을 만들어내는 잎사귀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잎 돋아나는 모양을 꼼꼼히 관찰하면 금세 알게 되는 식물의 놀라운 지혜인 겁니다.

날씨의 변화가 급격하기도 하지만, 천리포수목원에서는 계절의 흐름을 잊은 식물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6월에 꽃을 피우고, 이 즈음에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일본조팝나무(Spiraea japonica)의 꽃이 지난 9월 중순까지 피어있었어요. 제철이 아니어서인지, 한창 때의 붉은 빛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분홍 빛 꽃 색깔은 화려합니다.

▲분홍빛을 내는 일본조팝나무. ⓒ2009 HelloDD.com
조팝나무(Spiraea prunifolia var. simpliciflora)에 속하는 나무의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 일본조팝나무처럼 가지 끝 가운데에 뭉쳐서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지만, 더 많기로는 하얀 색의 작은 꽃이 가지에 조롱조롱 피어나 멀리서 보면 꽃방망이처럼 피어나는 조팝나무일 겁니다. 요즘은 고속도로 가장자리에도 조팝나무를 많이 심어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이지요.

계절의 흐름을 잊은 나무로 백정화(Serissa japonica - Pink flower)도 있습니다. 한창 꽃을 피운 백정화는 이미 지난 5월 쯤 '솔숲 편지'를 통해 보여드렸는데, 10월 넘어서까지 꽃을 피우다니요. 기후의 변화가 심상치 않은 것인지, 천리포 지역의 기후가 독특한 것인지, 이 나무가 특별한 품종인지 알쏭달쏭합니다.

▲계절의 흐름을 잊은 백정화. ⓒ2009 HelloDD.com
이제 12월이 눈앞이고 따라서 겨울도 곧 다가올 겁니다. 지난 주에는 그리도 매웁게 파고 들던 찬 바람이 이번 주 들어 조금 누그러드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계절이 거꾸로 흐르는 것이야 아니겠지요.

10월 지나면 11월 오고, 11월 지나면 12월 오는 것처럼 가을 깊어지면 곧바로 겨울 오지요. 차츰 쌀쌀해질 초겨울 날씨에 모두 건강 잃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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