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한상헌 과학칼럼니스트

1991년 빙그레 이글스와 해태 타이거즈 간 야구경기 한 장면. 이글스의 투수 송진우는 8회 2아웃까지 퍼펙트 행진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수립될지 모를 대기록에 수많은 이목이 집중됐지만 결국 파울플라이 실책과 볼넷으로 무산되고 만다.

이후 1997년의 정민철, 2007년 다니엘 리오스 등 많은 투수가 도전했지만 28년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에서 아직 퍼펙트게임은 난공불락의 고지다. 미국에선 17번, 일본에선 15번이나 있었던 기록이 왜 한국에서는 탄생하지 않는 것일까? 퍼펙트게임이 투수의 최고 기록이라면 4할 대 타율은 타자의 최고 기록 중 하나다. 이 역시 프로야구 원년을 제외하고는 나오지 않고 있다.

다윈 이후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로 평가받는 학자 중 하나인 스티븐 제이 굴드도 우리와 비슷한 미국 상황에 답답했던지 이를 진화론으로 설명한다. 굴드의 견해를 따른다면 생명체의 시스템이 갖춰지기 시작할 때는 여러 변이들이 폭발하지만 시스템의 수준이 향상되는 과정에서 변이는 감소하고 종의 특성은 전체적으로 평균화된다. 이런 생명의 진화과정은 야구에서도 비슷하다.

야구가 시작되던 20세기 초만 해도 4할 타자를 비롯한 숱한 변이적 기록이 양산됐지만 점차 시스템이 안정화되자 4할 타자라는 변이는 급속히 사라졌다. 이에 따른다면 투수의 분업체계가 정착하고 타자의 기술이 발전해 야구 기록이 안정화된 것이다. 야구뿐 아니라 다른 기록 스포츠도 종목의 도입기에 신기록이 쏟아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기록의 갱신 빈도는 줄어든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서도 1978년 이후 단 한 번 퍼펙트게임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해석은 굴드가 주장하는 진화론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사례다. 굴드는 원숭이가 어떻게 사람으로 바뀔 수 있냐는 세간의 우문에 대해 '우연이 개입한 생명체의 폭발적 등장'이라는 가설로 해답을 내렸다. 즉, 생물 종들이 상당기간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다 특정한 시기에 급격한 종분화를 이뤘다는 것. 생물 종의 진화가 비교적 짧은 시간에 급격히 이뤄졌다는 이 '단속평형설'은 굴드와 리처드 르원틴이 대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물론 굴드의 견해만이 진화론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에드워드 윌슨과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커 등의 굵직한 학자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들의 견해는 진화론의 기초적 개념인 '자연선택'을 보는 관점부터 다르다.

환경에 유리한 것만 후대에 전달된다는 자연선택으로는 종의 형질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굴드의 주장인 반면 도킨스 쪽에서는 자연선택의 힘을 더 강조하는 주장을 펼친다. 도킨스는 자연선택을 '눈먼 시계공'에 비유한다. 생물의 진화 과정은 시계공이 정해진 설계도에 따라 부품을 조립하는 것처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설계도조차 볼 수 없는 장님이 더듬더듬 부속을 끼워 맞추는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결국 자연선택의 결과로 나타난 생명체가 마치 실력 좋은 시계공이 설계하고 만든 것 같지만 자연선택은 아무 것도 계획되지 않고 진행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유전자만이 후대에 전달된다.

▲찰스 다윈은 1859년 11월 22일 영국에서 '종의 기원'을 펴냈다. 이 책은 1858년 7월 린네 학회에서 발표한 진화론 논문을 요약한 것으로, 생명의 기원과 발전을 생존 경쟁과 변이 현상 등 자연선택설로 설명했다. 초판 발행 후 창조론과 갈등을 빚었지만 세상에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진
제공. 동아일보
이렇게 '종의 기원' 출간 이후 진화론은 내부적으로도 뜨거운 논쟁을 계속해왔다. 하지만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유전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유전자 선택론이 집단이나 종의 선택과도 통할 수 있다고 밝혀지면서 굴드파와 도킨스파 간의 간극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진화론은 자연과학의 영역을 넘어 다른 분야로 진화해 가는 데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과거에 진화론은 사회진화론이나 우생학과 같은 수준으로 엉뚱하게 이용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생활 속에 파고들면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에드워드 윌슨이 제창한 '사회생물학'이 그 대표적인 예다. 사회생물학은 희생적 행동, 사회적 협력, 일부다처제 등 인간의 흥미로운 사회적 행동을 '자연선택에 대한 적응'이라는 진화론적 과정으로 파악하려 한다. 여기서 나온 진화심리학은 외부환경이 인간의 존재와 사고방식을 결정한다는 등의 기존 심리학을 모두 거부한다. 그리고 마음의 뿌리를 찾고, 인지구조가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해 연구한다. 인간의 마음은 뇌의 작용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은 진화에 살아남기 위한 적응방식이라는 것이다.

행동경제학, 신경경제학 등의 진화경제학에서는 경제행위자인 개별 인간의 본성에 주목한다. 이들에 따르면 개인은 언제나 합리적이지는 않다. 현실에서 사람은 편견에 빠지거나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경우도 많으며, '절대적 최선의 길'을 택하기보다 '충분히 좋은' 결과를 찾곤 한다는 것이다.

▲행동경제학에서 인용되는 '죄수의 딜레마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도표. 갑과 을이 모두 묵비권을 선택할 경우 둘 다에게 유리하지만 보통은 둘 다 자백을 선택하게 된다. ⓒ2009 HelloDD.com
'죄수의 딜레마 이론'이 대표적인 사례다. 공범 혐의가 있는 갑과 을 두 명이 심문을 받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들은 각기 다른 방에 있고 갑과 을은 자백과 묵비권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위의 표처럼 갑과 을 모두 묵비권을 행사한다면 1년 형이 되지만 보통은 두 명 모두 자백해버린다. 이러한 선택은 생물학적 진화 과정에서 생성된 협력행동과 맞닿아 있다.

진화심리학과 진화경제학은 기존 학문에 많은 대안을 제시하면서 이미 독립된 학문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 진화론의 영역은 어디까지 확장되어 갈수 있을까. 에드워드 윌슨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과학과 예술을 아우르는 진화론적 통섭의 시대가 열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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