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시간제 그후] 연구현장 "취지 좋으나 연구 특성에 맞지 않아"
결재받기 귀찮아 도둑근무도···'금요일 자리비는 실험실' 부작용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면 주 52시도 긴 근무시간이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잖아요. 제도를 도입하기 전에 연구현장을 먼저 살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본적인 취지는 좋아요. 하지만 세포합성이나 동물실험은 주 52시를 맞춰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연구 흐름이 끊기면 안 되는데 제도 때문에 제약이 생겨요. 하루면 끝낼 연구가 며칠 걸리니 불편합니다." 
 
"연구직은 주어진 업무를 채워가는 것이 아닌 스스로 발전을 위한 것도 크거든요. 정해진 시간 안에 일하고 퇴근하라는게 맞는 제도인지 모르겠어요."

(출연연 종사자 인터뷰 中)

 
연구개발 업종을 대상으로 주 52시 제도가 시행된지 100일이 지났다. 6시만 되면 컴퓨터 자동 off를 알리는 알림창, 퇴근을 알리는 메일이 들어온지 수일째다. 과학자들의 연구환경은 어떻게 변했을까.
 
많은 연구원은 이전과 크게 다른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다만 역동적인 연구현장에 주 52시간을 일괄 적용하기엔 아쉬운 점이 많다는 지적이다. 특히 주기적으로 관찰이 필요해 주 70시간, 80시간 몰아서 연구해야 하는 경우, 자율적 야근을 할 수 없어 불편함을 호소했다. 하루 이틀 집중해 마무리할 수 있는 연구도 수일 더 걸리는 부작용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물론 필요하면 결재를 올려 야간 근무와 주말 근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재가 번거로운데다 상사 눈치가 보여 따로 초과수당을 받지 않고 도둑 근무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외부에서 연구비를 수주해 인건비를 충당하는 비율이 높은 출연연 특성상 늘어나는 인건비만큼 연구비가 줄어드는 사정을 잘 아는 연구원들도 결재 올리기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마련된 제도인 만큼 근본적인 취지에 공감하지만 연구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R&D 특성에 맞는 52시간제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정책 따로 현장 따로 "결재받는 시스템으로 바뀌었을 뿐"
 
"우리 실험실은 이전에도 워라밸이 잘 지켜졌었거든요. 그래서 크게 달라진건 없어요. 오히려 연장근무를 위해 결재를 받는 등 방식 자체에서 오는 귀찮음이 커졌어요. 의미 없는 허울뿐인 정책인 것 같아요." (출연연 박사후 연구원)

 
출연연에서 학생연구원을 거쳐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하는 A 박사는 6시 이후 컴퓨터 사용 결재를 매번 받기 귀찮아 프로그램이 깔리지 않은 컴퓨터를 사용한다. '자기 계발', '자율근무' 등 버튼을 누르면 컴퓨터 사용이 가능하지만 이조차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연구원들이 암암리에 프로그램 자체를 깔지 않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프로그램을 설치한 연구원들은 '한 달 치 PC 사용 결재를 받아 놓자'라는 농담까지 오간다.
 
그는 "야근을 조장하는 문화를 막기 위해 소소한 것까지 소장, 센터장의 결재를 받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제도는 좋지만, 진행방식에서 오는 귀찮음이 커졌다"며 "연구는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게 어려워 연구실을 주 52시로 규제해 운영한다는 것은 현실을 반영한 대책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박사후과정은 정규직도 아닐뿐더러 우리는 스스로 발전을 위해 연구하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주어진 일을 채워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만큼 시간을 정해놓고 연구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현실을 반영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비정규직 연구원도 "현 제도에 큰 불만은 없지만 결재를 올리는게 많이 불편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깜빡하고 결제를 안 했을 때는 그냥 퇴근하게 된다"며 "제도 시행 3개월 정도 지났지만 직접 실험하는 연구원들은 대부분 좋아하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학생연구원들을 근로자로 보고 주 52시를 적용하는 것이 맞느냐는 지적도 있다. B 연구원은 "미국에서 학위를 할 때 주 80시간 90시간씩 연구를 할 때도 많았다. 학위는 시간으로 정해놓을 수 없는 것"이라며 "4년 안에 끝낼 수 있는 사람의 학위를 7년까지 늘리는 정책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 몰입도 향상됐지만 연구 연속성, 유연성 떨어져 
 
"예전엔 급한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모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러면 큰일나죠. 선배들도 엄청 신경써요."(출연연 책임급 연구원)
 

제도 시행 이후 책임급 연구자들은 후배들이 최대한 주 52시에 맞춰 연구할 수 있도록 매사 조심 또 조심하고 있다. 야근을 조장하는 말투나 행동 등을 하지 않기 위해 소소한 것도 신경 쓴다. 그러다 보니 임팩트 있는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 실험이라고 해도 후배들에게 제안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미국으로 1년 연수갔다 최근 한국으로 복귀했다는 책임연구원 L 씨는 "미국에 있는 많은 연구자에게 주 52시 제도를 이야기했다니 놀라더라. 자율적인 근무까지 막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었다"면서 "선진국은 우리보다 적게 일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있지만 내가 본 그들은 평일 주말 없이 기술개발에 더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출연연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연구자도 "장비를 이용해 연구하다 보면 조금씩 지연 되는데다 되도록 야근도 어려우니 다음날, 또 다음날로 계속 밀린다. 실제로 반응을 보는 실험들은 일정을 제때 잡지 못해 답답한 경우가 많다"”며 "성과도 늦게 나오고 연구 효율성도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자율적인 환경에서 연구하는 것과 제약적인 환경에서 연구하는 것에는 큰 차이를 만들 것"이라며 "연구를 한 번에 몰아 했다가 아이디어를 짤 때는 쉬엄쉬엄하는 것도 필요한데 시간을 따져서 연구하라니 답답할 노릇이다. 당장 지금은 몰라도 전체적인 연구퍼포먼스는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제도 시행으로 좋아진 점도 많다. 재량 근무제를 하는 연구원들은 출장이나 타 연구기관에 갈 때마다 써야 했던 출장실적 등 서류 등을 작성하지 않아도 돼 일이 덜어졌다. 개인 일정에 따라 편하게 근무시간을 조정할 수 있어 자유로워진 부분도 있다. 일에 집중도와 몰입도를 갖다 보니 야근하는 모습도 많이 줄었다. 그만큼 가족이나 개인을 위해 할애할 수 있는 시간도 늘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월-목 몰아서 근무하고 금요일 쉬는 연구자들도 생기면서 금요일만 되면 텅텅 비는 실험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과 쉬고 싶은 사람의 보이지 않는 마찰이 연구실 분위기를 흐리고 있다. M 박사는 "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과 퇴근하고 싶은 사람 간의 의견일치가 잘 안돼 분위기가 모호해질 때도 있다"고 털어놨다.
 
주 52시는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연구자가 다른 것은 신경 안 쓰고 오로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을 때 꺼낼 수 있는 카드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S 박사는 "연구자는 기본적으로 시간을 따지지 않는다. 연구라는 특수직종에 있는 사람으로서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현 제도는 그런 부분을 고려했는지 잘 모르겠다"면서 "연구자들의 일과 삶의 균형도 좋지만, 연구자들이 연구에 몰입해 신명 나는 연구실 생활을 하며 제대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연구자도 "과다한 근무를 막아주는 제도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연구원들이 하루 4시간이든 10시간이든 실험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마치 생산직처럼 연구를 하게 만들어버리니 불편하다"면서 "연구의 연속성과 유연성이 떨어져 결국 출연연을 돈 먹는 하마로 만드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편, 내년 1월 1일부터 50~299인 사업장에 적용계획이던 주52시간제는 사실상 연기됐다. 18일 고용노동부는 '주52시간제 입법 관련 정부 보완대책 추진방향'을 발표하고 최소 6개월에서 1년까지 주52시간 근로시간을 어기더라도 처벌하지 않는 계도기간을 부여한다고 밝혔다. 

노동부의 보완대책발표는 탄력근로제 개선을 포함한 근로기준법 개정이 국회에서 지연됨에 따른 것이다. 노동부는 입법 논의 상황을 더 지켜보고 논의에 진전이 없을 경우 시행규칙 개정 절차에 착수해 내년 1월 중 개선제도 시행을 준비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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