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투표 대신 '블록체인'···마을 주민 속에 들어온 '과학'

송촌동·덕암동·중리동 '마을의제' 선정에 신기술 시범 적용
스마트폰으로 익명 투표, 의견 제시···개인정보 침해 없어
"사용자는 '편리성'이 우선···고령자 사용, 참여 유도 남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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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정 기자 - 2019.09.04

블록체인은 아직 우리에게 먼 기술일까? 최근 대전 대덕구의 주민총회 현장은 '블록체인' 기술이 시민의 삶에 들어오는 과정을 보여줬다.

지난 8월 29일 저녁 6시, 대덕구 덕암동 새일초등학교 체육관에 주민 250여 명이 모였다. 이날은 마을의제의 우선순위를 주민이 결정하기 위해 열린 첫 '주민총회'다.

지난 20여 년간 친목 모임 성격으로 이어오던 주민자치위원회가 올해 주민자치회로 전환되면서 주민총회가 생겼다. 여기서 주민이 선정한 우선순위에 따라 주민자치회는 동네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첫 주민총회에서 돋보이는 것은 투표에 처음으로 도입된 블록체인 기술이다. 보통 주민의 의견을 조사할 때는 종이에 적거나 스티커를 붙이는 형태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날 투표에 쓰인 도구는 투표용지와 투표함이 아닌, 스마트폰. 

주민들은 스마트폰으로 웹 페이지에 접속해 휴대폰 번호로 주민인증을 거친 후, 6개 의제 중 3개를 선택했다. 블록체인으로 온라인 투표가 가능해지면서 현장에 오지 못한 주민 400여 명이 사전투표를 했다. 온·오프라인 참가자는 총 1141명으로 덕암동(행정동 기준) 주민 1만4768명의 4.5% 정도다. 실시간으로 집계된 결과는 투표가 종료되자마자 발표됐다.

덕암동 주민총회에서 주민이 스마트폰으로 투표 페이지에 접속하고 있다. <사진=한효정 기자> 덕암동 주민총회에서 주민이 스마트폰으로 투표 페이지에 접속하고 있다. <사진=한효정 기자>

◆ "소신 투표 장점"···시설물 신고, 의견 창구 등 활용 가능

블록체인은 쉽게 말해 가상 공개 '장부'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자신의 기록을 다른 사람이 고칠 수 없다.

주민총회 투표에서는 각자 전화번호로 주민을 확인받기만 하면 고유한 계정이 생긴다. 언제든지 앱에 접속하면 익명으로 투표를 하고 의견을 남길 수 있다. 투표 결과를 주민과 외부인이 볼 수 있지만, 조작은 안 된다. 의견에 공감하고 댓글을 달 수는 있다. 개인정보를 침해하지 않고 안전하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 블록체인 투표의 가장 큰 장점이다. 
 
60대 후반인 주민은 "예전에는 큰 종이판에 스티커를 붙이는 방식으로 의견을 모았는데, 오늘처럼 온라인으로 하면 사전에 자료를 검토할 수도 있고 남이 보지 않는 상태에서 소신껏 투표할 수 있다"며 "앱에 글을 계속 올릴 수도 있어서 공무원들이 언제든지 주민들의 의견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밝혔다.

한 50대 주민은 "이런 방식으로 투표하는 건 처음이라 시간이 좀 걸렸는데, 오늘 배워놓고 나중에 또 사용하면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사전투표를 했는데 어렵지 않았다"면서 "다만 어르신들이 사용하기 힘든 것과 홍보가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이날 청소년들은 온라인 투표를 수월하게 했지만,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고령자들은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들의 이용을 편리하게 하는 것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다.

8월 29일 덕암동 주민자치회 출범 기념으로 주민총회가 새일초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렸다. 이날 초등학생부터 고령자들까지 다양한 연령대 주민 250여 명이 참석했다. 주민자치학교에서 교육을 이수한 주민자치회 구성원은 주어진 예산으로 마을의 의제를 해결한다. <사진=한효정 기자> 8월 29일 덕암동 주민자치회 출범 기념으로 주민총회가 새일초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렸다. 이날 초등학생부터 고령자들까지 다양한 연령대 주민 250여 명이 참석했다. 주민자치학교에서 교육을 이수한 주민자치회 구성원은 주어진 예산으로 마을의 의제를 해결한다. <사진=한효정 기자>

주민총회에 블록체인을 활용하게 된 배경은 지난 5월 있었던 대덕구청 공무원 워크숍이다. 이날 박정현 구청장은 직원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워크숍에 블록체인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직원들이 스마트폰 앱에 입력한 글은 강당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나타났다. 물론 익명이다. 구청장은 이에 대해 그 자리에서 답변하기도 하고 반대로 직원들에게 질문하기도 했다.

민찬기 대덕구청 교육공동체과 과장은 "직원들이 직접 말하기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활발한 대화가 오갔다"며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민 과장과 부서 직원들은 이날 블록체인의 효과를 체험한 후 이를 대덕구 주민총회에 도입하기로 했다. 대덕구청은 대전 스타트업 빅픽처랩(대표 금창섭)과 계약을 맺고 덕암동·송촌동·중리동 주민총회에 블록체인 기술을 시범 적용했다. 8월 14일 송촌동을 시작으로 29일 덕암동, 31일 중리동에서 블록체인 기반 주민총회가 열렸다.

현장의 요구에 맞춰 주민투표 앱에 변화도 있었다. 첫 행사인 송촌동 현장투표에서 앱의 버튼이 혼동된다는 주민들의 사용 후기를 반영해 덕암동 앱에는 버튼이 한 개로 줄었다.

기술 구현을 담당한 금창섭 대표는 "그 영향으로 덕암동 사전투표 비율은 송촌동(19.5%)보다 약 17% 포인트 증가했다"며 "연구자들은 기술을 완벽하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지만, 사용자들은 기술의 위대함보다 편리함을 요구한다. 사용자의 특성에 맞춰 유용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더라"고 강조했다.

블록체인은 투표 외에도 여론조사, 시설물 신고, 주민 모임 등에 여러 곳에 적용될 수 있다. SNS 채팅방처럼 정보가 휘발되지 않아 의견 모집 창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민 과장은 "시범 앱이 더 발전하면 활용도가 다양해질 것 같다"면서 "지금은 기술보다 사람들의 관심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금 대표는 "대덕e로움 같은 대덕구의 지역화폐와 블록체인을 연결해 참여자에게 혜택을 주는 방법 등도 있다"고 제안했다.

한편, 주민총회를 통해 각 동에서 1위로 뽑힌 의제는 ▲산책로 개선(덕암동) ▲쓰레기 무단 투기 안내문, 규제 시설물 설치(중리동) ▲송촌 주민자치 바로 알기(송촌동)다.

덕암동 주민총회 투표 결과 화면의 일부. <자료=빅픽처랩 제공>덕암동 주민총회 투표 결과 화면의 일부. <자료=빅픽처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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