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회]산·학·연 전문가 5人, 현황 진단과 방향 제시
산업 화학 가르칠 교수 없고, 중소기업 국내서 외면받아
비인기 분야 과제 지원, 교수 평가 개선, 기업 규제 풀어줘야

"이번 사태는 한국 과학·산업계의 체질을 개선할 좋은 기회다."
지난 9일 대덕넷이 개최한 '일본 수출규제 대응 좌담회'에서 산·학·연 전문가들은 수출규제를 국내 R&D 방향와 기업 생태계를 재점검할 기회로 삼자고 한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중소기업의 규제 개혁은 물론이고, 소재·역학·가공 등 대학과 연구원에서 인기가 없는 분야에도 관심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또, KAIST가 이번에 만든 소재부품장비 기술자문단 등이 오래 이어지려면 교수의 기업 지원 활동도 평가 기준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좌담에는 이태석 아이피아이테크 대표, 이혁모 KAIST 신소재공학과장(기술자문단 첨단소재분과 팀장), 이희철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前 나노종합기술원 원장), 조양구 前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최두선 한국기계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참석했다.

(왼쪽부터)이혁모 KAIST 신소재공학과장, 이희철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 이태석 아이피아이테크 대표, 조양구 前 표준연 책임연구원, 최두선 기계연 책임연구원. <사진=대덕넷>
(왼쪽부터)이혁모 KAIST 신소재공학과장, 이희철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 이태석 아이피아이테크 대표, 조양구 前 표준연 책임연구원, 최두선 기계연 책임연구원. <사진=대덕넷>
◆ 전반적 체질 개선, 기본 다시 다지는 계기로

이희철 : 10여 년 전 일본 경제담당 공사에게 한국은 일본에 경쟁자가 될 만큼 성장해 일본 산업체에서는 한국과의 경제협력을 상당히 꺼린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 일본 국민 앙케트 조사서도 80% 이상이 아베 정권의 수출 규제를 찬성한다고 하더라. 일본이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를 경쟁에서 떨치려는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규제가 또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중국에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장기적 대책을 세워야 할 때다.

최두선 : 우리나라의 냉정한 현실은 반도체 장비에 어떤 소재·부품이 어떻게 쓰이며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도 제대로 못 파악한다는 것이다. 과학·산업계 체질을 분석하고 어떤 외부 환경이 와도 견딜 수 있는 장기적인 계획을 짜야 한다. 1~2년 꾸준히 정책을 생각해야 한다. R&D 방향을 고민할 좋은 기회다. 연구소가 전체적으로 모여서 문제를 해결할 구심점도 필요하다. 

조양구 : 우리 사회가 이번 사태를 통해 사회 전반적인 규칙을 제대로 갖춰야 한다. 단순히 소재·부품 하나만 해결해서 될 일은 아니다. 또한 과학과 산업 생태계 구성원들의 믿음 속에서 좋은 소재가 나온다.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 소재·역학·가공 등 '산업형 화학' 가르칠 교수 없는 현실

이희철 : 소재·부품·장비 분야는 이론적으로 검증하거나 시뮬레이션으로 예측하기 상당히 어렵다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아주 많은 실험 결과나 노하우 축적이 필수고 이것이 곧 제품의 경쟁력이다. 장기적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본이 이 분야서 경쟁력이 강한 첫 번째 이유는 50년, 100년 이상 기술을 축적해 온 강소기업들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또, 일본에 문제가 생기면 어느 분야든지 그것을 수십 년 꾸준히 연구해서 해결할 수 있는 대학·연구원 내 전문가가 어디선가 나타난다. 강소기업을 뒷받침하는 곳이 대학과 연구소인데, 우리나라 대학과 연구소에서는 한 연구 주제를 10년 이상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이혁모 : KAIST 신소재공학과는 지난 5년간 산업형 화학소재 분야 교수를 선발하려 꽤 노력했는데 적임자도 없고 지원자도 없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이 분야에서는 연구를 아무리 잘해도 임팩트 팩터가 높은 학술지에 논문을 싣기 어렵다. 그러니 이 분야 전공자는 교수가 되기 매우 힘들다. 아마 임용이 되어도 심사나 승진도 안 될뿐더러 학생 모집도 잘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분야 연구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불화가스와 포토 레지스트는 최종 제품에 등장하지는 않고 중간 과정에서 사용됐다가 사라지는 소모품이기 때문에 이 소재의 존재와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조양구 : 논문으로 실적을 따지니 인기 분야 교수를 채용한다. 기계공학과는 역학을 가르칠 교수를 뽑기 힘들다. 화학공학, 물리학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나노나 그래핀 등에 연구 과제가 집중되어 있다. 정부가 방향을 잘못 틀었다. 일본인들이 연구하는 분야는 주로 땀 흘리는 노동을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고 논문에 내지도 못한다.

주목받지 못하는 분야라도 10년 이상 해 온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면 이런 일이 있을 때 활약할 수 있다. 그러려면 연구자에게 정치 등 외부 힘이 개입하면 안 된다. 이것저것 해보고 실패도 겪고 그렇게 오랫동안 하다 보면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어느 정권이나 이 거대한 연구단지를 정권의 홍보 동물원쯤으로 생각하고 보여주기에만 치중해온 결과가 아닌가 싶다.

최두선 : 첨단 연구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장 기본이 되고 반드시 해야 할 역학·절삭·가공·주물 이런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정말 드물다. 뚜껑을 열어보면 우리는 볼트에 코팅도 하나 못 한다. 앞으로는 가는데 뒤는 빠지고 있다. 연구자의 자세도 변해야 한다. 자기 것만 챙기기 바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내가 이걸 할 수 있다'가 아니고 할 수 있으니 함께 모여서 풀어보자는 생각을 해야 한다.

◆ KAIST 기술자문단 흐지부지 안 되려면···교수 평가 개선 必

이혁모 : 지난 5일 KAIST가 소재·부품·장비 기술자문단을 발족하고 며칠 만에 벌써 중소기업, 대기업 등 12개 업체서 연락이 왔다. 한 기업은 예상되는 수출규제 품목의 성능을 개선하고 싶은데 담당자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단기적으로 교수들이 도울 것들도 있고, 당장 해결하기 힘든 것들도 있다. 그래도 많은 분이 체질 개선 기회라고 공감하시는 분위기다. 앞으로 기계·화공·소재 등 분야가 섞여서 대응하지 않을까 싶다. 자문단이 계속 모이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이희철 : KAIST가 국가의 큰 문제를 같이 풀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고 KAIST의 역할이다. 기술자문단이 흐지부지되지 않으려면 논문과 특허가 중심이 되는 교수평가를 개선해야 한다. 젊은 교수들이 '황금어장'에 미리 가서 10년 이상 준비하게 하려면, 논문 수에만 얽매이지 말고 교수의 기업 지원 활동이나 창의적인 연구도 인정해줘야 한다. 그래야 기술자문단이 지속될 수 있다. KAIST 전기·전자공학과는 5개월 전, 대학원 졸업을 위해 임팩트 팩터가 높은 학술지에 반드시 논문 몇 편 이상을 내야 하는 관행을 없앴다. 

조양구 : 20년 전에 반도체 관련 사업에 참여한 여러 연구원 전문가들이 전국 기업을 탐방했다. 현장을 보면 또 다른 게 보인다. 그 회사의 문제점을 듣다 보면 연구자들이 연구 기회도 찾을 수 있다. 전문가들도 현장에서 반도체 재료나 장비를 직접 본 경험이 없다. 회사 입장에서는 여러 선생님을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도움이 많이 된다고 했다. 기술자문단도 이 점을 참고하면 좋겠다.

이태석 대표는 "화학소재 관련 규제는 수십 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며 직접 만들어 국무총리실에 보낸 법령 관계도를 보여줬다. <사진=대덕넷>
이태석 대표는 "화학소재 관련 규제는 수십 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며 직접 만들어 국무총리실에 보낸 법령 관계도를 보여줬다. <사진=대덕넷>
◆ 규제에 묶이고 대기업에 외면받는 중소기업

이태석 :  일본에 의존도가 높은 폴리이미드 제품을 국산화하기 위해 2015년 창업했다. 수출규제가 터지고 구명정이 일본에서 날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규제다. 한국에서 화학소재 사업을 하기 정말 힘들다. 유해물질을 관리할 수 있으면 사용하게 해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아무도 이 규제를 어떻게 풀지 모른다. 관련 법령은 수십 개고 유관기관도 6개가 넘는다. 얽히고설킨 규제 관계를 아는 공무원은 거의 없다. 각자 자기 것만 안다. 최근 이런 현실을 알리자 시청, 중소벤처기업부, 국무총리실 등 관계자들이 적극적으로 도우려는 것 같아 희망이 있다.

이희철 : 지난 정부서도 규제 개혁을 첫 과제로 여겼는데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공무원이 굉장히 중요하다. 일본의 공무원들은 한 분야에서 오래 근무하기 때문에 깊은 전문 지식이 있다. 정치 논리나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책임감을 느끼고 장기 국책 과제를 일관성 있게 추진한다. 우리도 이런 환경이 필요하다.

이태석 :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연결도 안 된다. 우리 회사 과제 성공률은 99%지만, 한국에서 아무도 안 써준다. 품질 때문에 일본 제품을 선호한다. 오히려 중국과 동남아에서 우리 제품을 알아준다. 국내 대기업의 소재 담당자는 중소기업 제품을 써보려 하지만, 그다음 공정 담당자가 책임 문제 때문에 비싸더라도 검증된 것만 쓰려 한다. 

최두선 : 중소기업 제품의 신뢰성 문제도 있지만,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개발 노하우를 달라고 하는 것도 문제다. 대체로 중소기업이 돈을 투자해서 얻어낸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려다 보니 동반 성장이 안 된다. 중소기업도 돈을 벌어야 한다. 대기업이 각성해야 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 제품을 쓰겠다고 해도 수요량이 많기 때문에 현재 규제로는 중소기업이 생산을 확장하기 어렵다.

◆ 중소-대기업 매칭 펀드 제안···대체재 전략도 짜야

이희철 :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연구 개발비를 인정하지 않고 제품 단가를 내리려는 풍토를 해결하기 위해 페널티보다는 당근 정책이 바람직하다. 대기업에서 꼭 개발해야 하는 기술이나 부품을 중소기업에서 연구할 때, 정부가 중소기업에 연구개발비를 주는 동시에 대기업도 지원해주는 매칭펀드를 제안한다.

중소기업 제품을 대기업이 사면 대기업에 세금 감면을 해주는 제도도 필요하다. 또, 중소기업과 대기업에게는 제품 신뢰성 검증이 부담되는 일이다. 공정·평가 장비와 축적된 경험이 있는 출연연에서 신뢰성 검증 기관 역할을 해야 한다. 
 
이혁모 : 회사들은 이번 기회로 대체재를 찾고 다국적 멀티 벤더를 구성해야 한다. 어제 기술자문단에서 만난 L 기업 관계자도 대체재와 벤더를 재조사하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정말로 국가에서 필요한 것들을 소홀히 했다. 감정적 접근 대신 이 기회를 통해 차근차근 과학·산업계 역할을 재점검해야 한다. 크게 주목받지 않았지만, 이런 문제는 수십 년 전부터 늘 반복되어 왔다. 국민들의 성원과 주목을 받을 때 우리가 반 이상은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사태를 좋은 기회라고 본다. 주위 사람들도 그렇게 말한다.

이희철 : 다 잘 할 수는 없지만, 적절한 범위에서는 타국에 너무 의존적이지 말아야 한다. 일본을 공급처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게 좋다. 일본보다 성능은 조금 낮아도 이번처럼 중요한 소재는 항상 대체할 수 있도록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를 깨달았다.

조양구 : 일본에 없고 우리가 가진 것들을 키우고 고품질 제품을 수출하는 방법도 생각해봐야 한다. 유대인은 독립 이후에도 철저히 독일 제품을 쓰지 않았다. 사회 곳곳에서 일본 제품에서 독립하려는 독한 마음을 먹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최두선 : 우리가 힘을 내야 할 때다. 협력하면 굉장히 잘 될 것이라 본다. 주춤하고 기죽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인프라, 인재,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충분히 있다. 각자 이번 사태에 어떻게 기여할지 생각해보자. 이제는 한 번 해보는 게 아니라 최고가 되어야 후배들에게도 귀감이 될 수 있다. 

이태석 : 이번 수출규제를 좋은 기회로 생각한다. 벤처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 당장은 괴롭지만, 중소기업을 키우는 계기가 되어 국산화도 이루고 경제도 살길 바란다. 한국 사람도 똑똑하다. 힘을 모으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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