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붐 세대 대거 정년···출연연 올해와 내년 500명 퇴직
100세 시대, 은퇴 후 새로운 삶 "제도+연구자 의지 둘다 필요"

퇴직 과학자 수가 사상 최대다.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에서 1963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2020년 은퇴를 앞두고 있다. 당시 태어난 인구 수만 900만 명. 정년이 빠른 기업을 시작으로 출연연과 대학 등 과학기술계의 급격한 세대교체가 이뤄질 전망이다.
 
출연연의 경우 내년까지 약 500여 명의 연구자가 정년퇴임을 맞는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자료에 의하면 올해 25개 출연연 정년퇴직자(예정)는 234명이다. 원자력연이 44명으로 가장 많고, ETRI 42명, KIST 33명, 표준연 15명이 그 뒤를 잇는다. 내년엔 294명으로 올해보다 60명 더 많다. ETRI 55명, 원자력연 43명, KIST 20명 표준연 18명 순이다.

올해와 내년 출연연 은퇴과학자(예정)<자료=NST 제공>
올해와 내년 출연연 은퇴과학자(예정)<자료=NST 제공>
이들은 우리나라 경제성장 주역으로 활약하며 연구현장을 누빈 경험 많은 과학자들이다. 한꺼번에 대거 은퇴로 연구의 질적 저하와 연구 단절 등 국가적 손실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고 은퇴 후 과학자들이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대안은 거의 없다.

현재 은퇴과학자의 이후 삶의 책임은 개인에게 맡겨진 상태다. 정부나 각 연구소에서 창업 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지만, 연구자들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 쉽지 않다. 그들을 활용할 방법은 중소기업기술지원(이마저도 기회가 많지 않다)과 과학관 지식기부 참여 정도다. 은퇴과학자의 경험을 활용할만한 대책이 뚜렷하게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다.

과학선진국들의 은퇴과학자 사례를 보자. 과학기술연우연합회에 의하면 이미 대거 은퇴를 경험한 미국의 경우 현실 적응을 위한 퇴직 과학기술인의 재교육이 이뤄진다. 이후 비영리단체에 종사하기도 하고 나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일본은 지적클러스터 사업을 통해 고경력과학기술인을 활용하고 R&D 전략연구를 수행하는데 참여하도록 한다. 네덜란드와 독일은 퇴직 전문가를 대상으로 해외 파견사업을 실시한다. 네덜란드는 매년 3200여명이 2000개 업체의 자문 역할에 참여하며 인생 2막을 활기차게 보내고 있다.
 
100세 시대. 출연연 평균 정년 61세, 은퇴 후 30~40년을 위한 새로운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과학계에서 은퇴 후 대안이 뚜렷하게 없는 게 현실이다. 가장 효율적인 방안은 무엇일까.  

은퇴한 선배 과학자들은 정년 이후 삶의 보장을 사회에 바라기만 해선 안 된다고 조언한다. 출연연 은퇴 후 창업한 한 과학자는 "제2의 인생이라는 단어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인생 이모작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받은 것들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생각과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채연석 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원장은 은퇴과학자 활용 방안으로 연대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그는 "중소기업, 벤처 컨설팅은 연대해서 할 필요가 있다"면서 "컨설팅은 혼자 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돼 있고, 한 사람이 맡으면 시각이 좁아질 수 있다. 은퇴 과학자들이 축적한 다양한 시각을 통해 컨설팅이 이뤄지면 기업·은퇴 과학자 모두 만족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어 개인 역량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은퇴 전부터 실력을 쌓고 네트워킹하면서 기업 자문, 청소년 강연 등 오는 기회를 잘 준비해야 한다"며 "연구소에 있을 땐 개인·조직적으로 할 일이 많지만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 창업자들 "은퇴 후 일하는 사람 10%도 안돼…제2인생 위한 본인 의지 필요"

 

ETRI연구원으로 활동 후 창업한 임춘식 알씨엔 대표는 은퇴 후 제2의 삶을 살기 위해 본인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사진=대덕넷 DB>
ETRI연구원으로 활동 후 창업한 임춘식 알씨엔 대표는 은퇴 후 제2의 삶을 살기 위해 본인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사진=대덕넷 DB>
"온실 속 화초처럼 연구만 하다 창업한 지 5년이 지났네요. 제2의 인생을 목표로 시작한 만큼 앞으로도 열심히 해야죠."
 
창업으로 은퇴 후 삶을 더 활기차게 지내는 연구자들은 개인 의지의 중요성을 피력한다.

임춘식 알씨엔 대표는 ETRI 정년퇴임 후 2014년 4월 차량IT 단말 및 관련 부품 업체를 창업했다. 그는 ETRI 재직시절 단거리 무선패킷 통신기술(DSRC)을 기반으로 도로공사의 하이패스, 대전시와 전주시의 버스 안내 등 글로벌 지능형 교통시스템(ITS)을 상용화한 주역이다.
 
자본금 1000만원으로 시작한 1인기업 알씨엔은 5년만에 연 매출 20억원, 10여 명의 임직원을 둔 기업으로 성장했다. 사업에 대해 일절 몰랐던 연구자의 새로운 도전에 주변 걱정도 많았지만, 애초에 창업을 통해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내가 받은 것들을 사회에 환원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창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33년간 연구원으로 살다 기업인으로 갑자기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회사 운영 5년째지만 여전히 어려운 점도 많다. 감사하게도 매출에 대한 걱정은 크지 않다. 사업가로서의 전문성, 회사 운영을 잘 하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너무 온실 속에서 세상 밖을 모르고 살았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내가 만일 일찌감치 이쪽으로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면서 "최근 정년퇴임 훨씬 전부터 창업을 준비해 과감하게 뛰어드는 후배들이 있더라. 그런 친구들을 보면 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이야기해주려 한다"고 강조했다.
 

 알씨엔은 무선통신기술과 DSRC단말, EMS 관제기술, 센서기술, 음성안내기술, 원격 진단기 등 사업을 하고 있다.<사진=알씨엔 홈페이지>
알씨엔은 무선통신기술과 DSRC단말, EMS 관제기술, 센서기술, 음성안내기술, 원격 진단기 등 사업을 하고 있다.<사진=알씨엔 홈페이지>
창업 후 아쉬운 점을 묻자 그는 "막상 회사를 차려보니 회사 이전 시 주소를 변경하는 것부터 회계문제 등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았다"고 털어놨다. 임 대표는 "이런 것을 신경 쓰는 사이 연구실에서 가지고 나온 기술 100중 70을 잃은 느낌이 든다"고 아쉬워 했다. 힘이 없는 작은 회사에서 기술이 제품화되기 위해 쏟아야 할 시간을 다른 곳에 허비하는 시간이 많았다는 것.
 
그는 "스타트업 컨설팅 프로그램이 참 많은데 초기 기업들은 따라갈 수가 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라며 "차라리 재무나 회계 등을 따로 맡아줄 단체를 양성해서 지원해주는 것이 갓 창업한 새내기들에게 더 필요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KIST 국가기반기술연구본부 소속 이대영 박사는 습도를 제거해 온도를 낮추는 데시컨트 냉방시스템 개발을 이끈 연구자다. 우리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에어컨은 냉각식 제습으로 차가운 표면에 결로가 생기는 현상을 이용하는 제습 방식을 사용한다. 이는 제습되면서 온도가 낮아져 오래 틀어놓으면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 데시컨트 냉방시스템은 실리카겔 등 제습소재의 흡습 특성을 이용하는 기술로 습도를 조절하기 때문에 과냉운전을 막을 수 있어 냉각식 제습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해당 기술을 바탕으로 이 박사는 지난해 1월 KIST 연구원 창업기업 휴마스터를 창업했다. 은퇴를 준비하며 창업을 한 것은 아니지만 보유한 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대영 박사는 '휴미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이대영 박사는 KIST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작년 1월 보유기술 상용화를 위해 창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휴미컨을 개발해 국내외 판매를 시작했다.<사진=KIST 제공>
이대영 박사는 KIST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작년 1월 보유기술 상용화를 위해 창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휴미컨을 개발해 국내외 판매를 시작했다.<사진=KIST 제공>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그는 2015년 재무나 회계, 근로법 등을 배웠다. 한양대의 스타트업 아카데미 창업교육을 통해 사업기획에 대해 발표하고 지금도 궁금한 내용이 생기면 자료를 열어본다.

창업을 준비하며 지원프로그램이 많이 늘었다는 걸 체감했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지원프로그램마다 성격이 다 달라 지원을 받으려면 규정부터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회사 일 중 50%는 행정처리에 쓴다는 그는 "스타트업은 인력이 부족하다. 그들을 지원하는 취지라면 행정부담을 줄이도록 규정을 단순·통일화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우여곡절은 많지만, 창업에 후회는 없다. 그는 "세상에 모든 일이 그렇듯 쉬운 것 없다고 생각한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할 일이 많다"면서 "연구소에서 나온 기술이 기업으로 넘어가 상용화되고 시장에 선보여지는 그런 선순환구조를 창업을 통해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KIST 출신 김서영 박사는 2014년 하이리움산업주식회사를 창업해 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는 KIST에서 액화 수소 및 저장기술, 수소 충전과 수소 드론 등을 연구개발한 과학자다.

ETRI 출신인 박성열 박사는 표준연 기술평가사와 대덕 과우회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후학지원과 기업멘토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은퇴 후 삶을 보내고 있다. 임춘식 알씨엔 대표의 롤 모델이기도한 박 박사는 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활기차고 바쁘게 활동하며 그 누구보다 즐거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정년 가깝게 KIST에서 근무했던 강성철 박사는 올 초 삼성전자 전무로 자리를 옮겼다. 의료, 구조, 국방, 우주항공 등 다양한 로봇연구를 한 그는 삼성에서 로봇기술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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