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노환과 급성폐렴으로 별세···향년 91세
과학산업계도 애도 물결 "국가 발전 기틀 마련"

한국 경제를 설계하고, 중화학공업 발전을 이끌었던 국내 1호 '테크노 크라트' 오원철 前 청와대 경제수석이 30일 오전 7시에 별세했다. 향년 91세.

사인은 노환과 급성폐렴으로 알려진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 14호. 장지는 경기도 가평 가족묘지이다. 

오원철 前 청와대 경제수석.<사진=한국공학한림원 제공>
오원철 前 청와대 경제수석.<사진=한국공학한림원 제공>
오원철 수석은 지난 1960년대와 70년대에 상공부와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주도적으로 국가 주요 산업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특히 故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하며 테크노 크라트(Technocrat)로서 경제 정책 수립과 중화학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28년 10월 황해도 풍천 출생인 그는 1945년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1950년 공군 기술장교후보생으로 입대했다. 이듬해 공군소위로 임관하고,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1957년 공군 소령 전역 이후 시발자동차회사 공장장, 국산자동차주식회사 공장장 등을 역임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으로 발탁하면서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상공부 화학과장, 상공부 공업제1국장,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상공부 광공전 차관보를 거쳤다. 1971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을 역임하며, 중화학공업기획단장직도 수행했다. 

상공부와 중화학공업추진기획단에서 고인과 함께 했던 고정식 前 특허청장은 "고인이 없었다면 당시 경공업 국가 수준의 한국이 중화학공업 기반의 산업 발전을 이뤄내기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사실상 한국의 중화학 공업 설계자(De facto Architect)'로 중화학산업, 방위산업, 과학기술, 행정수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기억하며 애도를 표했다. 

오원철 전 경제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로 활동했다. 고인은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어떻게 고심하고 일했는지를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을 만들었나'라는 저서에 담았다. 이 책에는 한국이 세계 강국 대열에 합류하게 되기까지 추진했던 군 장비의 국산화, 방위산업 육성계획, 석유화학공업 육성 등 국가 부흥 과정에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들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사진=동서문화사>
오원철 전 경제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로 활동했다. 고인은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어떻게 고심하고 일했는지를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을 만들었나'라는 저서에 담았다. 이 책에는 한국이 세계 강국 대열에 합류하게 되기까지 추진했던 군 장비의 국산화, 방위산업 육성계획, 석유화학공업 육성 등 국가 부흥 과정에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들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사진=동서문화사>

상공부에서부터 청와대까지 약 20년 동안 오원철 수석을 보좌한 김광모 비서관은 "고인은 한국경제 발전을 이끈 것 뿐만 아니라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며 대덕연구단지를 실질적으로 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면서 "국가 안보와 미래를 생각했던 고인의 뜻을 과학기술계에서도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대덕의 원로 과학자들도 고인을 애도했다. 장인순 前 원자력연구소장은 "원자력발전을 시작으로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중화학산업 등 대한민국 근대화에 공을 세우고, 대덕연구단지 설계에도 기여했다"며 "현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는 등 과학기술계를 등한시하는 현상황과 맞물려 고인의 별세가 더 안타깝다"고 추모했다. 

이정순 과학기술연우연합회 수석부회장은 "자주국방을 위한 산업 현장도 종종 찾아 중요성을 역설하고 시범도 보였던 기억이 남는다"면서 "창원공단을 비롯해 한국의 중화학공업 발전을 이끌고, 국가 과학기술발전의 초석을 다진 분이 별세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를 설계하고, 중화학공업 발전을 이끌었던 오원철 前 청와대 경제수석이 30일 오전 7시에 별세했다. 사진은 고인의 빈소. <사진=대덕넷>
한국 경제를 설계하고, 중화학공업 발전을 이끌었던 오원철 前 청와대 경제수석이 30일 오전 7시에 별세했다. 사진은 고인의 빈소. <사진=대덕넷>
아래는 김광모 비서관의 추모글. 
 

추모글

장미를 특별히 좋아하셨던 오원철 수석님 

장미의 계절인 5월의 마지막 날 저희들을 두고 홀연히 떠나시게 되어 저희들은 슬프고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수석님을 모셨던 저희들로서는 이제 수석님! 수석님 하고 부를 수도 없게 되었으며, 수석님께 이건 어떻게 할까요? 저건 어떻게 할까요? 물어 볼 수도 없게 되었고, 그것도 몰라? 하고 기합을 받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수석님은 우리나라 민족과 민족의 장래를 진정으로 걱정하고 사랑하셨으며 조국의 발전을 위해 너무나 많은 일을 해 놓으셨습니다. 수석님 욕심으로서는 모자랄지 모르지만 어느 누가 보던지 간에 길이 길이 역사에 빛나는 많은 일을 하셔서 후세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도 오원철 수석을 국보적 존재라고 칭찬하시고 중책을 맡기셨습니다. 

경제개발에 관한 한 오수석은 박대통령의 집권 18년간을 생명을 같이 했습니다. 대한민국 경제건설의 역사를 아시는 분이면 오원철 수석의 공적을 모르시는 분이 없으실 것입니다.

수석님이 남기신 업적은 전국 방방곡곡에 찬연히 빛나고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 먼저가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시면 수고했다고 칭찬을 하실 것입니다. 

저는 수석님의 동창회 회보지의 권두언에 번영하는 대한민국을 건설한 것은 과학기술을 사랑하신 박정희 대통령과 화학공학을 전공한 오원철 수석 덕분이라고 감히 증언한다고 한 바 있습니다.

오원철 수석은 1928년 황해도 송화군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의 서울대 공대전신인 경성고공 화공과를 서울대 5회로 졸업하자 마자 6.25 동란이 일어나 공군에 입대하여 공군 소령으로 제대하였습니다.

그 후 한국 최초의 승용차인 시발차를 개발하기도 하였습니다.
5.16 혁명이 일어나자 최고회의 발령에 의거 상공부 공업국 화학과장으로 부임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기간 18년 동안을 경제개발 업무를 담당하는 공직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혁명정부에서 경제개발을 계획을 최초로 만들어 최고회의에 브리핑한 분은 오원철 과장입니다.

이때부터 오원철 수석에게 브리핑의 명수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오원철 수석이 상공부에 재직 시 화학과장에서 기감 공업국장 그리고 실무 공직자로는 최고직위인 관, 공, 전 광공차관보로 까지 승진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기술관료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60년대 경제개발 계획인 1, 2차 5개년 계획의 정책기조는 공업입국 및 수출제일주의였으므로 60년대 경제개발 계획을 실질적으로 오원철 수석의 책임아래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이 기간에 세계 최빈국에서 개발도상 국가로 승격되었습니다.

격동의 70년대를 맞이하여 한국은 한국의 자주국방을 위하여 방위산업 육성이 절대 절명의 과제로 대두 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한국의 산업을 도약시키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대망의 70년대를 맞이하여 70년대에 도약하지 않으면 한국은 영원히 중진국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두 분은 보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고민하고 계셨던 방위산업을 병기는 부품의 결합체이므로 부품공장을 건설하면 오늘 당장이라도 병기를 만들 수 있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박대통령께 보고 드려 방위산업 육성을 성공시켰습니다.

그 당시 경제기획원과 국방부는 병기별로 공장을 지어야 된다고 주장을 했는데 이것은 기간이 5년이나 소요되며 약 1억 달러의 자금이 소요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재정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5년을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방위산업은 한국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오원철 수석의 아이디어를 받아 들여 방위산업에 착수하였고 오늘날의 방산대국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박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오원철 광공전 차관보를 청와대 경제2 수석으로 71.10월에 임명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60년대의 최빈국의 탈피에 만족하지 않고 경제개발의 도약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오원철 수석 자신도 공업구조를 개편하여 선진국이 되려면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신 하에 소위 100억 달러 수출. 1000 달러 소득을 목표로 하는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기안하여 대통령께 보고 드린바 대통령이 대만족 하여 1973년 1월 중화학 공업화 정책화 정책 선언을 하셨습니다. 내각이나 국내외 경제 학자들이 무모하다 성공한 역사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맹렬히 반대 했습니다. 온갖 반대를 물리치고 추진했습니다  박대통령은 오원철 수석의 소신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중화학 공업화정책을 박정희 대통령의 친정으로 하여 오원철 수석이 책임을 지고 추진하는 청와대 사업으로 만들어 100억 달러 수출은 1978년에, 1000 달러 소득은 1979년에 달성하여 계획보다 3~4년 조기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선진 국가 건설에 탄탄한 기초를 쌓은 것이 되었습니다.
현재 전국의 산업단지에 건설되어 있는 포항의 철강단지. 온산의 비철금속, 거제/울산의 조선공업단지, 창원의 기계단지, 구미의 전자단지, 여수와 울산의 석유화학단지가 40여 년 동안 가동하여 이바지한 실적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철강은 1백만 톤에서 4000만 톤, 석유화학은 10만 톤에서 1000만 톤, 전력은 100만 KW에서 1억KW가 되어 있습니다. GDP 상으로 10위권이며 공업국으로는 세계 5위권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넘어 30-50 국가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장한 일 입니까?

오원철 수석은 일 밖에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남들이 다하는 골프 놀음 게임 등 잡기는 모두 멀리 하셨습니다. 그러나 명석한 두뇌를 가지셔서 새로운 아이디어 창출에 번쩍 번쩍 했으며 정의파였습니다. 나라 산업을 육성시키는 일에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장군의 힘이 막강할 때 장군을 불러 야단을 친 사람은 오수석 밖에 없습니다.

12.12사건 이후 군부로부터 보복을 당한 적도 있지만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강직한 분이셨었습니다. 내부적으로도 인간성이 넘쳐 흘러 후배들의 승진과 경조사에 많은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은퇴 후 30 여 년간 모임을 가지고 있는 이수회 멤버들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3~4년간 건강이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박근혜 대통령 때는 창조경제에 불만이 있어 "김 비서관 아이디어를 만들어 보자"고 하셔서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번 정부에 들어 와서는 중화학공업을 살려야 된다고 만나는 사람마다에 역설하여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업적은 값진 많은 저서를 남기 셨을 뿐만 아니라 매스컴과의 인터뷰를 많이 하셔서 후세에 귀감이 되는 자료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경제건설에 최후까지 일생을 바치신 전설적인 인물 오원철 수석님이 영면 하셨습니다. 

오원철 수석님이 생전에 하시겠다고 하는 생각을 실천에 모두 옮기는 못하셨지만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시면 전세계가 부러워하는 선진조국 건설의 길을 찾아 우리들에게 알려 주실 것으로 믿어 마지 않습니다.

오원철 수석님! 수석님! 
영원한 삶을 누리시기를 기도 드리겠습니다.
영원히 안식하시면서 편히 쉬시옵소서!
 

2019. 5. 30.
김광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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