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다⑤ 마지막편] 민계식 전 현대중공업 회장"단기 성과 내며 장기 연구 요구해야···정부는 믿고 맡겨라""기술 변할 때 인류 발전해 와···역사 알아야 미래 예측 가능"

지난 10일 현 정부의 출범 2주년을 맞았다. 한국의 현실은 산업, 경제, 일자리, 성장 동력 등 여러 지표에서 빨간불이 켜지며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무엇보다 과학선진국들이 인공지능, 자율차, 우주탐사 등 미래 과학기술 선점을 위해 질주하고 있는데 비해 한국은 과학기술 기반의 미래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며 방향성을 잃고 있는 상태다. 본지는 과학계 원로와의 인터뷰(또는 가상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 연구자와 정부의 역할을 들어 보았다.<편집자 편지>

현장 근로자, 연구원 수백명은 이른 아침 늘 같은 자리에 모였다. '골리앗 크레인' 아래에서 건조를 기다리는 선박 옆으로 줄지어 선 이들. 민계식 현대중공업 회장이 오른 주먹을 쥐고 "대한민국에서 최고가 세계 최고"라는 구호를 외치면 "대한민국에서 최고가 세계 최고"라는 수백명의 목소리가 현장에 울려 퍼진다. 2000년대 초 현대중공업 현장 모습은 이랬다. 

민 전 회장은 '세계 일류'를 꿈꿨다. 산업 생태계가 갖춰지지 않았던 1960년대, 잉크가 얼어 글을 쓸 수 없던 대학 시절은 '내가 전문으로 하는 산업은 세계 일류를 만들겠다'라는 꿈을 갖게 했다. 그는 세계 일류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조선 산업에 뛰어들었다. 국내에서 조선항공학을 전공하고, 이후 미국으로 떠나 갖은 수모를 겪으며 해양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조선 산업은 1980년대 초 선박 설계 독자 기술을 확보하고, 1990년대 세계 일류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 배경에는 조선해양 기술 자립을 위해 연구개발(R&D)을 강조했던 민계식 회장이 있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그는 현대중공업을 세계 최고 종합 중공업 회사로 키우며 한국을 조선 강국으로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민 회장이 재직하던 시기 현대중공업은 10년 동안 연평균 27.4% 성장했다.

그는 평소 구성원들에게 "우리 힘으로 하자. 외국에서 기술 사오지 말고 우리가 만들자"고 수시로 당부했다. 기술 자립을 통해 세계 일류로 거듭나 개인·조직·국가가 함께 번영하자는 취지였다. 현대중공업은 1974년 1호선 명명 이후 20년 만인 1994년 4000만t 선박을 건조하는 등 이후에도 유례없는 속도로 선박을 건조하며 조선산업사에 신화로 회자된다.

'원로에게 듣는다' 마지막편은 민계식 前 현대중공업 회장에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 과학·산업계 종사자는 물론 개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들어봤다. 
 

 

민계식 전 현대중공업 회장은 현대중공업을 세계 최고 종합 중공업 회사로 키우며 한국을 조선 강국으로 키운 주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구성원들에게 "우리 힘으로 하자. 외국에서 기술 사오지 말고 우리가 만들자"고 수시로 당부하며 기술 자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술 자립을 통해 세계 일류로 거듭나 개인·조직·국가가 번영하자는 취지였다. <사진=김인한 기자>
민계식 전 현대중공업 회장은 현대중공업을 세계 최고 종합 중공업 회사로 키우며 한국을 조선 강국으로 키운 주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구성원들에게 "우리 힘으로 하자. 외국에서 기술 사오지 말고 우리가 만들자"고 수시로 당부하며 기술 자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술 자립을 통해 세계 일류로 거듭나 개인·조직·국가가 번영하자는 취지였다. <사진=김인한 기자>
◆"단기 성과 내며 장기 연구 요구해야···정부는 믿고 맡겨라"

1990년 당시 기술개발 담당 부사장이었던 그는 현장에서 조선 공업 설계에 매진했다. 저녁 시간에는 지속적으로 공부하며 논문을 쓰고 특허를 냈다. 지금까지 논문 280편, 발명 특허·실용 신안 300건 이상을 낼 정도로 지독한 '공부 벌레'다.

그의 집념은 '힘센 엔진'이라는 선박용 중형 디젤엔진으로 발현됐다. 힘센 엔진은 매년 수천 대씩 팔린다. 세계 중형 디젤엔진 점유율은 20% 수준으로 독보적 1위다. 2000년 9월 개발을 완료해 2001년 1호기를 생산했다. 지금까지 1만개가 넘는 엔진이 글로벌 선박에 공급됐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힘센 엔진은 7년 동안 개발이 진행됐어요. 처음에 제안서를 내니 모두 미쳤다고 하더군요. 경영진이 보기엔 마음에 안 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시 연구개발은 회사와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자기 안위보단 공동체와 국가를 생각하던 시기였죠. 물론 스트레스가 심할 땐 밖에서 뛰기도 했습니다."(웃음)

민 전 회장은 장기 연구를 지속하려면 단기적인 성과를 지속적으로 보여주면서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는 과학기술계를 흔들어선 안 된다는 지적도 했다. 창의력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 과학기술인데, 수시로 흔들게 되면 창의성이 나올 수 없다는 의견이다.

그는 "내가 추진한 정책이 단기 70%, 장기 30%였다"며 "1년 내로 결과가 나올 70%와 3·5·7년 걸릴 30%를 분리했다. 연구를 하다보면 작은 성과들이 나온다. 이처럼 단기성과를 내면서 해야지 단순히 장기연구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경험을 공유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부도 과학기술계를 가만히 둬야 한다"며 "정권이 바뀔때마다 흔들어서는 창의적인 성과가 나올 수 없다"고 덧붙였다.

산·학·연 연계 필요성도 강조했다. 민 전 회장은 "과학 발전이 없으면 산업 발전도 한계가 온다"며 "기초·개발·제품 연구를 하는데 산업계에서만 할 수 없다. 산업계·학교·연구소에서 필요한 연구를 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문·역사 알아야 미래 예측 가능"···보통 사람이 차이 내려면 '열심히'

민 전 회장은 고조선 시대부터 고려·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역사관을 지녔다. 오랜 역사적 사건 속에서 과학기술이 국가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던 그는 과학기술계에 역사의식을 주문했다. 민 전 회장은 "과학·산업계 종사자들은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며 "과학을 알아야 세상 발전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인류 발전은 기술이 변할 때마다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민계식 회장은 과학기술계에 역사의식을 주문했다. 그는 "과학·산업계 종사자들은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며 "과학을 알아야 세상 발전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인류 발전은 기술이 변할 때마다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역사·인문학은 당장 답은 안 주지만, 장래에 대한 해답은 줄 것"이라며 "역사를 통해 세상 맥락을 파악하고, 인문학을 통해 상상력을 발휘할 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짐작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사진=김인한 기자>
민계식 회장은 과학기술계에 역사의식을 주문했다. 그는 "과학·산업계 종사자들은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며 "과학을 알아야 세상 발전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인류 발전은 기술이 변할 때마다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역사·인문학은 당장 답은 안 주지만, 장래에 대한 해답은 줄 것"이라며 "역사를 통해 세상 맥락을 파악하고, 인문학을 통해 상상력을 발휘할 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짐작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사진=김인한 기자>
이어 그는 "역사·인문학은 당장 답은 안 주지만, 장래에 대한 해답은 줄 것"이라며 "역사를 통해 세상 맥락을 파악하고, 인문학을 통해 상상력을 발휘할 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짐작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평생 과학·산업계에 몸담은 민 전 회장이 인문·사회·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부친 영향이 컸다. 부친은 그에게 5살 때부터 '보통 사람'(凡人)을 강조했다. 보통 사람이기 때문에 차이를 내기 위해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게 부친의 가르침이었다. 

민 전 회장은 "능력이 비슷한 사람 가운데에서 차이를 내는 방법은 단지 오늘 하루 10분 더하는 것"이라며 "하루면 10분일지 모르지만, 그게 1달, 1년, 10년이 지나면 하늘과 땅 차이가 된다고 항상 강조하셨다"고 회상했다.  

그의 부친은 '만인 사상'(평등)과 '자조'(自助) 정신도 강조했다. 평등과 자조 정신은 민 회장이 황무지였던 조선 산업을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 가는 기반이 됐다. 특히 글로벌 위기 속에서도 종사자들과 협력하며 국내 조선 산업이 우뚝 설 수 있는 원천으로 작용했다. 

인생의 가을을 맞았다는 민계식 전 회장. 그는 현 시대를 우려했다. 경제·국방 체계가 무너지고 있다면서 그는 젊은이들이 나라에 관심을 갖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알아야 할 건 이렇게 경제적인 혜택을 누리고 살게 된 건 얼마 안 됐다는 사실"이라며 "자유에 대한 고마움을 깨닫고 개인의 안위 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게 국가"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우리는 국가 침탈을 당하며 어려움을 경험한 바 있다. 국가 역할은 국민 보호이고, 국가가 발전해야 각자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과학에는 국경이 없어도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고 역설했다.
 

 

민계식 회장이 직접 쓴 ▲Main is born equal by nature.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동등하다(평등 사상). ▲Mediocre 평범한(범인 사상).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자조 정신). 민계식 전 회장 부친은 3가지를 강조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 정신을 강조했다. 민 전 회장은 누구나 보통 사람이라는 범인 사상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보통 사람이 차이를 만들기 위해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게 교육의 내용이었다. <사진=김인한 기자>
민계식 회장이 직접 쓴 ▲Main is born equal by nature.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동등하다(평등 사상). ▲Mediocre 평범한(범인 사상).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자조 정신). 민계식 전 회장 부친은 3가지를 강조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 정신을 강조했다. 민 전 회장은 누구나 보통 사람이라는 범인 사상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보통 사람이 차이를 만들기 위해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게 교육의 내용이었다. <사진=김인한 기자>
◆민계식 전 현대중공업 회장은

1942년생으로 서울대학교 조선항공학 학사, 캘리포니아대학교 조선공학 석사,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해양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현장에서 현대중공업 기술개발을 진두지휘했다. 

우리나라 조선공업 초기부터 설계와 연구개발에 매진해 조선해양 기술 자립화와 일류화에 기여해 우리나라가 세계 1위 조선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난해 초 국내 선박해양기술 자립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과학기술유공자로도 선정됐다. 과학기술유공자는 국민이 존경할 만한 뛰어난 업적이 있는 과학기술인을 국가유공자급으로 예우하기 위한 제도로 지금까지 32명이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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