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얻은 인류 역사, 인류를 행복하게 했는가 공백으로 남아"

◆ 천생연분, 탐험과 정복의 정신구조와 자본주의

근대이전의 유럽제국은 변방의 후진지역이었다. 제국의 중심지도도 경제중심지도 아니었다. 서유럽에서 확산된 세계종교도 없었다. 로마 제국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제국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까? 하라리는 근대 과학의 정신구조와 자본주의라는 두 개의 시스템이 유럽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그들은 천생연분이었다.

"중국 명 왕조의 정화 제독은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대함대를 이끌고 중국에서 인도양의 먼 곳까지 항해했다. 가장 큰 규모의 함대는 300척에 가까운 배에 3만명의 인원이 탑승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선단-세 척의 작은 배에 120명이 탑승-은 정화의 용 떼에 비하면 모기 세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정화 제독은 대양을 탐험하고 각국으로 하여금 중국에게 조공을 바치게 만들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자신이 방문한 나라를 정복하거나 식민지로 삼으려 하지는 않았다."(사피엔스, p.410)

그러나 유럽은 달랐다. 1525년에 제작된 살비아티의 세계지도. 아메리카 대륙의 연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어느덧 빈 공간과 만난다. 이 지도를 본 사람이 최소한의 호기심이 있다면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점 너머에는 뭐가 있지?" 지도는 답을 주지 않는다. 보는 사람에게 돛을 올리고 찾아보라고 요구할 뿐.(사피엔스, p.409)

유럽인들은 귀신에 홀린 듯이 지도에서 비어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그들의 가슴은 낯선 세계의 설렘으로 가득했다. 무지에 대한 인지, 탐험 의지 그리고 발견에 대한 성취가 서로 상승작용을 했다. 15-16세기 유럽 탐험대는 대양을 횡단하고, 아메리카를 답사하고 세계 전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 거대 프로젝트에 자본주의 시스템이 날개를 달아 주었다.

정복의 사고방식과 자본주의 융합으로서의 과학혁명.<이미지=사피엔스, 하원규 박사>
정복의 사고방식과 자본주의 융합으로서의 과학혁명.<이미지=사피엔스, 하원규 박사>
유럽제국에 있어서 대항해시대의 개막은 탐험가와 투자자들에게 미래에 대해 희망으로 부풀어 오르게 했다. 미래는 한층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기대가 증폭되고 신용(credit)이 발생하고 투자 활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이러한 경제활동을 가능하게 할 새로운 상상의 질서를 착상했다.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은행시스템이다. 화폐에 의한 신용 창조 전담기관이 생긴 것이다. 

수중에 2000만원밖에 없지만 콜럼버스가 항해 프로젝트에서 많은 사탕과 자원을 손에 넣고 돌아온다면, 5000만원 이상을 되돌려받는다. 이렇게 되면 은행은 A와 B가 합계 2천만 원을 인출해도 은행에는 3000만원이상의 돈이 남는다. 바로 이것이 화폐의 신용 창조를 기반으로 한 투자시스템, 즉 자본주의이다.

그런데 콜럼버스 한 사람에게 돈을 맡겨 하나의 항해 프로젝트에 다 투자해 버리면, 실패하였을 경우에는 큰 손해를 보게 된다. 여기서 콜럼버스는 많은 사람에게 조금씩 투자하도록 항해사업을 전담하는 주식회사를 만든다. 이렇게 되면 은행은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주식시장이 생겨나 은행 이외의 사람들로 부터 투자가 가능하게 했다. 이 결과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같이 대형주식회사가 출범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세상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 제국과 과학, 자본의 신결합 '제국자본주의'

 '저 수평선을 탐험하여 보자.' '지평선 너머의 새로운 지식이 있다.' 유럽제국의 과학자도 제국의 정복주의자도 모두 동일한 발상을 했다. 과학자들은 기지의 영역의 밖으로 나와 미지의 영역을 조사하고 싶어 했다. 새로운 자연법칙이나 지금까지 몰랐던 신지식을 얻기 위함이다. 그 지식은 자신들의 힘이 될 것이다, 고 생각했다.

'획득된 지식으로 지배한다'고 하는 과학자와 정복자의 공통발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교감이었다. 근대이전의 제국은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원정계획 등은 거의 시도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사이 그들이 품은 근대과학적 사고와 정복자 간의 탄탄한 공유허구(shared fiction)는 제국자본주의를 배태하고 있었다. 

에르난 고르테스는 1492년부터 멕시코를 시작으로 아즈텍 제국까지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코르테스는  언어, 부족, 도시 등 사회 문화적 지식을 통해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 제국을 몰락시켰다. 피지배민의 언어와 문화에 기반한 통치수법으로 잉카제국도 굴복시켰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서인도회사는 맨해튼 섬의 끝자락에 뉴암스테르담이란 정착지를 건설했다. 서인도회사가 식민지를 원주민과 영국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세웠던 성벽의 잔해 위에 깐 포장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 월스트리트가 되었다."(사피엔스, p.456)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사업가가 본인의 이윤을 생산증대를 위해 재투자할 때 개인의 이익을 늘리려는 인간의 이기심은 공동체 전체 부의 기반이 된다"고 설파했다. 성장 지향국가가 잇달아 굴기했다. 포르투갈, 스페인은 대항해 프로젝트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네덜란드는 국가를 주식시장화했다. 영국은 자본주와와 산업혁명이 멋진 짝이 되도록 지원했다.

'제국자본주의시스템'으로서의 과학혁명.<이미지=사피엔스, 하원규 박사>
'제국자본주의시스템'으로서의 과학혁명.<이미지=사피엔스, 하원규 박사>
세실 로즈는 드 비어스(DE BEERS) 다이아몬드 회사의 지배자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을 대담하게 주도했다. 그는 영국의 4000만 인구가 부유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서라면 당신은 제국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는 아프리카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철도와 전신 사업 등을 독점하는 한편 대영제국을 개조할 것을 주창하였다.
  
군사-산업-과학 복합체로서의 제국자본주의 시스템은 18세기 후에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1831년 영국 해군의 비글호는 식민지의 효율적 경영을 위한 군사 지리학적 지식 획득 목적의 선박이었다. 이 배에 동행한 찰스 다윈은 이 항해를 바탕으로 진화론을 정립했다. 제국들은 기술혁신의 꿈을 품고 과학기술을 장려한다. 과학기술발전으로 민간기술과 군사기술이 동반성정한다. 산업화된 국가가 생겨나 군사력과 경제력을 한층 증강한다. 그 힘을 세계정복에 나선다. 

하라리는 이것을 과학과 제국의 결혼(the Marriage of Science and Empire)으로 명명하고 있다.(사피엔스, p.390) 제국의 무력과 자본의 논리가 만나면서 세상은 약육강식의 초원으로 바뀌어 갔다. 전쟁도 주식회사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아편전쟁이 단적인 사례다. 과학과 제국의 견고한 공동운명체는 세계경영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거침없이 수행하여 갔다. 제국자본주의 체제는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힘의 총체로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두 얼굴

태양은 우리에게 따뜻한 빛을 선사한다. 지구의 생물은 모두 태양과 지구의 협업으로 조화롭게 살아간다. 300년 까지만 해도 인류는 식물의 성장주기와 태양 에너지의 변화 주기에 맞추어 살았다. 햇빛이 천지만물을 비추어 풍년이 들면, 농부들은 농작물을 거두어들였다. 1700년의 마차는 주로 목수와 대장장이의 땀과 근력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을 움직이는 힘은 식물에 포획되어서 밀과 쌀에 저장된 태양 에너지에서 유래했다.(사피엔스, p.474)

그러나 17세기 초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곧 제철법이 개발된다. 18세기 초 증기선이 발명되고 다시 철도가 발명된다. 기계와 기관(organ)을 이용해 에너지를 다른 종류로 변환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생활방식이 극적으로 바뀌는 문명이 개화된다. 하라리는 '모든 분야를 휩쓴 이 혁명을 산업혁명(the Industrial Revolution)이라 부른다'고 적고 있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사람들은 에너지나 원재료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하라리는 산업혁명은 에너지를 다른 에너지로 변환하는 에너지 전환기술의 발명으로 보고, 에너지 혁명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18세기 영국이 증기기관으로 방식산업 등 산업이 대약진 했다. 유럽국가들은 산업혁명 경쟁에 잇달아 뛰어들었다. 자본주의와 산업혁명 간의 활발한 선순환이 일어났다. 그것은 공급이 소비를 웃도는 상황을 낳았다.

여기서 소비주의라는 새로운 상상적 가치관이 부상했다. 소비가 선이고 검약이 악이라는 가치관이 사람들의 뇌속으로 파고들었다.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가치체계는 겉과 속이 한 몸인 표리일체(表裏一體)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영향.<이미지=사피엔스, 하원규 박사>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영향.<이미지=사피엔스, 하원규 박사>
 
자본주의 경제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생산을 증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 하지만, 구매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투자가는 도산한다.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이다.(사피엔스, P.493) 산업혁명은 정밀하고 획일적인 시간표를 등장하게 했다. 가족과 지역 공동체는 약화되고 시장과 국가기능이 강화되고 있다. 오늘날 시장과 국가는 소비 공동체와 국민 등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며 시스템을 재생산한다.

산업화된 대형 농축산업은 제2의 농업혁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산업화된 농업의 비극은 동물의 주관적 욕구는 완전히 무시된다는 점이다. 한 해 수억 마리의 병아리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삶을 마감한다. 수컷과 완벽하지 않은 암컷은 벨트에서 골라내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는 야생에서 형성된 욕구는 설사 생존과 번식에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지라도 계속 주관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사진 속의 실험에서 보듯 고아 원숭이는 철사 엄마의 젖보다 천 엄마를 더 좋아 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유럽제국은 은퇴했다. 오늘날의 인류는 핵에 의한 평화(Pax Atomica)를 유지하고 있다. 전쟁의 댓가는 엄청나지만, 그 보답으로 얻은 이익은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현시대의 부는 금광 등 토지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글 엔지니어의 기술 등 사람의 머리 속에 있는 경우가 많다. 중세 전쟁사를 전공한 하라리다운 전쟁개념이다.

◆ 인류의 문명성취와 행복의 실체

과학기술과 산업혁명은 문명이라는 수레의 두 바퀴이다. 그 수레에 행복이라는 실체를 담고 있을까?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인류는 물질적 풍요라는 힘을 얻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당당한 성취의 뒤안길에 웅크리고 있는 지구 전체 생물의 행복이라는 가늠대로 저울질할 필요가 있다. 가축화되어 본능을 박탈당한 채 짧은 생애를 보내고 있는 동물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문명과 역사는 비참함의 연속이다.

그 뿐인가? 허구의 질서를 연속적으로 생산하면서 인종과 성별에 따른 차별과 착취도 멈추지 않았다. 또한 다른 생물종이나 개별 사피엔스의 행복과 고통을 헤아리면, 인류의 역사는 결코 행복한 세상을 만들지는 못했다. 하라리의 아래와 같은 자문자답은 인간 행복의 심원을 헤집어 놓는다.

하라리의 자문자답.<이미지=하원규 박사>
하라리의 자문자답.<이미지=하원규 박사>
하라리는 행복의 일반적 정의로서 '주관적 안녕'(subjective well-being)이라는 견해에 동의한다. 행복은 자신 속에서 스스로 느끼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도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이루는 어떤 것도 매머드 사냥에 성공한 수렵채집인 무리가 경험한 흥분의 도가니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근접할 수 없을 것으로 본다. (사피엔스, p.533)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행복을 갈구하여 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고통 없는 '쾌락', 즉 아타락시아에서 찾았다. 18세기 제러미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행복의 지향점으로 보았다. 여기서 진화와 문명의 역사를 행복의 시점에서 추구하여 온 하라리의 행복론이 궁금하여진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신체 내부의 쾌락적 감각이다.--중략—새로운 연인을 찾아서 기뻐 날뛰는 사람도, 혈관 속을 요동치며 흐르는 다양한 호르몬과 뇌의 여러 부위에서 오가는 전기신호의 폭풍에 반응하는 것이다."(사피엔스, p.544) 역시 하라리다운 도발적 발상이다.   

이러한 개념의 전제로 그는 "우리의 정신세계와 감정세계는 수백만 년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생화학적 지배를 받는다"는 생물학적 근거를 들이댄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에 달렸다는 것을 인식하게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그 정체는 화학적 행복(chemical hapiness)이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계.<이미지= 하원규 박사&하윤주>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계.<이미지= 하원규 박사&하윤주>
올더스 헉슬리의 '위대한 신세계'에서 '소마'를 먹고 행복한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뭔가 불편한 느낌을 받는다. 하라리는 이 불편한 감정에 대해 되물어본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사피엔스, 551)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는 2045년의 암울한 현실세계를 배경으로 거대한 가상세계가 펼쳐진다. 가상세계 'OASIS'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환상적인 별천지이다. 이 가상세계의 제왕이 되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넣는다. 과연 그들에게 행복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필자의 자문자답이다. 

하라리의 행복론은 다음과 같이 정돈해 볼 수 있겠다. 역사적 사건과 인간의 행복의 영향은 지금까지 중요하게 다루지 못했다. 인간은 힘을 얻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 힘을 행복으로 바꾸는 데는 아주 서툴다. 오늘날의 사피엔스는 수렵채집민들보다 수천 배, 수만 배의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행복한가? 거의 모든 역사가 인류를 행복하게 하였는가. 이것은 우리 역사에 남은 가장 큰 공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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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규 박사는 
 

하원규 박사.
하원규 박사.

하원규 박사는 도쿄대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 석사, 사회정보학 박사를 마쳤다.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정보연구정책실장, IT정보센터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슈퍼 IT 코리아 2020' '꿈꾸는 유비쿼터스 세상' '제4차 산업혁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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