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륵·이태규·리승기·한위건·최사열·김필순 등
3월 1일 오후 2시 과학계 '100주년' 기념 희망선언

3월 1일 '3·1 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이다. 1919년 서울, 경기는 물론 전라남도에서 전북, 경상남도에서 경북,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충청남북도 전국 각 도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어린 학생부터 일반 시민, 지식인, 종교인, 과학자 등 각계각층에서 110만여명의 국민이 한달여 동안 만세 운동을 펼쳤다. 시위횟수만 1200회가 넘는다. 110만여명의 시민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실질적인 자주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모두에게 주체의식, 자주독립사상의 중요성을 각인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조선총독부 공식 기록에 의하면 사망자만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에 이른다. 피검자수는 4만6900명이 넘으며 고문과 투옥으로 희생된 사람도 다수다.

그들의 고귀한 역할로 10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은 일제 식민지가 아니라 세계 경제 대국 반열에 올라서며 과학기술 강국으로도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과학계에서는 어떤 이들이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을까. 당시 과학계는 공업전문학교와 의학전문학교 수준으로 의과학계로 나타난다. 참여자도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사회 현상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1899년생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던 이미륵은 3·1 운동에 가담했다. 20살 나이에 일본 경찰에 수배를 받으면서 상하이와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망명했다. 그는 뮌헨대학에서 동물학과 철학, 생물학을 전공하고 1928년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또 전공과 달리 뮌헨대학에서 한학과 한국어, 한국문학을 강의했다.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 독일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소설이외에도 수필과, 한국의 역사, 문화, 정치 등 글을 남기며 독일내에 한국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서울대 물리과대학 초대학장을 지낸 이태규는 1902년 생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와 히로시마 고등사범을 거쳐 교토제국 화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3·1 운동시기 경성고등보통학교 생으로 시위에 참여했음을 회고록을 통해 밝힌 바 있다. 그의 나이도 당시 10대 후반으로 짐작된다.

3·1 운동시기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한위건. 1896년 생으로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3·1 운동 이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 조선유학생 학우회 강연대 일원으로 고국에서 순회강연을 펼치기도 했다.

동아일보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1926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하며 사회주의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2005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된 바 있다.

북한에서 비날론 박사로 유명한 화학자 리승기는 1905년 전남 당양 출생이다. 중앙고보와 교토대를 졸업했다. 북한과학기술네트워크에 소개된 리승기는 1939년 일본 유학 중 화학섬유의 일종인 비날론을 개발하고 서울대 공과대학 학장을 역임 했지만 6.25 시기 월북, 북한 국가과학원 함흥분원장을 지냈다.

우리나라 방직공업계의 선구자인 최사열은 1899년생으로 일본 기류 고등공업학교 방직과를 나온뒤 20여년간 16개의 방직계통 회사 공장을 건설했다. 국내 방직 산업의 공장건설, 제품생산, 기술개발 분야에서 선구자 역할을 하며 김구로부터 '2000만 동포에게 옷을 입힌 공'이라는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추치의였던 김필순(1878년생)은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로 만주에서 활동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1회 졸업생으로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1919년 9월 일본인 조수가 준 우유를 먹고 순국했다.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례도 있다.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뒤 일본 규슈 제국대학 공학부 응용지질학과를 졸업한 김대우(1900년생). 경성공업전문학교 대표로 3·1 운동에 가담, 일 경찰에 체포돼 징력 7개월,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귀국해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며 훗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고 말았다. 이공후도 경성전수학교  재학중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으나 김대우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일본은 한국에 과학기술을 전수하지 않기 위해 1924년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에 이공학부 신설을 막았다. 과학과 고등기술 관련 이론적 교육을 배제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1938년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필요성에 의해 이공학부를 신설했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했다. 이공학부는 더 심하게 한국인의 입학을 막았다. 일본의 의도를 짐작 할 수 있는 부분이다.

3월 1일이 국경일로 지정된 것은 정부수립 후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같이 4대 국경일이 됐다. 3·1운동이 일어난지 30년만이다.

100주년을 맞는 2019년 3월 1일. 과학계 연구자들이 3·1운동 정신 계승과 과학기술을 통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과학기술 미래 100년 희망선언'을 펼친다. 3월 1일 오후 1시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열리는 행사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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