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인터뷰]염재호 고려대 총장 "대학이 바뀌면 사회가 바뀐다"
'상대평가·시험감독·출석' 없앤 3無 정책···대학의 혁신 신호탄
지적 훈련장 'SK 미래관·파이빌·X-garage' 혁신공간도 설립

염재호 총장이 "개척하는 지성으로 사회적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사진=고려대 제공>
염재호 총장이 "개척하는 지성으로 사회적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사진=고려대 제공>
"지식에는 '형식지'와 '암묵지'로 나뉩니다. 20세기 대량생산 체계에서 형식지가 필요한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암묵지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암묵지는 지식을 체화시켜 복잡한 구조로 만들고 통찰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지식근육으로 무장한 개척하는 지성들이 세상을 이끕니다."

2015년 제19대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된 이후 4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번 달 28일 퇴임을 앞두고 있다. 대학이 바뀌면 국가가 바뀐다는 믿음으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 염재호 총장. 고려대를 '지식의 놀이동산'으로 만들기까지 총장의 확고한 철학과 정책이 함께했다.

염재호 총장은 대량생산체계 20세기의 낡은 성공 방정식을 탈피하고 새로운 21세기에 맞는 교육 시스템의 변화를 이끌어 왔다. 그동안의 업적은 비단 교육계를 넘어 과학기술계까지도 귀감이 된다는 평가를 줄곧 받아왔다.

퇴임 인터뷰에서 그는 먼저 '대학 4.0'을 언급했다. 최근 세계대학 총장 포럼에서 회자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부총장의 발표 내용이다. '대학 1.0'은 옥스퍼드·캠브리지와 같은 학자를 키워내는 도제식 교육을 말한다. '대학 2.0'은 강의실에서 교과서로 수업하는 정통적인 20세기 방식이다.

'대학 3.0'은 시기는 20세기 후반이다. 고등교육 이후 누구나 대학교육의 수혜를 입어야 한다는 교육의 보편적 가치다. 유럽에서 모든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행위가 이에 속한다.

이제는 '대학 4.0'. 글로벌 네트워크다. 전 세계가 연대된 네트워크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형태다. 염 총장은 이러한 측면에서 대학이 21세기에 맞는 시스템으로 변화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대학 4.0 시대에 20세기 정형화된 교육 시스템을 벗어야 한다. 삼성·LG·SK 등의 대기업에서도 직원들에게 정답을 묻지 않는다"라며 "지식을 만들어 내는 프로젝트 형태로 일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사회는 지식인들에게 디자인싱킹을 요구한다.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 지식을 만들 수 있는 근육을 키워줘야 한다"라며 "학생들도 미래를 개척하는 탐험을 과감하게 시작해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 고려대에는 3가지가 없다? "3無 정책이 대학 혁신의 출발점"

염 총장이 지난 4년 동안의 대학 혁신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사진=박성민 기자>
염 총장이 지난 4년 동안의 대학 혁신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사진=박성민 기자>
고려대 수업에는 출석을 부르지 않는다. 시험에는 상대평가도 없다. 심지어 시험감독도 없다. 염 총장이 임기 동안 만들어낸 3무(無) 정책이다.

대신 모든 과목은 프로젝트 단위다. 학생들이 스스로 토론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때문에 출석도 의미가 없다.

지식을 얼마나 외웠는가를 평가받지 않는다. '아이디어' 자체를 평가받는다. 시험감독도 필요하지 않은 이유다.

학생들에게 창업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창직(創職)을 주문한다. 예로 네덜란드 한 대학에서 학생들이 호텔 예약 서비스인 호텔스닷컴을 만들었다.

이는 제품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로 비즈니스를 만든 것.

그는 "창직과 같이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기존에 없는 직종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활동이 필요하다"라며 "대학에서는 개척하는 지성들이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아이디어팩토리가 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염 총장은 3무 정책뿐만 아니라 '지식의 놀이동산'을 위한 혁신공간도 설립했다. 특히 22일 준공식을 마친 2만8099m²(8500평) 규모의 'SK 미래관'에는 강의실이 없다. 대신 111개의 세미나실이 있다. 이뿐만 아니라 빅아고라(Big Agora), 리빙랩(Living Lab) 등의 공간이 조성돼 학생들 스스로 탐구하고 토론할 수 있다.

지난 2016년 설립된 개척마을 'π-Ville'(이하 파이빌)도 지식창조 공간 가운데 하나다. 파이빌은 개척자를 의미하는 Pioneer의 앞 두 글자를, 무한한 확장을 나타내는 원주율 π로 표기했다.

파이빌은 총 38개의 컨테이너로 이뤄진 지상 5층 규모의 건물이다. 15개의 스튜디오, 강당, 오픈플랜 스튜디오, 아이디어 카페, 3D프린터 오픈랩 등으로 구성됐다. 파이빌은 고려대 학생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다.

고려대 개척마을인 파이빌의 모습.<사진=고려대 제공>
고려대 개척마을인 파이빌의 모습.<사진=고려대 제공>
그는 "지식은 강의실에서 전수되는 것만이 아니라, 캠퍼스 전체에서 만들어지고 교류되면서 축적돼야 한다"라며 "새로운 형태의 지식 창조에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다. 파이빌은 창의와 개척정신이 무한히 뻗어 나가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염 총장은 개척하는 지성들에게 당부의 말도 전했다. 그는 "지식인은 본인에게 주어진 숙제만 푸는 사람들이 아니다.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해결하는 사람"이라며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품어야 한다. 메아리가 되지 말고 목소리가 돼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 "연구 과제 종료 기한도 없어"···미래지향 창의 연구사업 성과

염 총장이 고려대의 연구 풍토 개선 사례를 설명하고 있다.<사진=고려대 제공>
염 총장이 고려대의 연구 풍토 개선 사례를 설명하고 있다.<사진=고려대 제공>
염 총장은 개척하는 지성들의 배출뿐만 아니라 고려대 본연의 연구 풍토 개선에도 발벗고 나섰다.

조급한 연구에서는 노벨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단기적 연구업적에서 벗어난 미래지향 창의 연구사업을 지난 2016년부터 펼쳤다.

이름은 '고려대 미래창의연구사업'. 고려대 교비 연구기금이다. 고려대에서 연구 실적 중심이 아닌 미래지향적 창의 연구에 연구기금을 투입한 것은 고려대 역사상 처음이다.

연구기금을 받은 연구팀들은 정해진 기간 내에 논문을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 서류도 제안서 2장, 결과물 2장 이내면 된다. 염 총장은 연구비 사용에 최대한 유연성을 부여했다.

염 총장은 "4년 만에 고려대 전체 대형연구 50억원 수주에서 500억원으로 늘었다. 전체 연구비도 2600억원에서 3400억원으로 늘었다"라며 "연구자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편안히 하게 해 줄 때 연구 성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논문 많이 쓴 사람이 연구비를 가져가는 방식은 과거 방식"이라며 "연구 풍토는 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에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정부와 교육계, 과학기술계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또 염 총장은 과학기술계의 '정치화' 우려도 표했다. 그는 "과학기술은 정치와 독립해야 한다. 정부·정권이 바뀌면 기관장도 바뀌는 작금의 상황이 안타깝다"라며 "정부가 과학기술계를 우습게 보지 않도록 객관적인 목소리를 내주길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묵묵히 연구하는 과학기술인들에게 존경심을 갖는다. 과학자야 말로 개척하는 지성"이라며 "개척하는 지성들이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를 위한 발걸음을 해나가길 기대한다"고 사회 한 구성원으로서 과학기술인들에게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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