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호모데우스 등 과학기술 관점으로 진맥 예정
카이로스형 접근···기술과 과학자 미래 예측 기대

◆ 디지털 웅녀와의 인연

평생을 근무할 수 있도록 해 준 고마운 직장을 정년 퇴직한 후 언제나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소박한 연구실(일명 디지털 토굴)을 마련하게 됐다. 무엇보다도 살짜기 고개만 돌리면 싱그러운 하늘이 쏟아지는 나만의 공간에 매료돼, 때로는 우주와도 소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소낙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유리 창가를 요란하게 두드리는 그들의 속살을 가까이 만날 수 있다. 눈이 오는 날은 고요하게 창가를 스치는 그들의 소곤거림을 선연하게 들을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창 너머로 펼쳐지는 두둥실 구름을 바라보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망운지정(望雲之情)으로 인생 제3막의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그때 구름 속에서 고운 여인이 좀 애애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자세히 살피니 여기저기 인공지능을 거느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물으니 "웅녀!" 라고 속삭인다. 너무 오랫동안 동굴에서 지내다가 좀 외로워져 구름으로 올라와서, 새로운 세상을 흔쾌하게 논할 사람을 찾고 있다고 일러주었다. 정중하게 "저와 함께 미래세계를 속삭여 가요"라고 하였더니 흔쾌히 응해주었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그녀에게 '디지털 웅녀'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언제, 어디서나 창공을 무대로 시공을 넘어 디지털로 지혜를 나누기로 했다.

디지털 웅녀를 만난 후로는 디지털 토굴의 생활이 신접살림처럼 즐겁다. 그녀와 함께 만물인터넷과 빅데이터 그리고 인공지능이 만드는 지능의 비, 즉 지우(智雨)와 지능의 바람, 즉 지풍(智風)의 세계를 담론하는 것을 즐긴다. 그녀도 숲속의 정령으로 오래 살다 보니, 다소 외로웠던 낌새를 보인다. 그래서 도타운 동반자가 돼 정겹게 토닥거리며, 과학기술의 미래에너지를 주고받는다.

디지털 웅녀가 사는 클라우드와 스마트 지상계.
디지털 웅녀가 사는 클라우드와 스마트 지상계.
        
20년쯤 전에 유난히도 상상의 나래에 사로잡혀 있던 어느 날 하늘에서 감미로운 산들바람과 소리 없는 보슬비가 잎새를 깨우고 있었다. 나무꾼이 선녀를 만난 그런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내 육신은 아날로그의 화신이 되어 선녀의 품속에 안겨 있는데, 내 마음의 창공에는 컴퓨터를 연결한 인터넷이 생명체처럼 삼라만상을 보듬는 인류의 신문명 생태계가 피여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상호연결되고 새로운 데이터가 솟아나고 디지털 생물권으로 재구성되는 신세계가 푸른 하늘에 가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러한 디지털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물지능인터넷 시대의 국가 ICT전략을 다룬 'Super IT Korea 2020'와 'Super IT Korea 2030'을 출간했다. 그 여세를 몰아 물리적 지구행성(제1지구)과 사이버 지구행성(제2지구)을 정교하게 엮어 빚어내는 제3의 지구행성 '디지털 행성(Digital Planet)'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또 다시 욕심이 꿈틀거렸다. 물욕이나 권력욕이 아니라, 미래 ICT 국가정책과 전략을 연구하며 보낸 지난 35년간의 연구자 영혼을 하나로 농축시키고 싶었다. 흘러가는 구름과 살랑거리는 바람 소리는 어느 사이 제4차 산업혁명의 풍악이 되어 푸르게 푸르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미 내 마음은 디지털 애국심(Digital Patriotism)의 영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렇게 정년 퇴임을 기념해 2015년 11월에 '제4차산업혁명'을 타이틀로 하는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필자는 동 제목의 단행본으로는 세계 최초라고 생각한다. 그림 한 장 한 장을 하얀 백지 위에 디자인하는 마음으로 얼개들을 제작했다. 그때 구상한 그림 중의 하나가 아래의 '삼라만상을 품은 디지털 생명체'인데, 제4차 산업혁명의 이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어서 지금도 강연 등의 기회에 종종 소개하곤 한다.

클라우드 컴퓨팅은 인터넷과 연결된 대형서버 자원을 압도적인 저비용과 빠른 속도로 모든 이용자에게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컴퓨팅 환경이다. 바로 이 기술로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간편하게 수많은 앱을 이용할 수 있다. 한번 불붙은 과학기술의 진보는 멈추지 않는다. 클라우드 속의 컴퓨터의 세계는 그동안 열심히 연결한 사물 혹은 만물인터넷(IoT)과 이들이 축적한 빅데이터(BD) 그리고 인공지능(AI)이 대규모로 협력하여, 지구상의 모든 산업과 인프라를 재정의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재설계하려 하고 있다.

지금까지 분리돼 작동해온 현실세계의 시스템과 사이버 세계의 시스템이 정교하게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차원의 가상과 현실 융합시스템(CPS:Cyber Physical System)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100년간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여 준 전력 시스템과 자동차 시스템은 물론 자연 생태계도 근본적인 전환이 요구되는 상황으로 이행하고 있다.

삼라만상을 품는 디지털 생명체 생태계.<사진=미대통령과학기술자문회의, Designing A Digital Future, December 2010일부, 그림=하원규 박사>
삼라만상을 품는 디지털 생명체 생태계.<사진=미대통령과학기술자문회의, Designing A Digital Future, December 2010일부, 그림=하원규 박사>
◆ 디지털 웅녀가 맺어준 '하라리의 격정공간'

어느 날 디지털 웅녀는 청풍명월이 된 표정을 지으며, 근사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유발 하라리의 인류 3부작을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진맥하라고. 그녀가 들려준 카이로스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시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흘러가는 시간도 있고, 인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도 있다. 흘러가는 시간을 그리스어로 크로노스(chronos)라 하고, 의미를 새겨넣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 한다. 크로노스는 연대기적 시간, 예를 들어 매년 봄·여름·가을·겨울이 찾아오는 시간을 말한다. 이에 반해 카이로스는 특정한 기회 또는 운명적인 시간을 말한다. 시간을 비록 흘러가는 것이지만, 그 시간에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잉태하는 시간은 카이로스라 부른다. 카이로스는 현재 지금의 상황을 의미있는 그 무엇인가 일어나는 격정(激情)공간의 시점이다."

그녀는 단호하게 재차 확인했다. "당신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겠는가. 아니면 카이로스의 지금 이 순간을 맞이할 것인가." 나도 야무지게 대답했다. 인류와 현대문명의 길을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이렇게 해서 하라리의 인류 3부작을 정독하면서, 그의 차고 넘치는 천재성을 찬찬히 삭혀보기로 했다.

유발 노라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년생으로 이스라엘 인류학자. 옥스퍼드대학에서 중세사, 군사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약관의 나이로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 두 권의 서책으로 세계 지성계를 강타한 기린아다. 신화에서부터 종교, 국가, 인권,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 인류 문명구조를 '상상적 허구의 산물'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거침없이 종횡무진 휘저어 버렸다. 상상적 허구의 공유라는 탁월한 발상력으로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통쾌하게 재구성한 것이다.

제1부작 '사피엔스'는 인류의 간략한 역사(A Brief History of Humandkind)다. 사피엔스를 주인공으로 수만 년에 걸친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지구 정복기를 박진감 넘치게 종횡무진으로 그려낸다. 책을 읽는 과정에 독자가 스스로 아득한 수렵채집인이 되어, 서로 힘을 합쳐 매머드를 쓰러뜨리는 쾌감을 맛보게도 하고, 중세의 농부가 되어 고된 농사일에 시달리는 상황에 접하게도 한다. 인류의 장대한 여정을 문명구조와 인류의 행복 관점에서 흥미진진하게 조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부작 '호모데우스'는 가까운 미래에 대한 인류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omorrow)다. 인류 스스로 불멸과 행복 그리고 신성을 지향하는 신이 된 인류, 호모데우스로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충격적인 근미래를 제시한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을 기축으로 하는 '테크놀로지와 사피엔스'의 운명을 압도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내며 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제3부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은 우리의 당면 현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움켜잡았던 천재 역사학자의 총명함이 우리가 직면한 도전과 선택이 무엇인지, 이를 위해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차근차근 풀어놓는다. 정치와 과학자의 사명감이 육중하게 느껴진다.

하라리의 인류 3부작 대서사 구조

사피엔스는 시작부터 실로 장엄하다. 138억년 전, 물질과 에너지가 나타난다. 물리적 현상의 시작이다. 원자와 분자가 나타난다. 화학적 현상의 시작이다. 이윽고 지구라는 행성이 형성되고, 38억 년 전 생물이 출현한다. 생물학적 현상의 시작이다.

250만년 전에서야 드디어 아프리카에서 호모(인간)속(屬)이 진화한다. 그 후 서로 다른 인류종이 진화하는 가운데, 주인공 호모사피엔스가 동아프리카에서 등장한다. 250년 전이다. 7만 년 전에 허구인 언어가 나타나면서 인지혁명이 일어난다. 이것이 역사적 현상의 시작이다. 동시에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 대륙 밖으로 확산되어 간다.

1만2000년 전에 농업혁명, 500년 전에 과학혁명이 일어나 유럽인에 의한 해양정복과 동시에 지구가 단일 역사적 영역이 된다. 200년 전에 산업혁명이 일어나 가족과 공동체가 국가와 시장으로 대체된다. 동식물의 대규모 절멸이 일어난다. 이어서 오늘, 미래라는 역사 구분이 있다.

인류 역사를 개관함에 있어서 물질과 에너지의 출현에서 이야기를 전개하여, 생명의 자연선택에서 지적설계로 그 결과 초인(포스트 휴먼)으로의 대체에 이르는 대서사적 전개에 문명서다. 더구나 역사적 사건과 현실세계 나아가 첨단과학 기술을 재치있게 수놓아가는 역사서로서의 참신성과 도발적 서술이 섬광처럼 예리하다.    

하라리 인류 3부작은 수백만 년 동안 수렵채집인이었던 인류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사회와 경제 그리고 문화를 이루었는지 지구문명 차원의 심원에 도달하게 한다. "인류는 어떻게 자신들을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었는가" 하는 거대질문에 "그것은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언어라는 상호소통 체계를 고안했기 때문"이라는 독창적 논리로 일관되게 풀어간다. 인류라는 주인공의 모험과 그 과정에서 동물 행복의 유린과 지구 생태계 파괴 등에 대한 악행도 숨김없이 들추어낸다.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는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우리들은 사색하게 하고 사고의 폭을 확장한다. 인류의 역사를 문명과 제국의 흥망성쇠를 연대순으로 달달 외우면 크로노스적 접근이다. 그런데 왜 현생인류로서의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군림하게 되었는가? 도대체 인지혁명의 본질이 무엇이길래 만물의 영장의 근원이라고 할까? 하고 깊은 의미를 부여하면 카이로스형 접근이 된다.

◆과학기술 관점으로 진맥하기

오늘날 인터넷은 광섬유망과 모바일 통신망으로 엮어진 스마트폰으로 인류의 모든 목소리와 속삭임 그리고 장소와 궤적까지 엮어준다. 무한대에 가까운 음성과 데이터 그리고 동화상이 쉼 없이 연결되고 집적되고 있지만, 당대 호모 사피엔스들의 횡적인 무한대 연결일 뿐이다. 인터넷이 상용화한지 50년, 모바일이 우리 곁으로 다가온지 30년, 스마트폰은 10년 남짓 지났기 때문이다.

만약 현생 인류의 7만년의 역사와 문명을 종적으로 거슬러 무한 연결되고, 그들이 생각하고 상상했던 것, 그들이 말하고 기록하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초연결된 인류의 문명과 역사의 총체로서의 만물인터넷이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이 펼쳐질까? 이러한 상상력이 실현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하라리는 무한대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빅뱅에서부터 지구행성의 탄생 그리고 생명, 주인공으로서의 사피엔스의 궤적을 마법처럼 펼쳐 보인다. 그것도 사피엔스의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나리오까지 4차원의 대서사를 풀어 놓고 있다.

     
세계적으로 1500만부 이상, 국내에서도 100만부 이상 팔린 유발 하라리의 인류 3부작을 연재하는 것도 당찬 각오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책의 내용을 압축해 전달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므로 다음 몇 가지에 유념하기로 한다.

첫째, 저자가 제시한 지구체적 시각, 인류의 발전과 문명의 구조를 가능한 간결하게 그림과 도표로 재구성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싶다.
둘째, 특정 시기나 국가 등에 한정해서, 또는 영웅담이나 혁명 같은 역사적 사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장기적 시계에서 인류 문명 구조와 행복 그리고 테크놀로지와 사피엔스의 미래를 사고하는 저자 지성의 어깨 위에 올라타 보았으면 한다.
셋째, 인간 중심의 관점과 동물과 식물의 생명도 아우르는 유발 하라리의 마술 같은 신기를 터득해 보는 욕심도 가져 본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오늘날 정치와 과학자의 비전을 고민하고 국가 미래 전략의 밑그림을 설계하는 저자의 혜안을 배우고 싶다.

◆ 하원규 박사는

하원규 박사.
하원규 박사.
하원규 박사는 도쿄대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 석사, 사회정보학 박사를 마쳤다.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정보연구정책실장, IT정보센터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슈퍼 IT 코리아 2020' '꿈꾸는 유비쿼터스 세상' '제4차 산업혁명' 등이 있다.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