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명 결사대 태평양 건너다···'必기술자립' 목숨걸어

[에너지 독립국 뒷이야기]美서 피나는 노력끝에 원자력발전 핵심 기술 확보
감사 압력에도 투명, 연구 매진하며 '원자력 한국'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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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애경·강민구 기자 - 2018.12.13

12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에너지 독립 기틀을 마련한 날입니다. 무슨말이냐고요? 1986년 이날 44명의 한국 과학자가 원전 기술 확보를 위해 '必 기술자립'을 외치며 미국으로 출발합니다.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태평양에 빠져죽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말이죠. 덕분에 우리는 산업 현장 곳곳에서 24시간 기계를 돌리고 실험실에 불을 환하게 밝힐 수 있게 됐습니다. 에너지 독립국, 경제 대국 반열에 올랐고요. 아랍권에 기술을 수출하면서 세계 최고의 원전기술국으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3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과거를 기억하고 인정할 때 미래 설계도 가능하다는 생각에 대덕넷은 당시 기술개발에 참여했던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같이 들어보시죠.<편집자 편지>

1986년 12월 14일 한국원자력연구원(당시는 원자력연구소).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 44명의 과학자와 연구소 관계자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必 설계기술 자립' 액자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념사진을 찍기 전 故한필순 소장이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에너지 식민국이 된다"며 만세삼창을 제안했다. 과학자들은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태평양에 빠지겠다는 각오로 '기술독립'을 외쳤다. 

이후 44명의 젊은 연구자들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절반은 해외여행이 처음이었고 미국은 거의 초행이었다. 이들의 목적지는 동부 코네티컷주에 위치한 소도시 윈저(Windsor). 한국형 경수로 계통설계를 위한 공동설계 방식에 참여한 업체 중 낙찰된 미국의 컨버스천엔지니어링(CE)사가 위치한 곳이다. 

젊은 연구자들의 목표는 CE와 공동설계로 원자로설계기술의 국산화. 연인원 211명, 3년간 총 600여명의 연구자와 연구비 계약금 총액 3조 4000억원이 투입되는 원전기술 자립을 위한 '단군이래 최대 프로젝트'의 시작점이다. 

이후 3년간 한국의 연구자들은 '설계기술자립' 일념으로 CE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사투를 펼쳤다. 미국에서 이미 실행되고 있던 주5일제도 반납하고 토요일에도 출근하는 것은 기본, 그들의 암묵지를 확보하기 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위해 주말도 일의 연속이었다.

시큰둥했던 CE측은 한국 연구자들의 활동에 신뢰를 보내며 핵심기술 전수와 주요 업무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최고의 인적자원(전공 실력, 영어, 국가관 중심으로 선발)이었던 이들의 밤낮없는 노력으로 한국형 원전기술이 완성됐다. 44명은 낙오자 없이 귀국, 역량을 인정받으며 한국과 해외에서 원전기술 핵심멤버로 활약했다.

오는 14일이면 원자력계통 설계사업단의 '윈저' 출정 32주년을 맞는다. 파견된 연구자 상당수는 이미 퇴직했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다. 당시 파견된 연구진 중 김병구 박사, 이익환 박사, 장우현 박사가 대덕넷에 모여 과거 원자력기술자립 여정을 기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必 설계기술 자립' 액자 주변에서 출정식을 기념해 촬영한 사진.<사진=이익환 박사 제공>'必 설계기술 자립' 액자 주변에서 출정식을 기념해 촬영한 사진.<사진=이익환 박사 제공>

◆원자로 '두뇌'를 우리 손으로···'必설계기술자립' 목표로 연구 매진

원자로계통(NSSS)은 원자력발전기술의 핵심이다. 신체 부위 중 '두뇌'에 해당하며, 이를 통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기술이다. 당시 한국의 설계수준은 20~30% 수준. 미국의 원전을 턴키 방식으로 구입해 운영했던 한국의 상황에서는 도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인력도 턱없이 부족했다. 계통 설계 인력은 100여명이 필요한데 국내에는 2~3명뿐이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상황은 한국에 유리했다.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섬에서 일어난 원전사고로 원자력 시장은 침체기였다. 미국, 프랑스 등 원전 선진국들은 판로가 없던 상태로 한국의 '공동설계' 제안에 울며 겨자먹기로 참여했다. 공동설계는 자칫 원전 핵심기술을 몽땅 넘겨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원전 기술자립 사업 책임을 맡았던 김병구 박사는 "원자로 설계기술은 아무도 시도 못하고, 구매할 엄두도 못낼 정도로 어려웠다"고 밝혔다. 

한국은 원자로 표준화·국산화 계획을 수립했다. 1985년 영광 3,4호기 건설기본계획이 확정된 이후 원자력위원회에서 원자로계통 설계기술 전담은 원자력연이 전담케 했다. 이익환 박사는 "당시 한전기술 등 4개 회사에서 각축전을 벌였지만 '인재양성'이 부각되면서 원자력연이 이를 수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원자력연은 인력을 보유했으나 설계를 해본 경험이 없어 배우면서 설계를 해야했다. 한필순 소장은 설계단을 조직하고, 공동설계란 개념을 도입했다. 기술을 가진 외국 회사가 멘토가 되고, 국내 기술진이 멘티가 되어 배운다는 것이다.

해외훈련을 수행할 기업 응찰서를 접수한 결과 미국, 캐나다, 프랑스의 굴지 원자력 회사 4개사가 도전장을 냈다. 설계단서 응찰서 평가가 반년간 이뤄졌다. 김병구 박사는 "독신자숙소에서 거주하면서 보안을 철저히 지키며 기술평가를 진행했다"면서 "분야별 30명이 3개월 동안 숙식하며 크로스 심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설계단은 한국 원전을 독점하고 있던 웨스팅하우스가 아닌 CE사를 선택했다. 숙고한 끝에 기술이전의 최적 대상이라고 봤던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이슈로 이뤄질 가능성은 낮았다. 웨스팅하우스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지성이면 감천, 설계단의 의지대로 CE와의 해외훈련계약이 성사됐다.

1차 파견대로 파견된 연구진들은 '必설계기술자립'을 목표로 출정식을 가졌다. 대부분의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이었다. 만세삼창을 부른 이들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고 외치며 굳은 결심으로 현지로 떠났다.

장우현 박사는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대부분이었고, 절반 이상이 총각이었다"면서 "사명감을 가졌지만 쉽지않은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작은 도시 윈저, 한국인 동네로

윈저에 도착한 이들은 CE 설계본부에서 맨투맨으로 원자로 설계기술을 배웠다. 파견대가 속속 합류하면서 윈저는 한국 동네가 됐다. 야외행사를 하면서 공동체 의식을 가졌다.

연구진의 노력이 계속되자 CE 연구자도 감복했다. 김병구 박사는 "CE에서도 한국인의 열정을 인정해줬다"면서 "여기에 체르노빌 사고 이후로 어려움을 겪는 원자력 사업을 전수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학습에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모든 과정이 순탄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기술을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한 연구진들의 치열한 사투 과정에서 다양한 어려움에 부딪혔다. 이익환 박사는 "1단계에서 설계 공정 참여가 1000개도 되지 않아서 협상 작업을 지속했다. 협상이라고 하지만 거의 전투였다"면서 "그 결과 2단계에서 2만개의 설계 공정 참여를 이뤄내면서 기술 자립을 성공적으로 해나갈 수 있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공동설계를 진행했지만 실무는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설계가 제대로 됐는지 알수 없다는 것. 이익환 박사는 "1번 설계해서는 우리가 제대로 했는지 여부를 파악할 수 없어 별도의 설계검증팀을 만들었다"면서 "설계를 중복해서 하는 것이라 실제 CE서는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검증 절차를 거쳤다"고 강조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관리 감독을 맡은 슈퍼바이저 등 치열한 눈치싸움도 이뤄졌다. 기술전수계약에 따라 트럭 2대에 해당하는 문서를 받았지만 연구자의 경험이 녹아있는 계산 데이터, 디자인 데이터 등 암묵지 확보도 중요했다. 이를 확보하려는 과정에서 기록이 남아 어려움을 겪었던 일화도 있다. 

장우현 박사는 "감독관(supervisor)이 기술자립보다 회사 이익을 위해 각종 압력을 가했다"면서 "주말에 출근해도 로깅 기록이 남아 팀원이 핵설계 부분을 복사한 것이 들통나기도 했다"면서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다행이 감독관이 복사지를 폐기하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우리의 열정이 과하긴 했다(웃음)"고 일화를 소개했다.

연구 외적으로도 수난을 겪었다. 설계단장을 맡은 김병구 박사를 비롯한 연구진은 당시 시장을 점유하던 웨스팅하우스가 아닌 CE가 선정됐다는 점을 이유로 정경유착 혐의를 받았다. 88올림픽 직후 5공비리 청문회의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2년에 걸쳐 자금 추적 등 감사가 이뤄졌지만 위반 내용이 없어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김병구 박사는 "국감 이후 검찰 고발로 2년간 조사를 받은 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면서 "자금을 뒤져서 조사했으나 해당 사항이 없으니 기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장우현 박사는 "5공비리특별위원회에서 전두환 대통령 시절 최대 비리가 이 사업에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야당 국회의원이 윈저까지 찾아와서 감사를 진행해도 나오는게 없고, 현장서 고생하는 연구자들을 보자 오히려 격려했다"고 회상했다.

김병구 박사(왼쪽), 이익환 박사(가운데), 장우현 박사(오른쪽)가 '원자로 계통 및 핵연료 설계 기술 자립비'를 찾았다.<사진=강민구 기자> 김병구 박사(왼쪽), 이익환 박사(가운데), 장우현 박사(오른쪽)가 '원자로 계통 및 핵연료 설계 기술 자립비'를 찾았다.<사진=강민구 기자>

◆30년만에 기술독립국서 기술수출국으로···"모방에서 혁신으로"

사업단이 기술자립화 목표로 제시한 것은 95%. 컨설팅·검증 등을 감안하면 100% 수준이다. 이익환 박사는 "발전소 검증, 자문 등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100% 자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서 "95%는 영광 3·4호기를 복제할 역량이 있는 수준으로 기술자립의 최대치를 목표로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귀국 후 연구진은 배운 기술을 원자로 건설에 활용했다. 영광 3·4호기, 월성, 신월성 등 총 12기의 한국형원전을 설계부터 건설까지 독자적으로 이뤄냈다. 국산화로 해외 자본 유출을 방지하고, 수출까지 이뤄냈다. 2009년 UAE 원전 수출을 시작으로 총 4기를 수출하며 200억 달러 계약, 운영계약 200억 달러의 성과를 냈다. 원전 강국으로의 위상을 포함하면 부가적 효과는 더 높다. 

이익환 박사는 "우리에게 국가관이 있었다. 20% 베이스를 갖고 100% 기술자립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설계를 독자적으로 해내고 순한국형원전인 APR 1400을 만들고, 안전성과 설계수명을 높이는 작업을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원자로의 성공적인 건설이 이뤄지면서 경험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원자로 설계도 이뤄졌다. 한국형가압경수로(APR 1400)와 스마트원자로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최근 한국은 APR 1400으로 미국 규제기관인 NRC의 설계 승인을 받았다. 프랑스, 일본에서도 신청했지만 못했던 것을 이뤄내면서 다시 한번 원자로 설계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또 UAE에 원전을 수출하면서 30년만에 기술 수출국으로 바뀌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윈저 사례와 유사하게 자국의 대규모 연구진을 파견해 기술을 배우고 공동설계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사우디 연구진은 가족과 함께 3년간 대덕연구단지 일원에 거주하며 원자력연에서 학습에 참여했다. 32년전 한국의 연구진이 윈저에서 했듯이 말이다.  

김병구 박사는 "반도체, TV, 자동차 등과 함께 원전기술도 단기간에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했으며, 그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면서 "2009년 바라카 원전을 보며 큰 일을 했다는 자긍심을 가졌고, 사우디에서 기술을 배우기 위해 대규모 기술진을 파견한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소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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