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박기호 사진작가, KAIST서 작품전 열어
재건축 현장 거주하며 촬영한 작품 엄선···"전시회 보며 남겨진 공간 고민 기대"

과학자의 교류·문화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대덕과학문화센터, 초기 유치과학자의 보금자리였던 공동관리아파트, 대덕연구단지 구성원들의 복지시설로 이용돼 온 종합복지관과 공동주택이었던 타운하우스와 주공아파트 등.

조성된 지 약 45년이 지난 대덕연구단지의 주요 공간들이다. 녹지와 연구시설이 함께 갖춰졌던 대덕에도 반세기 가량 시간이 지나면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이뤄졌다. 이 공간들은 이미 사라졌거나 재건축·재설계를 앞뒀다.   

가속화되는 도시화 속에서 기존 공간들을 아파트나 고층빌딩으로 개발하려는 움직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남겨진 공간을 돌아보며 역사와 흔적의 중요성을 돌아볼 수 있는 전시회가 대덕에서 열리고 있어 관심을 끈다. 

최근 KAIST비전관은 박기호 사진 특별기획전 '남겨진 것들...Left Behind...'을 마련했다. 박기호 사진작가는 국내 최고 수준의 사진작가로 지난 20여년 동안 외신사진기자로 활동했다. 故 노무현 대통령,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장동건 등 해외 유수 미디어에 소개되는 표지 인물 사진 대부분이 그의 손길을 거쳤다. 

이번 전시회 출품 작품은 박 작가가 지난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 동안 철거를 앞둔 재개발 지역을 다니며 촬영한 연작이다. 이제는 소멸한 서울 돈의문, 미아동, 북아현동, 길음동 등 대도시 속 재개발 지역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KAIST비전관에서 기획전시전을 연 박기호 사진가.<사진=강민구 기자>
KAIST비전관에서 기획전시전을 연 박기호 사진가.<사진=강민구 기자>
◆연출 사진 없어···현장에서 거주하며 생활 속 작품 촬영

"30년 동안 주로 인물사진이나 상업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지난 2007년 첫 개인전을 열면서 부족한 부분을 많이 느껴 좀 더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박기호 작가는 지난 2000년대 초중반 잘 나가던 외신기자를 그만두고 홀연히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작가로서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공간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미국발 금융위기 때부터다. 사진학을 공부하면서 우연히 지나가면서 본 빈 점포를 보며 영감을 얻었다. 이후 미국 전역을 돌면서 관련 사진을 촬영했다. 닫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는 점에서 기존에 그가 해왔던 연출 사진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표현과 공간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귀국 후에는 재개발을 앞둔 집과 동네에 주목했다. 철거 예정지에서 몇 달씩 상주하며 영감을 얻었다. 매일 산책하면서 본 집의 유리창, 내부 모습 등. 4년 동안 서울의 주요 재개발 지역에 거주하며 촬영한 사진만 7만여점에 이른다.

재건축 현장을 누비며 생활속 작품을 촬영하는 모습,<사진=박기호 사진작가 제공>
재건축 현장을 누비며 생활속 작품을 촬영하는 모습,<사진=박기호 사진작가 제공>
이번 전시회는 당시 모은 7만여점의 작품에서 30여점을 선정한 것이다. 전시 제목인 '남겨진 것들'도 재개발로 인해 사람들이 떠난 후 남겨진 빈집 등 삶의 흔적들을 의미하거나, 이제는 사람도 집도 마을도 사라지고 사진과 추억으로만 남겨진 것들을 뜻한다.

박 작가는 재개발 지역의 사진을 단순히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서사적 기록이 아닌, 그만의 시각에서 옛 추억의 그리움과 정겨움의 정서, 감정을 서정적으로 담았다.

관람객들은 어린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은 좁은 골목길, 서툰 솜씨로 이어 붙인 화려한 벽지와 그 위에 그려진 어린아이의 그림, 놀이터이자 보물창고였던 다락방, 자물쇠를 대신한 숟가락, 이제는 철거되어 추억조차 상기할 수 없는 잔해 속에서 새롭게 피어난 나팔꽃 작품을 보며 각자의 관점과 경험을 토대로 남겨진 무언가를 고민할 수 있다.

박 작가는 "서울 정릉에서 거주했던 어린 시절 경험으로 옛 풍경과 자취를 보며 추억과 향수를  느낀 것도 재개발 지역에 주목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면서 "잔해 속에서 피어난 나팔꽃을 보면서 자연의 위대함을 알았고, 이러한 정서나 추억들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설명했다. 

전시회 개막전 박기호 작가가 전시품, 조명 등을 점검하고 있다.<사진=강민구 기자>
전시회 개막전 박기호 작가가 전시품, 조명 등을 점검하고 있다.<사진=강민구 기자>
촬영한 사진은 모두 인화지가 아닌 한지에 담았다. 한지의 은은한 색감과 질감이 어우러져 먼지가 쌓인 빛바랜 빈집을 그리면서 옛 추억의 정경을 표현했다. 인화지의 강렬한 느낌 대신 한지의 은은한 색감으로 더 나은 감정을 전달하겠다는 박 작가의 의지가 컸다. 이에 프린터를 직접 사고, 인쇄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도 겪었다. 

작품은 모두 연출하지 않은 자연 또는 일상 속 모습이다. 연출한 사진처럼 포착을 잘해서 주변에서는 연출 사진이 아니냐는 의문도 많다. 

박 작가는 "미국 점포에 들어갈 수 없어 사실 그대로를 촬영하는 훈련을 하며 연출하지 않은 사진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면서 "공간 속에 있으면 거짓말처럼 공간이나 사물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며, 이를 들으면서 카메라에 담았다"고 말했다.

박기호 작가는 인화지 대신 한지에 사진을 담았다. 은은한 색감과 조명이 어우러져 관람객들의 더 나은 감상을 돕는다.<사진=강민구 기자>
박기호 작가는 인화지 대신 한지에 사진을 담았다. 은은한 색감과 조명이 어우러져 관람객들의 더 나은 감상을 돕는다.<사진=강민구 기자>
◆과학과 예술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과학자와 소통 기대"

"대덕은 벌판에서 한국 과학의 중심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과학 동네에서도 재건축과 남겨진 공간을 다룬 전시 작품을 보면서 정서적으로 느끼고, 생각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박 작가는 대덕에도 잠시 거주한 경험이 있다. 연구자의 생활, 연구 내용 등은 작가로서도 궁금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이다. 과학자와 함께 생활하고 의사소통하면서 기록이나 유산 등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도 많다. 

가령 박 작가는 빈집의 거울과 같은 사물을 보면서 과학수사를 한다는 느낌을 받곤한다. 남겨진 수저, 화분을 보면서도 누가 살았는지, 무엇을 심었는지 상상하고 호기심을 갖는다.

작품을 떠나 기록과 공간의 활용이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 그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 고민하면서 과학과 예술의 결합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박 작가는 "예술과 과학을 분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면서 "과학과 예술은 모두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며, 생활에서 나와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왜 기록해야 하는가가 중요하며, 기록이 사라지면 역사와 정서도 함께 사라진다"면서 "과학계에서도 연구 모습, 연구 생활 등을 예술과 결합해 기록으로 남겼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박 작가는 이번 전시회에 많은 관심과 관람객들의 참여를 당부했다. 박 작가는 이번 전시회 준비 과정에서 조명부터 배치까지 각별히 신경을 썼다. 박 작가는 "관람객들을 위한 특별한 감상팁은 없다"면서도 "각자 느끼는 감정 그대로 즐겼으면 한다. 어떤 이는 신기해하고, 또 다른 이는 향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박 작가는 조명, 작품 위치 등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사진=강민구 기자>
박 작가는 조명, 작품 위치 등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사진=강민구 기자>

공간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작품들.<사진=강민구 기자>
공간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작품들.<사진=강민구 기자>
한편, 박 작가의 작품 전시회는 KAIST비전관 내 기획전시실에서 지난 14일부터 전시를 시작해 내년 1월 18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를 기념해 박기호 사진가의 강연회 등 전시 연계 프로그램도 함께 열린다. 박 작가는 'The EYE of the Soul'을 주제로 오는 28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KAIST 학술문화관 2층 양승택오디토리움에서 강연할 예정이며, 내달 7일에는 아티스트 토크 시간도 갖는다.

관람은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할 수 있으며, 공휴일과 토요일은 휴관이다. 문의는 042-350-4470.

잔해속에 피어난 나팔꽃.<사진=강민구 기자>
잔해속에 피어난 나팔꽃.<사진=강민구 기자>
◆박기호 사진 작가는?

1960년 서울 출생이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 사진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귀국해 20년 동안 국내에서 외신 사진기자로 활동했다. 비즈니스 위크, 포춘, 타임, 포브스 등 세계적 잡지, 대기업 광고 사진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작업했다. 

2007년 인물사진에 오브제를 덧붙여 3차원적 사진을 시도한 'Photography & Texture' 연작으로 첫 개인전을 가진 뒤, 다시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작품으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전역의 빈 점포를 촬영한 'Everything Must Go'를 발표했다.

이후 귀국해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추억을 갖고 철거되는 재개발 지역의 빈집을 촬영한 'What we left behind(2016년)', Silent Boundaries(2018년)' 전시회로 저널리즘, 상업주의, 예술 분야를 섭렵한 그만의 작품을 선보였다. 현재 연세대 송도국제캠퍼스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