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순석 ETRI 커뮤니케이션전략부장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원장 이상훈)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자발적 학습 커뮤니티인 새통사(새로운 통찰을 생각하는 사람들)가 열립니다. ETRI 연구자들이 일반 국민과 선후배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디지털혁명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기술들을 탐색하고 고민해 주제발표하는 자리입니다. 새통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전달드리고자 참가자들이 직접 정리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미래 우리에게 다가올 새로운 기술은 무엇이며, 이를 대비하는 연구원들의 자세와 각오는 어떠한지 글로 만나보세요. [편집자주]

이번 114차 새통사 모임은 정말 특별한 분을 모셨다. 한국사람들이라면 껌뻑 죽는 학벌(Yale-동경대-Harvard)을 가진 미국사람 (Emanuel Yi Pastreich)이자 한국사람인 경희대 이만열 교수다.

한국사람보다 한국의 저력을 더 잘 알고, 우리보다 우리의 문제를 더 심층적으로 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책으로 한국사람들에게 왜, 빨리빨리 사십니까라며 용감하게 질문을 던져준다. 우리에게 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사유의 시간으로 이끌어 주는 아직은 이방인인 이만열 교수는 바로 행동하는 꽉찬 지성인 자체이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소고기 1 Kg를 생산하기 위해서 곡물 7 Kg를 소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곧 바로 채식주의자를 실천하는 모습에서, 우리가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무언으로 웅변해주는 가냘프지만 강인한 지성인을 바로 곁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겐 행운이다.
 

이 교수는 10년전 녹색지구 건설이라는 꿈을 안고 과학도시 대전에 정착했다. 그러나 인문적 이슈는 그저 책 속의 이야기처럼 취급되고, 머리 상념에 지나지는 않는 특이한(?) 대덕의 문화 때문에, 다시 서울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대덕특구의 과학과 기술을 고민하는 연구자들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라는 치열한 반성의 시간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지난 113차에서 곽상수 박사의 연구자라면 지속가능성을 논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한 주문이 채 잊혀지기 전에, 이만열 교수가 다시 한번 지성인이 갖추어야 할 것, 지성인이 실천해야 할 것들에 대한 주문이 우리들의 머리 속에 기억으로 자리잡히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제 대외피질 저편에 자리잡은 조그만 기억 하나가 나 자신, 우리 자신들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횟수를 거듭하는 새통사에 참여 하시는 분들이 시작할 때와는 전혀 다른 자세를 가지는 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3년이라는 시간동안 100회를 거쳐온 새통사 모임이 있는 하루는 일상을 벗어나 특이한 날임에 분명해 보인다. 나와 다른 생각, 다른 관심을 가진,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최소한 3시간에서 6시간 가까이를 함께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을 만든다. 그 기억이 감각신호에 대한 나의 반응을 다르게 하며 조금씩 변하고 그 변화가 다시 새로운 기억으로 되먹임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새통사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변한 것은 우선 남의 이야기를 먼저 듣게 되었다. 아직까지 가야 할 길이 멀게는 느껴지긴 하지만, 이것만 해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지 싶다.

 

1. 한국을 일어나게 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저력이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해외에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기조가 너무 천편일률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방식은 이러하단다. 50년대 우리나라는 에티오피아보다도 못한 경제 수준의 못사는 나라였는데, 절치부심 열심히 살아내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오늘날과 같은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되묻는다. 우리나라가 그럼 지금의 소말리아처럼 정말 아무것도 없는 그런 나라였나? 제대로 된 역사기록만을 가지고 따져도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나타나는 우리의 과학과 기술의 수준은 당대의 최고의 수준이었다. 어떻게 소말리아와 비교할 수 있는가? 왜 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가? 조부모와 부모들이 흘린 땀과 참아내야 하는 고통의 크기가 얼마나 큰데, 얼마나 엄청난 노력의 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오늘의 대한민국인데,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적으로 표현하는 것인가?
 

이교수의 지적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얼마나 '축적'의 가치에 대해서 무지한가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축적이 주는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내가 지금 하는 생각 한가닥, 내가 지금 하는 말 한마디, 내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의식이 내 몸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반응들을 느끼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기에 제어 대상의 범위에 벗어나게 되고, 느끼지 못하기에 내부의 되먹임이 존재하지 않아, 새로운 기억, 새로운 경험으로 축적되지 않고, 그냥 감각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행동으로만 연결되고 '축적의 회로'가 작동하지 않는 특이한 형질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뇌과학적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축적의 힘'은 익숙한 산을 등산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한번 올라보고 두 번 올라보면, 저 풀 다음에 어떤 꽃이 있는지, 저 나무 다음에 어떤 나무가 있는지, 어디쯤에 올라가면 쉬기 편한 것이 있는 것인지를 안다. 샘이 어디 있는지도 알고 비박을 하면 좋은 장소가 어디 있는지도 알게 된다. 그러한 '축적된 기억'은 종주라는 멋진 계획을 탄생할 수 있게 한다. 아무리 높고 먼 길이라도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세운 계획이 실현될 수 있는 지원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전해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분명 '축적의 회로'이다. 기억이 생기고, 그 기억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할 것인가 '되먹임의 회로'가 없다.
 

지난해 있었던, 촛불시위에 대한 이 교수의 지적은 정말 뼈아프다.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로부터 그 어떠한 역사의식이나 민주의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냥 매주 있는 토요일 행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는 이야기 속에서 다시금 우리의 축적의 회로, 되먹임의 회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정말 큰 문제는 사회적 '되먹임 회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위기감이 새삼스럽게 치밀어 옴을 느낀다. 축적의 보편화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는 사람만 안다. 마치 장인들이 자신의 궁극의 기술을 물려주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것과 같은 절망감이 느껴진다. 선조들의 엄청한 수준의 과학과 기술적 수준을 확대 발전시킨 경험도 일천하고 선조들의 엄청난 기록과 기록정신을 계승하여 우리의 것으로 체화시키려는 노력도 부족한 것이 틀림없다. 수많은 외침이 있었고, 4.19혁명도 있었고, 5.18민주화항쟁도 있었고, 6.10만세도 있었고.

수많은 역사의 변곡점이 있었지만 우린 그 변곡점 속에서 새로운 경험들을 축적시켜오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속은 50년대의 그 수준에서 달라진 것이 있을까 하는 반성의 시간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들의 깊은 반성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2. 한국사람들은 정작 자신들의 문제를 모른다.

이 교수가 던지는 두 번쨰 질문은 이러한 것들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치고 있는 수많은 혼란들을 인지하고 있는가? 그 혼란들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 혼란을 수습할 방도는 제대로 세우고 있는가? 한마디로 당신들 앞에 닫친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묻고 있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에는 과거 대한민국에 적용되어 왔던 5가지 주기가 종료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러한 6가지의 주기의 종료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기에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며.

첫째가 보수 리더십의 10년 주기의 종료다. 작은정부와 규제완화를 통한 경제성장을 촉진시킨다는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고, 그러한 기조 속에 사회적 인프라에 대한 투자 소홀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지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두번째는 수출주도형 고도성장 주기의 종료다. 부존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우리나라가 취할 수 밖에 없었던 피치 못할 환경이었다. 하지만, 환경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사양산업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음에도 우리 산업의 발전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모색없이 계속해서 거액의 자본을 동일한 산업에 투자해 왔기에, 기존의 주력산업을 탈피해야 하는 요즘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세번째는 해방 후부터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저주기 중의 하나가 미국중심주의다. 트럼프 정부의 출범은 순간의 해프닝이 아니다. 미국의 글로벌 거버넌스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미국 국민들의 속마음의 표출이다. 이른바 미국고립주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 또한 대한민국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네번째는 서구중심의 국제질서의 종료다. 중국과 인도와 아세안의 역동적인 모습은 커다란 변화를 가지고 올 것이 분명하다. 아쉽게도, 우리는 중국중심의 세상에서 축적된 지혜를 물려받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술의 발전과 진화에 따른 인간중심 노동시대의 종료다. 이 역시 우리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기계노동 시대의 도래, 아시아중심 시대의 도래, 보호무역 시대의 도래, 주력산업의 교체, 진보정권의 시작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일어나는 엄청난 변화 속에서 우리의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점이지만, 우리는 그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 봐야만 한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님에도 누군가 '전지전능한 강한 정부'가 나타나서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살고는 있지 않는가라고 이 교수는 질문한다. 이 뿐이 아니다.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지구라는 몸이 직접적으로 기록해 놓은 역사적 기록 속에서, 지금 지구는 치명적인 상태로 다가가고 있다고 과학자들이 증언함에도 옆집의 불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에너지 자급률이 3% 수준이고 곡물자급률이 23% 수준이라는 사실을 수차례 경고를 해도, 우리는 마치 아프리카의 어느 못사는 나라의 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기후변화가 본격화 되고 식량전쟁이 일어나고 환경을 더욱 파괴되는 상황으로 치닫는 다면, 우리의 끝은 자명한 일임에도 우리의 '경고회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3. 한국에는 지식인, 지성인들이 존재하는가?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고 말하는 이교수가 잡은 방향은 Earth Governance다. 지금은 한 사람, 한 가족, 한 동네, 한 조직, 한 나라, 인류만의 문제가 아닌 지구촌 전체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다. 기후변화의 원인제공은 인류의 과도한 화석연료 의존에 기인하고 있지만, 인류가 발전이라고 하는 방향의 속성을 면밀히 살펴보면, 엄청난 에너지의 소비를 전제로 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지구 바깥으로의 유영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객기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지구촌 전체가 경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목적함수는 지구촌의 지속가능성 확보다.
 

지구촌 경영이라는 관점에서 쳐다보면, 지금까지 우리 인류가 정의해 놓은 인류의 문제는 모두 다시 정립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reductionism적 차원에서의 문제정의는 hollism적 차원에서의 문제정의와는 달라야 한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된 것이지만, 에너지 문제가 에너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식량문제와 환경문제를 동시에 풀어야만 풀리는 문제라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수많은 문제 또한 이제는 친환경이라는 새로운 제약조건을 반드시 포함시켜서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에 있었던 UN의 3대 환경협약-생물다양성 협약(1993 발효), 기후변화 협약(1994 발표), 사막화 방지협약 (1996 발효) 등-의 발효 이후 환경은 더 파괴되었다는 아이러니는 문제를 지구촌 관점에서 새롭게 재정의해야하는 역설에 힘을 더해주는 것이다.
 

이 교수가 들려주는 몇가지 사례는 이른바 사회여론을 이끌고 있는 지도층이나 지식인들이 어떤 리더십을 갖춰야 할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서울에서 열리는 환경기술 세미나에 참석해보면, 대부분 고급호텔에서 열리고 춤게 느껴질 정도의 냉방이 가동되고, 참석자들 대부분이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오고, 다 먹을 수 없을 정도의 푸짐한 음식을 나와서 절반은 남긴다고 한다.

굳이 환경과 관련된 주제가 아니더라도 우리도 주변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우리의 생활 자세에 있어서 '친환경'이라는 제약조건이 없음을 직접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구촌의 문제는 이처럼 정부나 리더의 리더십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각자가 조금씩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정부는 그런 노력이 고통스럽지 않고 편안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인프라를 확충해주는 일일 것이다.
 

이 교수는 대한민국에게,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지구촌경영의 주도를 위해 몇가지 처방을 한다. 첫째, 본질에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왜?'라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문제의 근원에 대한 답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사랑방' 문화를 부활시키고 이것을 글로벌 플랫폼화하자고 제안한다.

유사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공부하고 연구해 문제를 정의하고 대안을 준비하는 내실있고 권위있는 '사랑방' 문화를 ICT기술과 결합하여 글로벌화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모델을 세계에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지구촌의 규칙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신 사랑방의 축적이 지구촌 사람들이 공유하기 쉽게 준비되어야 한다.

지금의 시점에서는 블록체인 기술을 차용한 사랑방 문화의 정착과 확산을 계획해보면 좋을 것 같다. 지금 ETRI에서 시도하고 있는 AOC (Autonomous Open Community)가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는 문제나 지식의 공유와 확산이다.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축적된 지식의 보편화 문제, 공유문제다. 특정계층의 특정세력의 사람들만으로 지구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지식인들이 '사랑방'문화를 무등을 타고 이루어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세 번째는 새로운 가치의 습관화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제도나 정치인들의 말이 아니다. 결국 그 사회 구성원들인 우리 모두의 행동습관의 변화가 이뤄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특히, 우리가 물려받은 전통적인 문화와 가치들은 지구촌경영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선진화된 것들이 많다. 친환경적 건축양식, 친환경적 음식문화, 친생태학적 충효문화 등 짧은 서양문화가 경험하지 못한 고귀한 축적의 산물들이 많이 있음에도 우리는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인류가 그리는 문화, 산물은 모두 인간의 습관화의 산물이다. 선조들의 좋은 습관이 어떤 좋은 전통문화를 만들어낸 것이지도 살펴 배울 필요가 있다.

네 번째는 우리가 앞서 있는 디지털문화를 지구촌 경영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시대를 거치면서 정보의 이동 속도가 엄청나다. 그러나 아직 가상세계의 불완전성으로 인한 인간의 물리적 이동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 그것이 곧 에너지 소비의 증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보의 이동이 물리적 이동을 수반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수준에서 만족스러워진다면 우리 인류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결국 가상세계와 물리세계를 완벽하게 재구성하며, 신뢰가 기본이 되는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지구촌에도 우리에게도 지속가능성의 밝은 미래가 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섯 번째는 무의미한 경쟁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모든 것에 앞선 전제조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속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없는 우리로서는 지금 하고 있는 경쟁의 무의미성을 따질 여유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유일한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 '공부'다. 아니 일등 문화다.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하여 줄을 세우는 경쟁문화 속에서 1등을 하는 것이 유일한 성공의 길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우매한 사람들의 위안에 지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가치의 발견이나 창출이 답이지 싶다.
 

끝없이 폭주하는 소비문화, 주변환경 변화에 따른 주력산업의 퇴조, 새로운 가치의 창출의 부재로 정리할 수 있는 우리사회의 문제는 결국 새로운 방식의 지속가능성을 탐색하기 보다는 세대간의 갈등과 계층간의 갈등만이 우리 앞을 기다리게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지식인의 책임과 의무가 더욱 강조되어야 할 시기임에 분명하다. 공부하고 확산하고 공유하고 습관화하여 축적해가는 생활양식만이 지속가능성 확보의 유일한 답임을 Emanuel Yi Pastreich 교수는 답답한 마음에 이만열 교수로 나타나 우리에게 피를 토해 주신다.
 

네트워킹 시간 내내, 우리 모두의 대화를 겉돌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상과 현실의 문제였다. 이상과 현실을 인정하라는 측과 이상과 현실간의 갭을 집단지성으로 메워나가야 한다는 측의 대화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마디 논쟁을 종식시키는 말이 있었다. '싸우면 지옥이다!' 얼마 전에 25인승 미니버스를 타고 348일동안 25개국 163개 도시를 여행하고 온 빼빼가족의 인터뷰 내용 중의 하나다. 시베리아와 같은 극한 환경에서는 싸우면 곧 지옥이었다라는 의미이다. 가족끼리 싸우고 미니버스를 떠나면 돌아오는 것은 추위뿐이었으리라. 나의 말 한마디가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지를 자연스럽게 학습하며 축적한다는 의미다. 110차 모임에서 성단근 교수가 '북유럽 5개국의 오늘 문화수준을 일궈낸 것도 결국 긴긴 겨울밤'이라고 하던 말과 일맥상통한다.
 

집단지성은 축적의 이음동의다. 일화기억이 많이 모이면, 그 속에서 범주화가 일어나면서 일반화된 지식이 형성되는 의미기억이 일어나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가 가진 생각들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시점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생기게 해 하나의 관점을 만들게 하고 관점의 다양화를 통해서 객관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집단지성이다. 하여, 집단지성은 곧 인류공동의 지식자산이다. 자연스런 집단지성 활동이 일어나야 고민해야 할 과제를 만나게 된다.
 

5년 전 유쾌하지 않는 기분으로 떠났던 대전을 다시 찾아 진지하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하여 고민한 내용을 풀어내 준 Emanuel Yi Pastreich 교수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Earth Governance라는 새로운 방향성을 추구하는 지구경영원(http://emi.earth/)의 왕성한 활동을 함께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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