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인·정보방송통신인 신년인사회서 '진심' 담긴 덕담
"애정과 존중 느껴졌다"···과학자들 함박 웃음

정치인은 말로 점수를 따고 잃는다. 언력(言力), 언어의 근육, 언어의 최전선 등 정치인의 말의 중요성을 정치전문 박보균(중앙일보) 기자는 늘 강조한다. 말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함축적이어야 한다. 듣는 사람의 감정선과 이성을 건드려 울림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평소의 생활 속에서 진심과 애정이 녹아 있어야 한다.

지난 9일 개최된 과학기술인·정보방송통신인 신년인사회에서 이낙연 총리의 축사가 그랬다. 준비된 원고를 읽고 고개를 든 이 총리는 속에 있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출발은 중국 과학의 아버지인 췐쉐썬(錢學森)의 일화.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연구원으로 일하다 매카시 열풍으로 스파이 혐의를 받고 모든 직위에서 쫓겨난다. 그러다 중국에서 암약하다 체포된 미국 정보요원들과 교환 형식으로 중국으로 돌아온다.

그에게 어느날 날아온 초청장. 인민대회당에서 열리는 국가 중요행사. 초청장에는 테이블 16번으로 적혀 있으나 막상 그곳에 가니 자리가 없다. 잠시 어리둥절하고 있는 그에게 안내된 자리는 헤드 테이블. 바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옆자리.

마오는 이 자리에서 췐 박사에게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파스퇴르의 말을 인용하며 국가 발전에 과학기술이 중요한 만큼 많은 역할을 부탁한다고 말한다. 이 만남을 계기로 췐쉐썬은 양탄일성이란 큰 선물을 조국에 주었고, 오늘날 중국 과학굴기의 밑바탕이 될 인재들을 키우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총리의 두 번째 이야기는 우리의 개발연대 이야기다. 박정희 대통령은 KIST를 세우며 '감사'를 안받도록 했다. 내부 회계 감사는 받되 외부 감사는 금한 것. 그 결과 많은 과학자들이 자율적으로 맘껏 연구할 수 있었고, 이는 국가 발전의 큰 바탕이 됐다.

세 번째는 지금으로부터 10년전 한 언론사의 여론조사 내용이다.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아 국가 발전에 무엇이 가장 큰 역할을 했느냐는 설문이었다. 여기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이 과학기술이었다. 경제 개발이나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시점인만큼 스포츠 등이 꼽힐 것으로 짐작됐다. 그러나 국민들이 1등으로 꼽은 것은 과학기술이었다며 과학자들의 노고를 국민들은 안다고 강조했다.

이 총리가 끝으로 든 것이 최근 일본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 설문. 초등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1위가 과학자와 학자. 노벨상을 연거푸 받은 것도 영향을 받았겠지만 우리나라 설문 1위가 운동선수인 것과 대비된다며 최근 일본발 뉴스 가운데 가장 부러운 소식이었다고 덧붙였다.

이 총리의 말을 들은 과학자들은 중간중간 박수를 치며 크게 공감하는 반응이었다. 부산 출신의 한 과학원로는 "원고 없이 저렇게 이야기하고 이웃 나라 사정과 우리나라에 대해 잘 알 정도면 과학기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것 아니냐"라며 "과학자들을 이해해줘 정말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 연구 중심대학의 총장은 "과학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은 것이 느껴진다"라며 "과학자들 힘을 내게하는 총리"라고 평했다.

관료 출신의 한 인사는 "깊은 애정이 배어있는 말씀"이라며 "행정을 할 때의 자세를 가다듬게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출연연의 한 과학자는 "문재인 정부가 과학계에 별로 관심이 없고, 오히려 일부 옥죄는 분위기여서 사기가 떨어지고 있는데 인식을 달리하게 됐다"라며 "연구 현장을 찾아와 과학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밝혔다.

이날 신년 하례회는 최근 10여년의 모임 가운데 가장 화기애애했다는게 중평이다. 그동안 역대 대통령들이 참석한 것에 비해 격이 좀 떨어졌는지 모르고, 그들이 한결같이 전폭적 지원을 약속한 것에 비해 내실은 미흡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이 목말라 했던 것은 격이나 돈이 아니고 진심이 담긴 위로와 공감이었다. 이 총리는 그것을 해낸 것이다. 이전 대통령들이 인사말만 하고 자리를 떴던 것에 비해 이 총리는 행사내내 자리를 함께했다. 때문인지 과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은 총리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하지만 총리의 훈훈한 신년회를 한 발 벗어나면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 대변되는 과학계 분위기는 최근의 강추위처럼 냉랭하다. 과학계에도 적폐 청산 바람이 불어 임기가 남아 있는 일부 기관장에 사임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과학에 대한 태도를 되돌아 보면 기대만큼 잘하지는 못했다. 부친이 과학에 대한 애정이 컸던 만큼 그 DNA를 가졌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연구 현장을 찾지 않았다. 이벤트로 매우 드물게 찾았을 뿐 과학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지는 못했다.

그런데 집권 후반에 가면서는 거꾸로 과학계의 자율성이 높아졌다. 국정 농단 등으로 지휘체계가 가동을 안하며 과학계 인사 등에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영이 안서니 당시 과기담당 부서인 미래부의 지침이 연구회나 산하기관 이사회에 통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과학계가 가장 자유도가 높았고, 이것이 계속되면 자율성이 확보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자 적폐청산이란 구호 아래 당시의 전후 사정은 살피지 않고 단순히 이전 정권때 선임됐다는 이유로 솎아 내려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청와대와 가까운 사람을 이러저러한 자리에 임명하고 있다.

과학계 현장에서는 주체만 바뀌었을뿐 잿밥에 관심을 갖는 행위는 마찬가지란 말이 나오며 과학자들에게 줄서기를 학습시키고 있다는 자조가 공공연히 거론된다.

이웃나라 중국에서 시진핑을 비롯해 지도자들이 과학자들을 극진히 대한다. 마오쩌둥 이래의 일관된 모습이다. 일본에서도 과학기술은 생명선이란 생각을 갖고 과학기술자들을 대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정권에 따라 다르다. 이승만·박정희 정권까지는 과학기술에 대한 나름의 관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는 집권자에 따라 달랐다. 과학기술 예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으나 과학자를 마음으로 위하는 대통령은 찾기 힘들었다.

오늘날 자조하는 과학계의 모습이 집권자들이나 관료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 스스로도 오늘날의 대접이 남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중국은 양탄일성이란 선물을, 일본은 노벨상으로 기대에 부응했다.

우리도 개발연대에 중화학 공업 발전에 과학이 기여했다. 그러나 국민 소득 1만 달러를 돌파한 1995년 이후는 별다른 역할을 못했다. 오히려 과거의 역할에 안주하며 늘어나는 연구비 대비 성과를 못냈다. 그러면서 각종 제도의 미비나 관료들의 통제 등을 근거로 연구결과가 안나오는 핑계를 댔다. 스스로가 환경을 만들려는 노력들은 안했다.

일본이 별것 아니라고 평가절하하며 자기 합리화하는 총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부럽다고. 한국 실정에서는 용감(?)하게 시인하고, 과학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분명 다행스런 일이다.

과학계가 이제는 변해야 한다. 정권이란 바람에 휩쓸리지 말고 자율과 자유가 무엇인지 숙고하고 본인들이 찾아야 한다. 올바른 지도자만을 쳐다보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국민들이 과학자를 마음에서 존중하게 만들어야 한다.

과학자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이후 온국민이 함께 웃는 그런 날을 그려본다. 그리고 그 주체는 과학자 스스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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