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선 행정원, 6년 넘게 지의류 정통회화 작품 활동
제주도립미술관 '과학예술 2017 카본 프리(carbon-free)' 展 21점 출품

산에 오르다 보면 바위에 퍼진 얼룩덜룩한 무늬와 나무기둥에 말라붙은 회록색 페인트 형체를 띤 생물을 자주 볼 수 있다. 이 생물을 본 사람은 많겠지만,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김순선 작가도 그랬다. 그저 바위이끼인 줄 알고 약 2년 동안 화폭에 담았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 국립공원 전시관에서 그림 속 주인공의 정체를 알게 됐다. 우리말로는 지의류(地衣類), 영어로는 'Lichen'이라고 불리는 균류다. 지의류에 대해 알아가면서 김 작가의 그림에는 이전과 다른 의미가 담기기 시작했다.

그가 지의류를 그려온 지 6년이 넘었다. 이제는 프로 예술가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본래 직업은 따로 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행정원. 벌써 은퇴를 3년 앞둔 베테랑 직원이다. 

오는 3월 4일까지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과학예술 2017 카본 프리(carbon-free)' 전시에 참여한 김 작가를 만났다. 그는 지의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할까.

ETRI 내 산책길에서 김순선 작가. <사진=한효정 기자>
ETRI 내 산책길에서 김순선 작가. <사진=한효정 기자>
◆ 작은 세계와 자연에 대한 관심, 지의류에 닿다

김 작가에게도 그랬듯이 지의류는 우리에게 낯선 존재다. 그러나 청정한 산 속을 등산하다보면 숱하게 볼 수 있다. 김 작가는 "등산객들이 오히려 지의류를 나보다 더 많이 봤을 텐데 몰라서 안 보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의류는 균류(菌類)와 조류(藻類)가 붙어서 공생하는 생물체다. 사막과 툰드라 지역에서도 자라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녀 '땅의 옷'이라 불리지만, 아무데서나 살지 못한다. 환경오염, 특히 대기오염에 민감하게 반응해 지표생물로 불린다. 지구에 약 4만 종이 있으며 그 중 700~800여 종이 국내에 서식한다고 알려졌다. 국화잎, 버섯, 스펀지 등 형태가 매우 다양하고 서식지에 따라 색도 다르다.
 
지의류는 예술가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아니다. 김 작가는 "지의류만 정통회화로 그리는 작가는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며 "서양에서는 사진 작품으로 주로 다루며, 국내에는 이끼와 섞여 사진 작품으로 남겨지거나 민화 속 소나무에 얹혀서 등장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지의류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이를 그리는 작가도 거의 없었다. 김 작가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최초로 지의류를 그린 작가다. 작은 세계와 자연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기에 다른 사람이 못 보는 지의류에도 눈길을 줄 수 있었다. 여기에 미술에 대한 관심이 더해져 작품이 탄생했다. 직장 생활과 미술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 지금의 단계에 이르게 됐다.

대전 계족산의 지의류. 서울 인왕산과 북한산에서는 지의류를 찾아보기 어려운 '지의 사막'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에 비해 대전은 환경이 깨끗해 지의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AE-L 계족산, 2015, acrylic and sand on canvas, 117x91 cm) <사진=김순선 작가>
대전 계족산의 지의류. 서울 인왕산과 북한산에서는 지의류를 찾아보기 어려운 '지의 사막'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에 비해 대전은 환경이 깨끗해 지의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AE-L 계족산, 2015, acrylic and sand on canvas, 117x91 cm) <사진=김순선 작가>
◆ 지의류로 말하는 자연의 본질

지의류를 그리기 위해서는 미술 공부만으로 부족했다. 그에게 지의류는 그동안 알던 식물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보는 눈을 다양하게 하기 위해서 지의류 관련 책과 논문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아는 만큼 지의류가 다르게 보였다.

"제가 그리는 것은 단순히 지의류만이 아니에요. 지의류가 말해준 자연의 본질이에요. 인간도 자연에서 나왔죠.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의 자연을 느끼고 볼 수 있도록 전도사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작품을 보는 사람이 자연 너머에 깃든 것들을 깨닫길 바라는 마음으로 붓을 든다. 특히 그가 지의류 작품을 통해 들려주고자 한 것은 인간과 자연의 위태로운 관계다.

"공장과 산업생산물 등 인간의 욕망이 우리의 근원인 자연을 좀먹게 하고 파괴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려 합니다. 다만 그것을 예술로 승화해 '아름다운 경고'를 하는 것이죠."
 
카본 프리 전시에 참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 전시는 제주도의 과학 정책인 '카본 프리 아일랜드 2030'에 예술을 접목해 탄소와 우주·자연·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를 살펴보자는 의도로 기획됐다. '기후변화와 환경재앙을 탄소의 탓으로만 돌려야 할까? 저탄소 사회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김 작가는 지의류로, 그 외 13명의 작가들은 바다 쓰레기, 숯, 스티로폼 등 소재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왼쪽은 미국 럿거스 대학교의 지의류. 미국의 대학은 자연을 잘 보존하고 가꾸기 때문에 몇백 년 된 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이 작품 속 지의류는 오크나무로 보이는 나무의 줄기에서 자라고 있었다.(AE-L Rutgers대, 2017, acrylic and sand on canvas, 72.5x60.5 cm) 오른쪽은 거제도 '바람의 언덕' 바위 위의 지의류. 해풍에 머금은 물기, 신선한 바람, 햇살은 지의류에게 더없이 좋은 생육 환경이다. 바람을 마시고 햇살을 쬐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의류가 보여주는 듯하다.(AE-L 거제도, 2016, acrylic and sand on canvas, 91x72 cm) <사진=김순선 작가>
왼쪽은 미국 럿거스 대학교의 지의류. 미국의 대학은 자연을 잘 보존하고 가꾸기 때문에 몇백 년 된 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이 작품 속 지의류는 오크나무로 보이는 나무의 줄기에서 자라고 있었다.(AE-L Rutgers대, 2017, acrylic and sand on canvas, 72.5x60.5 cm) 오른쪽은 거제도 '바람의 언덕' 바위 위의 지의류. 해풍에 머금은 물기, 신선한 바람, 햇살은 지의류에게 더없이 좋은 생육 환경이다. 바람을 마시고 햇살을 쬐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의류가 보여주는 듯하다.(AE-L 거제도, 2016, acrylic and sand on canvas, 91x72 cm) <사진=김순선 작가>
그가 출품한 스물한 점의 작품은 총천연색으로 가득하다. 작가가 꾸며낸 색이 아니라 지의류 본연의 색이다. 그 모습은 세포 같기도 하고 자개장 무늬 같기도 하다. 가로와 세로 크기가 약 100cm나 되는 캔버스에 깨알 같이 지의류가 묘사되어 있다. 어떻게 이렇게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시작은 지의류를 찾아다니는 것부터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국립공원까지 가능한 많은 곳을 다니며 지의류를 찍고 이를 신문 2장 크기로 인쇄해서 보고 그린다. 아크릴 물감에 모래를 섞어서 쓰기도 한다. 인쇄 방법을 물었더니, 자세한 비법은 비밀이란다. 긴 과정을 거쳐 작품 한 점이 탄생하기까지는 100시간 이상의 공이 들어간다.

왼쪽은 지리산의 지의류. 지리산 골짜기를 흐르는 맑은 물과 사계절 드는 햇빛이 황금빛 지의류를 낳는다. (AE-L 지리산 구례1, 2016, acrylic and sand on canvas, 117x91 cm). 오른쪽은 통영의 지의류. 통영 세병관 앞뜰의 동백나무에서 본 지의류다. 작가는 이곳에서 통영의 바다와 푸른 동백, 이순신 장군의 애국심을 함께 느꼈다. (AE-L 통영, 2015, acrylic and sand on canvas, 73x53 cm) <사진=김순선 작가>
왼쪽은 지리산의 지의류. 지리산 골짜기를 흐르는 맑은 물과 사계절 드는 햇빛이 황금빛 지의류를 낳는다. (AE-L 지리산 구례1, 2016, acrylic and sand on canvas, 117x91 cm). 오른쪽은 통영의 지의류. 통영 세병관 앞뜰의 동백나무에서 본 지의류다. 작가는 이곳에서 통영의 바다와 푸른 동백, 이순신 장군의 애국심을 함께 느꼈다. (AE-L 통영, 2015, acrylic and sand on canvas, 73x53 cm) <사진=김순선 작가>
◆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꿈꾸며

지금까지 그린 작품은 약 80점. 카본 프리 전을 포함해 총 다섯 번의 초대전을 통해 작품을 선보였다. 작품이 알려지면서 팬도 생겼다. 그들은 김 작가에게, 그동안 보지 못했던 주위의 환경을 새롭게 보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이제 지의류가 조금씩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지의류를 알리는 것에서 나아가 사람들이 지의류를 연구, 활용하길 바라며 사명감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일종의 '과학정신'이라고 할 수 있죠."
 
그는 앞으로 생물학과 생태학 등 국내 기초 과학에 많은 젊은이들이 관심을 두어 연구가 활발해지길 소망했다. 개인적으로는 당분간 그림에 더 집중해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목표다. 4만 종의 지의류를 그리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작은 것들을 들여다보면 삶이 다양해져요. 모두가 미미한 존재 같지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몰라요.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해요. 모두 지의류가 가르쳐줬죠."
 
기후변화라는 자연의 경고를 받고 있는 오늘날, 김 작가의 그림 속 지의류는 우리에게 인류와 자연의 공존을, 특히 과학자에게는 저탄소 시대를 위한 연구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지의류를 실제로 보고 싶다면 비 온 뒤 산을 가보자. 활짝 핀 지의류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김 작가는 말한다.

※ [알찬 과학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이 기사는 한국화학연구원과 대덕넷이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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