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순석 ETRI 커뮤니케이션전략부장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원장 이상훈)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자발적 학습 커뮤니티인 새통사(새로운 통찰을 생각하는 사람들)가 열립니다. ETRI 연구자들이 일반 국민과 선후배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디지털혁명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기술들을 탐색하고 고민해 주제발표하는 자리입니다. 새통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전달드리고자 참가자들이 직접 정리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미래 우리에게 다가올 새로운 기술은 무엇이며, 이를 대비하는 연구원들의 자세와 각오는 어떠한지 글로 만나보세요. [편집자주]

한 달간의 긴 휴식 기간을 가지는 동안 박한표 대전문화연대 대표와 공학인들이 평소에 접하기 어렵고 낯설어하는 예술과 다리를 놓아 주는 분들을 찾았다. 미술·무용·음악·문학과 친구가 되는 길을 안내해 줄 귀한 분들이다. 새통사 105차 모임은 첫 시간으로 박선혜 전주교대 교수와 미술과 친구 되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오묘한 질서가 만들어 낸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 내는 문명의 충돌 속에서 생태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바른 길을 빨리 찾으라는 시대적 소명의 울림이 계속된다. 압박의 한가운데 놓여있는 우리가 어떻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힌트를 발견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박선혜 교수의 말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 그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들을 읽어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예술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간사가 예술가들의 말을 섬세한 감각으로 받아 낼 길이 묘연해 이번 105차 모임의 후기는 같이 참여해 주신 분들의 후기를 함께 옴니버스식으로 담아봤다. 이 또한 새롭고 신선한 시도가 아닐까 싶다.

◆ 미술관을 찾지 않는 사람들

우리나라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밤의 치맥집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다. 왁자지껄 소리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어수선한 치맥집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또 무엇이 그리 심각한지 다양한 삶의 여운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여느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한가하기 이를 데가 없다. 덕분에 치맥집처럼 밀려들어 오는 손님들을 의식하며 맥주를 더 시키고 치킨을 더 시켜야 하는 압박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냥 맥주에 맘껏 취한 상태로 주변을 의식할 필요도 없이 마음껏 그림에 취하고 유물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여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그런 취객들을 발견할 리 만무하다. 최진석 교수는 이런 것을 우리의 수준이라고 했다. 미술품이나 유물에서 모양이나 색이나 터치나 질감의 차이나 그림의 구상적 요소를 제외하고는 다른 즐거움을 찾을 길이 없다.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는 시선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냥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꿈을 그리고 삶을 그리는 존재다. 그래서 인문(人文)이라고 했다. 

주체적으로 그리는 자(者)는 그림을 멈출 수 없이 끊임없이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끊임없는 그림 속에 인간들의 삶의 패턴을 남긴다. 하지만 그 패턴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 패턴들을 읽어내어 색으로 표현하는 것은 미술이고, 음과 리듬으로 표현한 것이 음악이다. 이런 다양한 형상적인 방법으로 포착한 패턴들을 새롭게 표현하는 행위를 예술이라고 한다. 모두 최진석 교수의 강연을 기억하겠지만, 기억이 흐릿하신 분들은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읽어 보길 권한다.

우리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그린 무늬를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고 그것을 내 사유의 세계에서 포착하여 음미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실감 나는 이야기임을 뼈아프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또한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는 '인간'들과 알아야 한다는 지시를 받는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 간에는 현격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 '아는 만큼'과 '아는 만큼만'

즐거움을 찾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수준, 시각이 존재한다. 똑같은 그림을 온종일 보고 웃었다 울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림 옆에 붙어 있는 작가의 설명 한 줄을 읽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그것 또한 다양성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후자는 다양성에 포함될 수 없는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알고자 하는 욕망이 없는 존재는 주체적일 수 없는 것이다.

박선혜 교수는 '꿈은 간절하게'라는 글을 소개했다.

"꿈을 꾸는 것처럼 쉬운 게 있을까/ 꿈을 품는 것처럼 중한 게 있을까/ 꿈을 입으로 꾸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꿈을 몸으로 꾸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 꿈을 혼자 꾸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꿈을 함께 꾸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 꿈을 반짝 꾸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꿈을 끝까지 꾸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 간절하게 절실하게 끈질기게/ 마음이 사무치면 꽃이 된다."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다면 100 정도의 날개짓을 해서 몸이 익히게 하여 내재화한다. 이를 통해서 '나' 자신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박 교수는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는 것만큼만 보는' 우를 범하지 말라 한다. 그것을 피하는 방법으로 반야심경의 ‘수상행식(受想行識)’에서 수와 식의
순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별하고 분별 짓기'전에 반드시 '느낌의 받아들임'이 먼저이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는 구분과 분별 이전에 좋다 싫다 달다 쓰다 즐겁다 괴롭다 등의 원초적인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識이 受를 제한하여 아는 만큼 보이게 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만 보이게 되는 편협함을 경계해야 한다. 어떤 대상을 통한 느낌은 누구나 다르고 그 다름을 낳게한 이유 또한 다양하다. 그 다양함 속에 켜켜이 숨겨진 삶의 희노애락이 숨겨져 있다. 그것을 한겹 한겹 벗겨내며 읽어 내는 즐거움을 말한다.

그 열림의 자세가 바깥으로부터 오는 수많은 신호를 정보화하여 내 안(in)에 맺히게(formation) 한다. 그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인간이 그린 무늬의 한켠 한켠에 시선을 맞대고 즐거울 수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소개하는 키네틱 아티스트 최우람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눈이 열린다. 어쩌면 그는 초연결사회의 빠른 소통과 반응을 표현하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금요일 서울 K-호텔에서 열렸던 'ETRI IDX Tech Conference'에서 심진보 박사가 설명한 초연결 사회 비유와 어울리는 장르다. 그는 초연결사회를 엑셀 파일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초연결사회의 엑셀 파일은 수조개의 세로줄(column)과 수조개의 열(row)을 갖는 방대함에 모든 데이터가 시시각각 변하는 파일이라 했다. 최우람 작가의 키네틱아트 또한 정적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인간의 무늬를 표현해주고 있다. 

모든 형상적인 표현에는 문법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들이 살았던 시대가 다르고 추구했던 가치가 시대마다 다르다. 그래서 남겨진 예술작품들을 현재 시각으로만 보는 것은 말 그대로 '아는 만큼만 보는 것'이 되고 만다. 그림으로 그 시대상을 훔쳐보려고 한다면 그 시대 화가들의 표현의 방법론에 대한 흐름을 함께 알고 있어야 한다.

동양의 그림에는 반드시 글과 그림과 낙관이 함께 한다. 그림을 그린 화가도 글로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그림을 소장하거나 비평하는 사람들 또한 그림에 글을 남겼다고 한다. 낙관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나 일본의 부채는 실용적인 차원을 떠나 예술적 작품으로 승화되어 있다. 전주에 가면 부채문화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부채에 담긴 다채로운 예술혼들을 접할 수 있다. 전주에 가는 분들은 반드시 부채문화관을 둘러보고 와야 한다.

일본의 부채에는 '하이쿠'라는 5-7-5의 17자로 된 특유의 단시가 있다. 부채의 팔덕선에 더하여 멋진 시집의 덕을 주는 구덕의 선을 베푼다. 박선혜 교수의 5가지 하이쿠 소개와 박한표 대표의 해설이다.

#1. "말을 하면/입술이 시리다/가을바람"
-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고, 자신의 장점을 말하지 말라.
- 남의 험담을 한 뒤에는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생각 때문에 한기가 엄습한다.

#2. "사람들 보지 않아도/봄이다/손거울 뒤 매화"
- 거울 뒤에는 이미 봄이 와 있다.
- 사람이 보지 않는 손거울 뒷면에서 조용히 봄을 맞이하는 매화가 있다.
- 세계의 뒤편에 고요히 숨어 있는 것을 향한 애틋한 마음과 자신의 인생을 거울의 뒷면에 배치한 심경이 드러난다.

#3. "초록이지만/당연히 그렇게 될/풋고추"
- 열정이 있으면 언젠가는 성취한다.
- 고추는 여름 내내 초록색이지만 가을이면 자연히 붉은 색이 된다.
- 고춧가루가 매운 것은 풋고추일 때의 매운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첫 겨울비/내가 처음 쓰는 글자는/첫 겨울비"
- 처음 만난 이에게 반가움을 표현한다.
- "첫 겨울비 내리네/첫이라는 글자를/나의 겨울비에"

#5. "아이 싫다고/말하는 이에게는/꽃도 없어라"
- 사랑이 없으면 꽃을 감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함께 하는 후기

▲우경 강영순 선비

드물지만 그나마 가는 미술관은 이응로 미술관이다. 어떤 측면에선 그림보다는 미술관 자체가 주는 편안함으로 잠시 마음을 놓으러 간다. 그래서 전시된 그림도 둘러보지만 전시관 내부를 그림만큼이나 본다. 내겐 건축도 그림도 문외한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건축은 루이스 칸을 통해 예술이 주는 강렬한 감동 혹은 공감의 기억 한 편을 갖고 있다.

그림은 그런 우연에 의한 자발성이 결여되어 있다. 책이나 다른 사람들의 '누구의 그 그림은...' 통한 얄팍한 지식에 의지하다 보니 그림을 대면하면 머리가 먼저 가동된다. 한시를 읽다가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옥편을 뒤지듯 머릿속이 바빠지는 꼴이다. 그러니 전혀 알지 못하는 알파벳을 보듯 그냥 선, 면 그리고 형태와 색채만 보고 지나친다.

간간히 감동이라고 생각할 때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의식이 배제된 그 '느낌'을 가져보려는 시도는 없었다. 그러니 내게 있어서 그림은 늘상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림감상교육이란 주제를 상기시켜준 분이 바로 박선혜 교수다.

受與識, 先受而後識也
識然後受, 非受也

그 동안 이 선후관계를 알지 못하여 그림을 대면하는 '내'가 사라져버렸다. 아니 배제되었다. 그러니 도무지 그림 앞에서면 시간을 두고 머무르지 못했다. 이번 강연에서 이것이 으뜸 배움이라면, 두번째는 그림감상에도 '다름이 주는 풍성함'이 결국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 내밀해 있음에 무릎을 치게 했다.

근래에 새벽에 읽은 글을 간간히 포스트잇에 적어 휴대폰에 붙여둔다. 그리고 운전할 때 얼핏본다. 지금 붙어있는 글은 이러하다.

天爲造人器也 (하늘이 사람됨의 그릇을 만들고)
造萬人一像 (모든 사람을 한결같은 형상으로 만들고)
造萬性一品 (모든 사람의 성품을 한결같은 품격으로 만든다.)
但造八異而九殊者 (다만 <사람됨의 그릇을 만듦에 있어서> 여덟가지가 서로 다르고 아홉가지가 특수하게 다른 것은)
濟質 互相不同 (구제할 바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한 사람씩 빠짐없이 느낌을 말하게 한다. 하나하나를 존중하는 것은 바로 참전계경의 한 구절인 이 글과 다를 게 없다. 여기저기 서로 장르는 다르지만 이렇게 조우하는 접점을 보게 되면 내 무지함이 그다지 싫지 않다. 밝음으로 치면 한낮이 으뜸이지만 새벽의 여명이 어찌 다만 사물을 밝히는 것에만 국한될까 싶다.

▲박한표 대표

삶을 위한 미술, 삶을 위한 예술이어야 한다. 작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 삶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구현하면 그 사람이 곧 작가이고, 창조가(creator)이다.

"작품을 통해 성찰적으로 반추한 나 자신이어야 한다." '우리'로 가기 전에 '나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오래 계속 본다. 그러면 그림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존중, 즉 느낌을 잘 간직해야 한다. 우선 내 느낌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후 작가의 의도를 살펴본다. 변증법적으로 상승시킨 후 내 삶의 변화를 꾀한다. 철학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습득된 지식이 내 삶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정보를 얻어 내 안에서 형성하고 변화를 일으킨다. 그것이 철학 한다는 말이고 인문학을 하는 이유이다.

▲하원규 박사

예술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일이다. 예술 작품을 창작하고 표현하는 사람은 예술가이다. 박선혜 교수는 예술이 복합매체화되고 탈장르화되고 있어 아티스트보다는 크리에이터라는 컨셉으로 전이되고 있다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융합에서 아름다운 기술이 곧 예술이라 생각한다.

학습이란 어린 새가 날개를 퍼득거려 스스로 날기를 연습하는 것이다. "배운 것을 가지고 날아 가는 것"이라고 한다. 조성진은 공연을 할 때 마다 귀한 공연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100~200번 연습을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기 공연을 보는 사람의 가슴에 영원히 귀한 모습으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예술과 기술이 융합되는 과학기술적 요소가 미적요소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시대적 트렌드는 예술가와 연구자는 점점 서로 다가간다. 박 교수의 Information이란 내적으로(in)+형성(formation)하여, 변화(transformation)되는 것이라는 개념설정에서 '내 삶의 예술' 보다는 '내 삶 안에 있는 예술'로 한 차원 높은 개념이 도출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세상을 동물계와 식물계 이분법으로 구분하지만, 그사이에 하나 더 넣어 기계계를 추가하였으면 하는 관점을 피력했다. 우리 주변을 에워싸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인 기계들의 파편을 생명체(living things)로 바꿔 놓는 작업도 예술이고 기술의 본질적 요소다. 죽어있는 기계를 살아있는 기계로, 수명이 있는 유기체로 때로는 생각하는 기계로. 

최우람은 기계를 너무 사랑하여 '진짜 같은 기계 생명체'를 예술작품으로 빚는다. 수많은 부품, 기계, 문명의 조각들을 온갖 형상으로 의인화하면 생명이 넘쳐난다. 이러한 기계 생명체 개념이야말로 예술과 ICT의 진정한 융합이고, 내 삶 속에 파고드는 예술과 기계, ICT의 지향가치가 아닐까. ICT의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품는 기계의 초연결은 IDX의 이념이자 철학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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