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과학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연구비를 받기 위해, 받은 연구비를 쓰기 위해, 쓴 연구비를 정산하기 위해, 수많은 서류를 채우고 회의에 참석하다 보면 정작 연구를 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연구 결과는 양적 지표에 맞춰 보고해야 한다. 몇 점짜리 학술지에 몇 편의 논문을 실었는가, 몇 개의 특허를 따고 얼마의 부가가치를 창출했는가 등등, 모든 것이 '얼마나'로 환원되곤 한다.

그런데 이렇게 '얼마나'에만 골몰하는 사이, 왜 과학을 하는지를 잊어버리고 만 것은 아닌가? 우리는 왜 과학을 업으로 선택했는가? 과학을 연구하여 무엇을 성취하고자 했는가? 내가 하는 연구는 스스로 더 나은 개인이 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아니, 이런 질문들을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던진 지 얼마나 되었나?

일본의 1960년대 학생운동을 지도했던 이들 가운데 도쿄대 전공투(전학공투회의)의 대표를 맡았던 야마모토 요시타카라는 이가 있다. 야마모토는 당시 이론물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는데, 전공투 운동을 이끌면서도 장차 도쿄대의 이론물리학 연구를 이끌어 나갈 인재로 교수와 동료 학생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69년 1월 이른바 '야스다 강당 사건'의 여파로 옥고를 치른 뒤 학계로 돌아가지 않고 학원 강사와 과학사 저술가로 살아가기를 선택했다. (이상은 최근 한국에 번역 출판된 야마모토의 회고담 '나의 1960년대'에서 관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가 대학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일본의 대학에서 과학을 연구한다는 것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야마모토가 바라본 1960년대 말의 도쿄대는 제국대학 시절의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지 못했다. 도쿄제국대학은 제국주의 전쟁 연구에 적극 가담하며 그 대가로 여러 혜택을 누려 오며 성장했는데, 패전 후에도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특권만 계속 누려왔으므로, 결국 도쿄대의 특권을 내려놓고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과격한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경주마처럼 주어진 방향으로 질주하기만 하는 연구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어떤 과학을 해야 하는가 또는 왜 과학을 연구하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는 점은 우리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에서 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적다고는 볼 수 없다. 과학자들, 정치가들, 정책 연구기관들, 언론까지 한국 과학의 장래를 걱정하며 이런저런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큰 선거가 있으면 경쟁적으로 과학기술 공약을 발표하고, 과학기술인을 영입하기 위해 경쟁한다. 국회에도 과학자들이 꾸준히 진출한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얼마나'를 이야기할 뿐이다. 어디에 얼마나 지원을 하고 주무 부서를 얼마나 크게 만들면 과학 경쟁력이 얼마나 올라가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과학자들은 왜 힘들어하는지, 한국 사회가 과학을 왜 지원해야 하는지, 한국의 과학과 과학자들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만나기 쉽지 않다.

실은 한국 과학의 역사에서 '왜'라는 질문은 줄곧 빠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은 이유 중 하나가 과학이 부족해서라는 생각이 널리 퍼진 이래로, 과학은 언제나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여겨졌다. 과학 그 자체를 위해 과학을 한다는 것은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 배부른 소리라는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1970년대에 정부가 앞장서 '전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벌인 것도 결국은 '과학 입국, 기술 자립'을 통해 경제 발전을 추구하겠노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과학은 여러 가지 지표를 따져 보아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다. 물론 연구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문제점들은 많이 남아 있겠지만, 과학이 부족하여 나라를 잃었다고 슬퍼하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발전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다. 손에 쥔 것이 없을 때는 그 질문이 사치로 여겨졌고, 어느 정도 있을 때는 잃을 것이 많아서 또는 그 질문을 해 본 경험이 없어서, 아직도 '왜'를 물어야 할 때에도 '얼마나'를 대신 묻고 있다.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값진 것이다. 다만 그것이 과학을 해야 하는 이유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우리 각자의 과거를 돌이켜 보아도, 과학의 길에 들어선 동기는 국가의 부강 같은 거창한 목표였다기보다는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고 싶다거나 그저 과학이 재미있어서 같은 소박한 것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왜'를 묻기 위해 어렵게 마음을 먹을 필요도 없다. 과학으로 진로를 잡았을 때의 첫 마음, 그것을 다시 찾기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닐까?

◆김태호 교수는

김태호 교수
김태호 교수
연표가 바로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듯, 과학기술사는 단순한 에피소드의 나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과학기술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보편적 지식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 지식을 쌓아올리는 과학기술자는 시대와 지역이라는 좌표계 안에서 실존하는 인간들입니다.

과학기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김태호 교수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진리를 추구하면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긴장 관계에 주목하고, 과거의 과학기술을 돌아봄으로써 현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 지면을 통해 한국 과학기술이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보고, 그 성과와 한계를 따뜻한 시선으로 균형을 잃지 않으며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김태호 교수는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과학학(STS)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를 주로 연구합니다. 1970년대 농촌의 변화를 선도한 '통일벼'의 역사, 한글 타자기의 역사, 한국 기능인력의 양성과 '기능올림픽'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써 왔습니다. 서울대학교병원과 한양대학교를 거쳐 현재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에서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 발간을 비롯한 다양한 학술 활동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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