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 목소리 없는 과기계 대표 단체들?

과학기술계를 오래 취재하면서 이번 박기영 인사 사태를 마주하며 놀랐던 점은 과학기술계 현장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박기영 교수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으로 임명되자마자 과학시민단체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에서 임명 반대 성명서를 즉각 발표했고,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에서도 '한국 과학기술의 부고를 띄운다'며 사퇴 촉구 성명을 냈다. 정계는 물론이고 서울대, 고려대 등 교수들의 박기영 퇴진 서명운동도 번졌다. 이번 인사야말로 반드시 막아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현장에서 느껴졌다. 

그런데 박기영 본부장이 임명된 후 10일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가진 첫 공식 정책 간담회장에서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박기영 본부장의 역할을 지지하는 모양새였다. 전직 과학기술부 장관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은 박기영 본부장의 역할을 강조하며 앞으로 주어진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길 기대하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이 자리에는 채영복 전 과학기술부 장관을 비롯한 전직 과학기술 고위 관료들과 장규태 한국생명공학연구원장과 이규호 한국화학연구원장, 조성찬 KIRD 원장 등 정부출연연구기관장들이 참석했다. 과총에서도 단순 배석하는 수준으로 이은우 사무총장이 자리했다.

현장에서는 이같은 간담회를 동원됐다고 본다. 그럼에도 과학계 원로와 연구기관을 대표하는 기관장들이 모인 곳에서 질서를 바로 세우려는 아무런 노력도 비판도 없었다는 점에서 실소를 금치 못하는 모양새다. 과학계 원로라면서 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결국 기득권 강화로 이어지도록 하는 행태라는 지적도 피하기 어렵다.

이번 박기영 인사 사태를 겪으면서 일각에서는 과학기술계 대표를 자임하는 과학기술 단체들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과총(한국과학기술단체총엽합회)이나 기관장협의회 같은 곳은 뭐하고 있나요? 과학기술인들의 목소리를 안듣고 정부 목소리만 관철시키려하니 단체 대표 자격 없는거 아닙니까?"

과학계 대표 단체들의 처신에 대한 과학자들의 이같은 분노가 점차 격해지고 있다. 정부 예산을 받기 때문에 벙어리 냉가슴으로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대표 단체들의 존재감이 별로 없다는 의미다. 

현장 과학자들은 정부의 무리한 인사 결정을 비롯해 극심한 관료주의, 자율과 책임 없는 연구환경, 탈원자력 에너지 정책 등 사상 초유의 연구환경 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에도 과학계 대표 단체들의 역할과 목소리가 너무 미미하다고 여긴다. 

적어도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소신있는 리더십을 기대해 보지만, 정작 현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거나 정부 눈치만 보는 과학계 단체들의 모습이다. 

이번 과학기술혁신본부장 후임 인사로 벌써부터 정치적 인물이 거론된다. 과학기술혁신본부장 뿐만 아니라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출연연 기관장,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등 과학계 요직의 인사가 줄줄이 예정돼 있지만 소위 기관장 자리만 기웃대는 자격없는 사람들이 득실댄다. 

과학기술계의 합리적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누가 과학계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까. 변하지 않으면 과학기술자는 물론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과학기술 대표 단체들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고 솔선수범하며, 과학기술계를 살리는 조직으로의 환골탈태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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