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박용기/한국표준과학연구원 초빙연구원

여름은 가만히 있어도 무언가 삶을 열심히 사는 느낌이 드는 계절이다. 조금만 걸어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일 한 것 같고 힘들고 지치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변의 자연을 둘러보면 더위 속에서도 자연은 성숙해지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봄은 들뜨고 어수선하게 지나가 버리는 유년 내지는 청소년기와 같다면, 여름은 우리의 삶을 성숙하게 하고 내공을 키워 장년과 노년을 대비해야하는 청년기일 것이다. 모든 일이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듯이 여름도 무덥고 때론 축축하고 지루하도록 길게 느껴지는 싫은 면이 있는가 하면, 풍성하고, 열려있고, 아직도 가능성이 많은 기회의 계절이라는 매력도 가지고 있다.

따가운 햇살, 지루한 장마, 무더운 오후, 그리고 잠을 이룰 수 없는 열대야, 거기에 불청객 모기까지 모두가 불만 투성이 뿐인 것 같은 여름날. 하지만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바다 위에 부서지는 아름다운 햇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후련하게 씻어주는 세찬 빗줄기, 나른한 오후에 마시는 냉커피 한 잔의 여유, 그리고 밤을 지새우며 모닥불 앞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낭만이 있는 계절이 될 수도 있다.

모기는? 글쎄? 하지만 가족 모두가 힘 모아 잡아야 하는 공공의 적이 되어 모두를 단합하게 할 수도 있는 필요악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모든 게 다 좋은 게 어디 있어?' 라는 삶의 철학을 깨닫게 하는 조물주의 선물 쯤으로 치부하기로 하자.

이 더위에도 주변에서 피어나는 꽃들을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면 여름날의 서정이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참나리

한 여름을 장식하는 꽃 중에 키가 크고 제법 큰 주황빛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소녀 같은 꽃이 있다. 참나리가 바로 그 꽃이다. 한 여름 소나기가 멈춘 후, 막 피어난 참나리 꽃잎에 매달린 물방울 속에는 또다른 아름다운 세상이 맺히기도 한다. 호랑나비가 날아와 얼룩점 박힌 나리꽃에 매달리면 나리꽃과 나비는 한데 어울려 커다란 하나의 꽃이 되는 여름날이다.

이러한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똑같은 모습을 담아내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행복한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랄 때도 있다. 누구나 아이들의 놀이처럼 '얼음' 하고 외치면 행복한 순간이 멈출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이란 순간 순간의 작은 기쁨과 보람과 즐거움의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 지는 퀼트와 같은 것일 지도 모른다. 이 여름 우리는 어떤 행복의 조각을 만들어 가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독일의 패션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는 "내가 사진에 대해 좋아하는 것은 사진은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순간을, 그리고 재현이 불가능한 순간을 잡아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Pentax K-1,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160 s, ISO100
Pentax K-1,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160 s, ISO100

Pentax K-1,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800 s, ISO200
Pentax K-1,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800 s, ISO200
나리꽃 /김용수

초여름의 햇살을 타고
그녀가 오고 있다.
쪽빛물결 일렁이듯 연주홍 치마를
사알짝 들어 올려
하늘빛 파스름한 속살이 보일 듯 말듯,
이슬망울 터트리는 수즙음으로
천성이 유순한 그녀가 오고 있다.
보아 주는 이 별로 없는
오솔길 멀리 외진 기슭이라도
갯바람이 얄밉게 흔들어 대는
바닷가 돌틈사이에도
보는 이 마다 꽃중에 꽃이라 하지만
그보다도 마음이 더 고아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는 그녀가 오고 있다.

◆연꽃

여름의 대표적인 꽃 중의 하나는 아마 연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할 것 같은 느낌의 커다란 꽃 속에는 금빛의 말하지 않은 언어들을 가득 담고 있어 여름날의 서정을 느끼기에는 이만한 꽃이 없을 것 같다.

사진예술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관점(view point)의 예술이라는 생각을 한다. 같은 꽃이라도 바라보는 각도와 시선에 따라 전혀 다른 빛과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연꽃을 사진에 담으면서 꽃 위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정말로 연꽃을 위에서 바라보면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중심에는 생명의 비밀을 간직한 황금빛 연밥이 자리하고 있고, 그 주위에는 이를 지키기 위한 작은 요정들이 호위를 하고 있는 모습의 꽃술이 자리한다.

그리고 가장 밖에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듯 꽃잎들의 축제 마당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또 어찌 보면 흰 장삼 자락을 휘날리며 가슴 속의 한을 뿜어내 듯 승무를 추고있는 춤꾼을 위에서 바라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바라보는 시각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같은 꽃도 참 다르게 보일 것이다. 삶을 바라보는 일도 비슷하리라.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카이사르의 말을 인용해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한 말은 동서 고금을 통해 진리인 것 같다.

그래서 삶을 변화 시키려면 관점을 바꿔야만 한다. 위에서 바라본 연꽃은 "만일 당신의 삶이 기로에 서 있다고 느낄 때엔 더 높은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토바 베타의 말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연꽃은 꽃 뿐만 아니라 잎 또한 참 아름답고 우아하다. 연잎 위에 떨어진 꽃잎 하나가 고여있는 빗방울 위에 조각배가 되어 또다른 삶을 시작하기도 한다. 꽃으로 살았던 화려함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아름다운 선택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꽃은 이렇게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Pentax K-1,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2500 s, ISO100
Pentax K-1,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2500 s, ISO100

Pentax K-1,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1600 s, ISO100
Pentax K-1,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1600 s, ISO100

Pentax K-1,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500 s, ISO100
Pentax K-1,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500 s, ISO100
연꽃/오세영

불이 물 속에서도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은
연꽃을 보면 안다.
물로 타오르는 불은 차가운 불,
불은 순간으로 살지만
물은 영원을 산다.
사랑의 길이 어두워
누군가 육신을 태워 불 밝히려는 자 있거든
한 송이 연꽃을 보여 주어라.
닳아 오르는 육신과 육신이 저지르는
불이 아니라.
싸늘한 눈빛과 눈빛이 밝히는
불,
연꽃은 왜 항상 잔잔한 파문만을
수면에 그려 놓는지를.

◆산앵두

장마로 비에 젖어 보내는 7월이지만 비가 개인 수목원의 뒷길에서는 7월의 보석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 이스라지라고도 불리는 산앵두의 붉은 열매다. 봄이면 예쁜 꽃이 피어 사진에 담곤 하였는데, 7월에 이렇게 보석처럼 열린 열매는 처음 보았다. 빗물에 말갛게 씻긴 모습이 마치 막 세수를 마친 해맑은 소녀의 얼굴처럼 곱다.

꽃보다 열매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열매가 바로 꽃 속에 담겨 있던 산앵두의 꿈이었기 때문일까? 시인이 보았다면 아름다운 시어로 노래했을 것 같은 모습인데 시에는 서툴러 나는 그냥 사진에 담기로 하였다.

Pentax K-1,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400 s, ISO100
Pentax K-1,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400 s, ISO100
꽃들은 피어나 절정을 이루고는 이내 스러져 간다. 나팔꽃처럼 어떤 꽃들은 아침에 피었다 저녁이면 지는 꽃도 있고, 길어야 며칠… 덥고 지루한 것 같은 이 여름이지만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만 간다. 사진으로 이 아름다운 순간을 담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여름날의 서정적 순간들을 담아보았다.

Pentax K-1,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6400 s, ISO100
Pentax K-1,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6400 s, ISO100


"말로 명확하게 표현하기가 어려워질 때, 나는 사진으로 초점을 맞추리라.
이미지가 적합하지 않을 때라면, 나는 침묵으로 만족할 것이다." - 안셀 아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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