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올해 4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한국은 사실상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고 발언했다. 시진핑의 역사 발언이 동아시아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크다. 한국인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역사적 사실에 바탕해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기고문을 작성했다. '동아시아의 역사와 시진핑의 역사' 기고문을 3편으로 연재한다.<편집자의 편지>


[기고]동아시아의 역사, 시진핑의 역사 1편 바로가기

[기고]동아시아의 역사, 시진핑의 역사 2편 바로가기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사진=대덕넷 DB>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사진=대덕넷 DB>
류밍푸(刘明福)는 2010년 벽두에 펴낸 '중국의 꿈(中國夢)'이라는 책에서 21세기 '중국의 마라톤'이 끝나는 날 지구상에는 가장 도덕적인 강국이 통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류밍푸의 비전을 빌자면 중국은 아시아에서 이미 '도덕적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스스로를 여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중국이 '일대일로'를 추진하면서 '운명공동체'를 얘기하고, '친親, 성誠, 혜惠, 용容'을 외교 노선으로 내거는 것으로 도덕적 강국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중국 아닌 다른 나라의 인식과 적쟎은 차이가 있다.

다른 세계인과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한국인은 적어도 지금 중국의 행동은 도덕적 강국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시진핑의 역사인식 표출은 바로 그 일단이 드러난 것으로 본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과거에는 공자나 맹자와 같은 훌륭한 사상가를 배출했고 현대에는 공자학원을 세워 중국의 소프트파워를 건설하려고 하지만 현 중국 지도부의 역사인식이 가져오는 결과는 그 의욕과는 다른 결과를 낳고 있다.

한편으로는 한국인과 세계 사람들은 이러한 중국을, 아편전쟁과 그 뒤를 이은 일련의 피탈역사 속에서 겪은 외상후증후군을 극복하지 못한 채, 세계 초강대국이 되기까지 전국시대나 근대 제국주의 시대의 약육강식 논리를 염두에 두고 병법에 따라 움직이고자 하는 거인으로 본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만하고 속 좁은, 지도력에 어울리지 않게 단기간에 훌쩍 커버린, 그 거인을 불안한 마음을 갖고 바라본다. 전문적 학자들의 과학적 논쟁이 아니라 국가기관의 선언으로 만리장성의 위치를 바꾸는 중국을 세계인은 무시하거나 조롱한다. 무시만 할 수 없는 한국인은 이러한 중국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은 애정과 우려와 안타까움이 한데 섞인 복합적인 것이다.

201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은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일본군을 공동으로 물리치던 진린(陳璘)을 한국과 중국 선린 교류의 예로 들었던 바 있다. 당시의 우호적 분위기에서는 조선-일본 7년 전쟁의 막바지에 이순신과 진린이 의기투합해 일본군을 격파한 사실만을 강조해도 좋았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지금 조선에 와서 거드름피우던 진린과 조선 분할 점령을 의제로 놓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강화협상을 하던, 조선의 안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진린도 상기하고 있다.

1992년 수교 이후 증진된 우호관계 덕에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통일을 방해한 '중공군'(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에게 '중공군'이란 동족상잔의 비극을 끝낼 수 있었던 기회를 방해한 훼방꾼이다)에 대한 적개심은 그 동안 수면 아래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상식적이지 않고 우려스러운 중국의 행동이 지속된다면 부지불식간에 한국전쟁 당시의 '중공군'에 대한 불쾌한 감정과 그 앙금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지금 한국인의 대다수는 서울대에서 양국 역사에 나타난 유대를 강조하던 시진핑과 천안문에 올라 붉은 군대의 군사행진을 사열하던 박근혜는 동상이몽의 극치였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시진핑의 제스처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미 이러한 인식이 퍼져 있는 것만으로도 한국과 중국 모두에게 충분히 안타까운 일이다.

아편전쟁 후의 굴곡진 100년의 중국 역사, 사회주의 중국이 건설된 후 지금까지 중국이 걸어온 과정, 현재 중국지도부가 애국심에 편승해 펼치는 정치와 그 근저의 의식을 보노라면, 춘추시대에 월왕 구천(句踐)이 복수 일념으로 오왕 부차(夫差)의 똥을 맛보면서까지 하인 노릇을 하고 월나라로 귀국한 후 쓸개를 핥으면서도 부차에게 서시(西施)를 바치고 백비(伯嚭)에게 뇌물을 바치며 오나라 궁궐 중수를 위해 좋은 나무를 골라 보내던 그 21년의 세월을 생각나게 한다.

그 처절함이 이해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중국이 진정으로 지도국이 되고 싶다면 지금은 아편전쟁 이후의 트라우마를 고대 국가와 같은 방식으로 해소하려고 하기보다는 심모원려를 해야 한다.

굴기를 꿈꾸는 중국지도자는 미국의 전략가 브레진스키(Zbigniew Brezinsky)가 미국의 '제국적' 권력에 대해 평한 바로부터 시사 받아야 할 바가 있다. 그러려면 우수한 조직, 대규모 경제적 기술적 자원을 신속하게 군사적 목적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중국적 삶의 방식이 심대한 문화적 호소력을 지녀야 하고, 중국의 정치사회적 엘리트가 경쟁력과 역동성을 지녀야 한다. 영토에 대한 부질없는 욕심이나 명분을 인정받기 어려운 무력시위는 그러한 경쟁력, 역동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히려 그것을 훼손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시진핑을 비롯한 왜곡된 역사인식을 가진 중국인들이 알아야 할 점이 있다. 한반도 남쪽의 역사 외에도 한민족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신라-고려-조선을 통해 만주에 관한 역사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한민족(예맥-퉁구스족)과 밀접하게 활동하던 다른 퉁구스계 종족이 세운 전연(모용선비족慕容鮮卑族이 세운 나라이다), 북위(탁발선비족拓拔鮮卑族이 세운 나라이다), 요나라(거란족契丹族이 세운 나라이다), 금나라(완안부完顔部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다), 청나라(건주부建州部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퉁구스계 종족과 한족과 각축하고 지내던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경영되던 그 기나긴 기간 동안 한족은 피지배계층이었다. 중원으로 간 정복왕조이든 아니든 만주와 내몽골은 한민족을 포함한 퉁구스계 종족과 몽골족이 주로 활동하던 무대였다.

시진핑의 역사지식과는 달리 이처럼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던 것이 아니라 중국의 일부가 한국의 일부였던 기간이 훨씬 길며 그에 대한 역사적 고증도 가능하다. 조공책봉의 역사와 화친정책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한족 왕조가 지나친 문화적 자부심에서 수사(修辭)로 포장한 용어이자 주변민족들과 무력충돌 없이 적절하게 공존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요 관행이었다. 이러한 제반 역사적 사실을 안다면 한국이 전통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는 말이 한국인과 세계 사람들에게 얼마나 부적절하게 들릴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 관계자들과 여러 차례 접촉한 바 있는 미국 랜드연구소의 브루스 베넷(Bruce W. Bennett)은 북한 급변 사태가 발생하면 난민수용소 설치 명목으로 중국인민해방군이 한반도의 병목 지대인 청천강~함흥 선까지 내달릴 수 있다고 진단했다(2017.3.21.일 고등교육재단 주최 세미나; 정용환 2017).

브루스 베넷은 중국 공산당의 괴뢰정부를 세울 요량이라면 중국인민해방군이 아예 평양 아래 남포~원산 선까지 밀고 내려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의중과 시진핑이 중미정상회담에서 한 역사발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한국민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 내부에 중국인민해방군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음은 알고 있다.

시진핑의 발언과 궤를 함께 하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생각은 위험하다. 자국 내 난민 유입 방지를 핑계로 한반도에 진군하고자 하는 중국인민해방군 지도부의 생각은 1890년 일본의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일본을 '주권선'으로 두고 한국을 '이익선'으로 두면서 대륙진출을 꿈꾸던 것과 닮았다.

90년 전,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은 '만주와 몽골지방에서 특수한 지위와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력행사도 불사한다'고 결정했다. 이때 일본 관동군은 한술을 더 떠(2차 대전 패전으로 항복문서에 조인하기 전까지 일본 군부는 내각의 구성원이었으면서도 내각 구성을 방해할 수도 있었으며 내각의 의사와는 달리 독자적인 의사결정을 하곤 했다) 만주 침략 빌미를 만들기 위해 친일적이었던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을 폭사시키고 중국 내부의 소행처럼 꾸미려고 했지만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북한 상황이 급변할 때 한반도에 진주하겠다는 중국인민해방군은 한국인들에게 90년 전의 일본 관동군을 생각나게 한다. 장쭤린 사후 그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국민당과 손을 잡았고 중국에서 배일(排日)운동도 격화되었다.

중국 현대사 속의 이 사건을 기억한다면, 중국인민해방군은 한반도에 진주하려는 시도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잃지 않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운 좋게도 청나라의 유산을 물려받아 오늘날 퉁구스계 종족의 터전인 만주와 내몽골을 지배할 수 있게 된 중국에게 을지문덕이 살수대첩 직전에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주었던 시(與脩將于仲文詩)'를 다시 보낼 준비하고 있는 한국의 군인들도 있다.13)

한족이 만주를 지배하는 최초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중국인민해방군은 만주지방을 점령하고 있는 역사적 우연만으로도 족한 줄 알고 부질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뜻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의 부적절한 행동은 오히려 한국민으로 하여금 만주의 연고권을 주장하게 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북한과의 공존과 평화통일을 위해서도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민은 난민 유입 방지를 빌미로 한반도에 진주하고자 하는 중국인민해방군을 좌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는 시진핑 주석의 말이 중국군의 한반도 진주를 위한 복선이라면 그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우리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있다. 이 헌법 조항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수차례에 걸친 헌법 개정 과정에서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중국의 한반도 진주 움직임이 감지될 경우 한·미 연합군이 이를 좌시하기보다 휴전선을 돌파해 압록강·두만강까지 북상해야 한다고 한국민은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은 이를 불행한 분단사를 극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한 상황이 온다면 한국민은 미국이 한국과 이해를 같이 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를 선택하고 지지할 것이다. 지금과 같이 미·중·일이 경쟁하는 상황에서라면 미국도 그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미래에 관한 불확실성의 원천이 100년 전과 달리 일본이 아닌 중국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한·미·일 3국은 지금보다 훨씬 더 긴밀한 협력관계를 추구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아직까지는 불행했던 근대사의 상흔을 극복하지 못하고 불편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

한일관계의 미래를 예측하는 전문가들은 본디 한일근대사 속 양국간 앙금은 세 세대나 100년은 걸려야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임계수준을 넘는 중국의 행동이 촉매역할을 함으로써 일본이 평화헌법 개정과 함께 보통국가가 되는 명분을 부여하고 한국과 일본 내 여론 변화를 가져오는 시기도 앞당겨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통해 양국의 민주정부 정치적 의사결정자들은 새로운 차원의 한일협력을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런 환경에서 한반도에 중대한 상황변화가 일어난다면 중국은 잠시 통일 한국을 묵인하는 것과 큰 전쟁을 무릅쓰고라도 군대를 진주시키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겠지만, 결국은 북한이 건설해 놓은 각종 군사시설과 함께 턱 밑에 핵을 보유한 통일 한국과 국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 한중 국경선은 중국에게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보다 더 답답한 국경선이 될 것이다. 동해와 태평양으로 가는 길은 그만큼 더 좁아질 것이다.

문화혁명에 대한 평가를 통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인이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음이 분명한 현대사의 사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부인하고 싶더라도 현대를 살아가는 중국인이 직시해야 하는 역사이다. 중국 인민을 열강의 식민 상태로부터 해방시킨 마오쩌둥이 집권 후에 택한 부조리한 방법은, 그가 당초 혁명을 추구하며 지녔던 매력적인 목표를 변질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애썼던 그 자신까지 오염시켰다. 196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에서는 약 300만 명의 당정 간부가 숙청되었다. 홍위병의 광란에 도저히 동조할 수 없었던 양식 있는 지식인들도 다수 희생되었다. 중화문화가 무엇이고 중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사후 그의 역사적 공과에 대해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문제 삼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중화의 영웅으로 남아 있다. 마오쩌둥의 공훈에도 불구하고, 문화혁명을 경험한 세대와 그 자손의 증언이 계속되고 있음을 볼 때 마오쩌둥이 수천만 명의 중국인민을 기아로 죽게 하고 그가 문화혁명으로 낙인찍어 죽이거나 폐인으로 만든 수많은 양식 있는 지식인들에 관한 역사적 과오가 과연 언제까지 계속 침묵의 창고 속에 갇혀 있을지는 의문이다.

강남 한족 선비들의 지지를 받고 드디어 유목민족 지배자를 몽골초원으로 쫓아냈던 주원장이 한족 왕조 명나라의 사직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일으켰던 피바람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를 보면, 마오쩌둥에 대한 현대인들의 평가가 미래에도 영원히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다. 마오쩌둥이 이러한 평가에 직면하게 된 이유는 부적절하게도 그가 스탈린을 닮으려 했던 데에도 기인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주원장을 답습하고 스탈린을 역할 모델로 삼은 마오쩌둥을 반면교사로 하여, 중국 지도자는 역할 모델을 잘못 설정할 때 어떤 역사적 결과가 나오는지 두렵게 생각해야 한다. 한반도를 향한 중국지도자의 부적절한 개입은 그를 역사 속에서 가지 말았어야 할 길을 간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한 일이 생긴다면 그 지도자뿐만 아니라 십중팔구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까지 함께 바뀌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시진핑의 역사 발언과 공산당의 거친 행동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서북지방에서 군정(軍政)을 주재하며 "군중의 갈채에 현혹되지 말라"던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의 유산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시중신과 후야오방이 영향력을 상실한 후 시진핑이 해마다 찾아 문안하던 '후 아저씨'(후야오방)의 유산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시중쉰이 북경으로 오기 전 서북지방에서 그의 명성은 한족은 물론 다른 민족에게도 전설이었다. 그의 북경 진출을 두고 '오마진경(五馬進京: 말 다섯 마리가 베이징으로 간다는 뜻인데, 시중쉰은 다섯 마리 말로 상징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이라며 온 중국이 떠들썩했고, 서북지방 민족의 항거를 무리 없이 수습한 그를 마오쩌둥은 제갈량보다도 한 수 위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북경으로 온 시중쉰은 개혁개방을 지지하고 몸소 실천했으며(그는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정책 추진할 때 광둥성 서기로 가서 최초의 경제특구인 선전深圳 특구를 성공적으로 조성해 냈다), 평생 고상한 인격과 곧은 절개로 민중과 함께 하면서 인간미를 잃지 않았다. 자신의 안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덩샤오핑에게도 세대교체를 주장하고 인치 아닌 법치를 주장하며 후야오방(胡耀邦)을 지지했다(相江宇 2012: 41). 시진핑은 1979년부터 해마다 후야오방을 찾았고 후야오방이 병사한 후에도 매년 그 집안에 인사가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그의 부친 시중쉰과 중국인이 존경하는 정치인인 후야오방의 유산에 걸맞지 않은 시진핑의 역사 발언을 한국민은 잊기 어려울 것이다. 통일 한국은 미국과 협의해서 미군을 철수시킬 수도 있고 북한보다 훨씬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완충지대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중국에 대한 신뢰가 공고해져 있어야 할 것이다. 팽창주의적 중국에 대해 한국민들이 경계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고, 한국과 중국에 불편한 상황은 지속될 것이다.

한국민은 요즘 자주국방을 위해서 '스스로 핵 대응능력을 갖추는 것이 불가피한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점점 더 자주하고 있다. 물론 국제규약과 핵확산 방지를 위한 국제사회의 규약이 한국의 핵무장에 호의적이지 않으며 그것을 바꾸는 일이 녹록지 않음을 한국민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비상한 상황이라면 그 불가피성에 대해 세계도 양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이 아무리 지금의 북한과 같은 완충지대를 갖고 싶어 해도 북한 체제가 오래갈 수 없는 체제임은 명확하다. 결국 중국은 한국과 국경을 맞대게 될 것이다. 중국이 지금과 같은 보조(步調)를 거듭하면 한국도 자구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에 따라 중국은, 시인도 부인도 않은 채 핵탄두를 다수 가진 국가를 턱 밑에 두는 운명을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모델을 도입하고 일당 독재 체제로 국가를 운영하는 중국 공산당은 주기적으로 애국심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이러한 체제에서 애국심은 외교적 긴장과 국내 정치가 혼란할 때 사용하는 전가의 보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정치는 권력 붕괴를 막기 위한 중독성 주사와 같은 것이라고 본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과시적으로 불매행위를 내 보이는 중국인의 행동을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자 우려스러운 행동으로 본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반식민지 시대의 불매운동은 제국주의에 저항하던 수단이었지만 21세기의 그것은 규범을 선도하고자 하는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몽니라고 본다.

시진핑의 역사발언과 함께 난민발생을 빌미로 한반도에 진주하려는 중국 군부의 의도는 한국민이 중국에 대해 지닌 생각의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그 중에는 한국 정부도 어찌할 수 없는 민심 변화가 적지 않다.

공공·민간 외교의 장에서 대만에 대해 훨씬 배려를 해야 한다는 한국인도 늘어나고 있다. 달라이 라마가 한국에 오는 것을 한국 정부가 막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과 중국이 신장지역과 티벳지역을 지배하며 탄압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도 늘어나고 있다. 티벳과 신장의 민족주의 운동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공감대도 시나브로 확산되고 있다.

만주사변 후 일본 군국주의 정부는 집단 농업 이민과 만몽(滿蒙)개척 청소년 의용군 등을 조직하여 많은 농민을 정책적으로 만주 농촌으로 이주시켰다. 당시 중국 농민은 토지를 빼앗겼다. 중국 정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부정하겠지만, 지금은 빼앗는 사람이 한족이고 빼앗기는 사람이 몽골, 티벳, 신장 원주민이라는 것이 다를 뿐 내몽골과 티벳 신장에 일어나고 있는 일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한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왜곡된 역사관은,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스스로의 확신에서 말미암은 것이든, 경제적 이익을 매개로 한국의 자주성을 훼손하려 할수록 한국 내에서 이러한 지식을 확산시키고 그러한 목소리를 키울 것이다.

투자자 국가 제소(Investor-State Dispute)를 검토한다거나14), 중국으로 관광을 가지 않는다거나, 불안을 느끼는 한국 기업들이 중국 이외의 다른 생산기지와 시장을 찾고 있다. 한국의 노무현대통령이 중국에게 선물처럼 인정해 준 시장경제 지위는 철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한국민도 늘고 있다. 보수 정부이든 진보 정부이든 권위주의 틀을 벗어난 한국정부는 중국에게 명실상부하지 않은 지위를 인정하지 말라는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롯데가 중국에서 철수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국가투자자 제소조항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라는 요구도 일 것이다. 중국어선의 불법조업은 물론 중국을 발원지로 하는 오염물질에 대해 좀 더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한국민도 늘고 있다.

대북관계에서 중국이 기대한 역할을 해 주지 않자 박근혜정부가 시진핑정부에게 별다른 통보 없이 사드를 배치했고 중국은 그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고 보고 애써 중국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한국민들도 일부 있는 반면, 미국·일본과의 경쟁 구도 속에서 한국을 길들이려는 실마리로 삼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민이 지배적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인들은 이번에 중국의 요구를 들어주면 중국의 부당한 압박이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한국 내 여론 변화는, 한국 정부가 모종의 조처를 실행에 옮길지 여부를 떠나, 앞으로 한중관계를 긴장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

애국심 정치가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미봉적으로' 결집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드배치와 같은 주권사항을 두고 중국이 한국의 신정부에서까지 마찬가지의 태도를 지속한다면, 한국민들은 중국이 설득력 없는 역사인식 속에서 미국·일본과 패권경쟁을 하기 위해 불순한 압력을 행사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될 것이다.

중국의 외교부장 왕이(王毅)는 사드배치를 두고 "한국이 스스로를 해치는 길"이라고 했는데(중앙일보 2017.5.5.) 다수의 한국인은 그 뒤 중국이 보인 행동이 결국 중국 스스로를 해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공산당 내부에서 엘리트 순환 체제를 통해 역량 있는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중국의 현행 지도자 선출방식은 어느 면에서 상당히 민주적이다. 중국정치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근간 특성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경험을 지니고 민주화된 나라에서 사는 한국인들은 일당독재체제가 지닌 한계가 존재한다고 본다(중국 공산당은 독재라는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사람들은 그렇게 본다). 정보의 흐름은 제한받고 견제와 균형의 원리도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훌륭한 지도자가 효율적으로 정책을 집행하는 데에는 좋을 수 있으나 천문학적 액수의 부정부패는 근절되기 힘든 체제가 지속되리라고 본다. 지금도 부정부패와 권력남용을 비판하는 시위가 농촌 지역에서 빈번히 일어나지만 그것은 권위주의적 정부에 의해서 통제되고 축소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현상을 인식하고 중국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함을 물론, 중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매력적인 것으로 변모시키는 데 상당한 자원을 투자해 왔다. 외교, 무역, 국제 언론, 문화 교류, 교환학생 제도의 활성화, 공자학원 등을 통해 '중국식 가치'를 홍보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노력의 파급효과는 제한적이다. 여전히 많은 세계인들이 중국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갖고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현재 중국이 사드배치에 대해서 취하고 있는 보복행동과 같은 것이다. 교묘하게 민간부문을 부추겨 한류드라마와 영화 수입금지, 조수미 입국 거부, 롯데 세무조사·안전점검 등으로 한국을 압박하면서도(이는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달라이라마를 접견하자 중국 지방정부가 프랑스 유통기업 까르푸르에 가하던 압박과 흡사하다) 중국 외교부의 왕이(王毅)부장이나 화춘잉(華春瑩)·루캉(陸慷)대변인은 중국정부가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행하는 위협적 발언은, 중국 정부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관료집단 내부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주기도 하거니와, 중국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중국이 행하는 투자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손상시키고 있다.

중국은 장구한 역사 속에서 찬란한 문화를 일궈내고 보존했다. 그리고 지난 삼천 년 동안 유목민족 왕조와 한족 왕조가 중원에 번갈아 일어나고 쇠망하는 가운데서도 놀라운 통합의 힘을 발휘했다. 그 통합의 저력이야 말로 중국의 역사, 한족의 역사에서 세계인이 경이롭게 바라보는 점이다.

반면 최근 십여 년 간 중국정부가 보이는 행태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볼 때 중국의 현대 문화는 한국의 문화보다 더 포용적이고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중국정부가 통제를 해도, 일부 극단적 국수주의자들이 볼성사나운 선동을 해도, 중국인의 한국문화에 대한 소비가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역류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한국 문화 유입을 억제한 결과도 중국정부가 원하는 바와는 다를 것이다. 중국정부가 애를 쓰지만 외부자들은 그러한 광경을 보며 속으로 조롱하거나 우려하는 마음을 가질 뿐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발전 과정을 많이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이후 한국의 발전모델을 연구하고 중앙정보부의 역할까지도 연구해 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괄목상대할 만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비대칭적으로 굴종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압력은 중국의 소프트파워 증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국의 인권을 문제 삼는 외국에게는 내정 간섭을 말라고 강하게 반발하면서도, 주권국의 허락 없이 군대를 진주시키겠다는 의지는 스스럼없이 표명하는 중국 정치가들의 모순된 언행은 한국민과 세계인들에게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지금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사람들만큼 1980년대에는 일본을 염두에 두고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영고성쇠가 순환하는 원리가 역사법칙의 일부이긴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은 막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상응한 정치적 지도력으로 바꾸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적 영향력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정치적 영향력으로 진전시키는 일은 결코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거처럼 군사적 패권을 추구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중국은 현재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나라도 원하도록' 만드는 힘이 부족한 나라다. 즉 '소프트파워'가 부족한 나라다. 세계인들은 이 사실을 아는데 중국인들은 이를 모르는 것 같다. 적어도 모르는 척 행동하는 것 같다. 아시아의 병자로 일컬어지던 반식민지 상태의 100여 년 전 중국과 강력한 자주국가로 역사적 귀환을 한 오늘날의 중국을 보면 실로 극적이고 인상적이다. 현재 중국은 G2로 일컬어질 만큼 주목받는 국가로 성장했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나라 사람들의 호감을 살 만큼 매력적인 나라는 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중국 내에서는 시진핑의 신중함을 자타가 인정하고 있는 만큼, 역사적 사실과도 다르고 외교적으로도 한국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시진핑의 발언이 트럼프를 통해 예기치 않게 발설되었을 때 중국 정부는 충분히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시진핑 발언의 진위여부를 질문받자 ‘한국 국민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즉답을 피한 중국 외교부 대변인 루캉의 답변이 그것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다. 당황스러운 상황이 다시 반복되지 않으려면 생각의 근저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최근에 중국으로부터 겪은 일련의 일들에 비추어 한국민은 적절한 변화를 도모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을 지켜볼 것이다. 시진핑과 중국은 트럼프가 신중하지 못하게 발설한 점을 탓하고 싶겠지만, 문제의 근원이 트럼프의 발언이 아니라 시진핑과 중국공산당 지도부와 군부의 위험한 역사 인식에 있다는 점은 중국 스스로도 알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와 북경 근처까지 진출하지 못했던 송나라는(북경을 최초로 수도로 삼은 중국왕조는 북방의 유목민족 왕조인 원나라이다. 오랜 옛날부터 그 지역은 주로 유목민족의 활동무대였다) 금나라와 요나라가 두 나라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싸울 이유도 없었고 싸울 계기도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과 국경을 맞댄 중국 왕조 중 한국과 전쟁을 하지 않은 왕조는 명나라가 유일하다. 명나라 건국 당시에도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장군이었던 시절, 그가 요동을 향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덕에 고려·조선과 중원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던 명은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명나라는 화친 정책으로 조선과 평화를 이어갔다. 그런가 하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던 수나라는 그 후유증으로 제 풀에 무너졌다.

중화문명을 다시 창달하고 싶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인민해방을 위해 태어났던 군대가 어느 길을 갈지에 대해서 많은 한국인과 세계인이 궁금해 하고 우려하고 있다.

지금은 21세기이고 중국이 인정하고 싶든 그렇지 않든 중국은 종전 후 진화해 온 국제질서에서 아직 주도적 위치에 있지 못하다. 그래서 중국은 더욱 중국식 표준을 얘기하며 서구나 주변국의 중국 경계나 혐오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국제적 논의의 장에서 보이는 중국 대표들의 거침없음은 불편한 감을 줄 정도이다. 그러한 태도들에 적극적으로 언급하며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계인들이 그러한 태도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는 않지만 중국이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군사력을 증강해서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패권을 확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중국식 발전 모델이 성공을 거두면서 민주주의, 인권과 같은 서구의 소프트파워를 대체하는 국제적 지도 원리를 확립하는 일은 있기 힘들어 보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에는 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을 이어 다른 회원국이 당분간 나올 수 없다는 공감대가 존재한다. 이 사실은 중국 경제의 일취월장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장래에 중국이 소프트파워를 가진 국가가 되기 어렵다고 예측하는 세계인이 대부분임을 시사한다. 개명된 시대라는 21세기에 큰 문제의식 없이 이웃국가에 군대를 진주시키겠다는 무람된 의사를 중국정부의 의사결정자들이 공유하고, 나아가 그런 의사를 표명한다는 사실은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드넓기만 한 영토가 개방적 문화나 소프트파워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21세기를 사는 한국인과 세계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렵다.

한국민은 시진핑의 역사발언을 공유하는 중국의 정치인과 인민해방군을 이렇게 보고 있다. '화려한 수레를 갖고 있으면서도 남의 헌 수레를 훔치고, 수를 놓은 비단을 갖고 있으면서도 남의 거친 삼베옷을 훔치는 것'과 같다고 보며, '5천리의 땅으로 욕심을 부리며 5백리의 송나라 땅을 엿보던 초나라'와 같다고 본다.15)

전국시대 초기, 전설적 목수 공수반(公輸般)이 만든 운제(雲梯)로 송나라를 도모하려던 초나라 혜왕(慧王)은 묵적(墨翟)에 설복되어 결국 송나라 공격을 멈추고 낭패를 면했다. 하지만 한강자(韓康子), 위환자(魏桓子), 조양자(趙襄子)에게 1백리씩을 내놓으라며 과욕을 부리던 진(晉)나라의 지백요(智伯瑤)는 오히려 세 사람의 연합으로 멸문당하고 한 때 춘추시대 패자였던 진(晉)나라는 그 후 셋으로 쪼개졌다.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고 양국이 합의한 공식적 관계와는 상충되게 전략적 갈등관계를 보이고 있는 한국과 중국 수교 25주년 시점, 한국에서는 양국 간의 현재 갈등이 단순한 성장통이길 바라며 덕담을 건네려는 논자들이 담론을 내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민낯을 보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말을 아끼고 있다.

역으로 중국으로부터는 여전히 한국을 길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서해바다를 건너오고 있다. 한두 사람의 다른 의견이 가녀리게 들리기도 하지만 양식 있는 대다수는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인과 세계 사람들은 이와 같은 침묵을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강요된 침묵이라고 보며, 중국이 충분히 민주화되어 있지 않은 데 기인한다고 본다. 그래서 중국이 충분히 민주화되고 다원적 담론이 꽃필 때까지 한국인과 세계인의 우려는 지속될 것이다.

역사를 보감(寶鑑)으로 부르는 이유는 그 안에 어리석음과 현명함을 함께 깨우쳐주는 지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는 과거의 패권주의 시대를 영광스런 시대라고 잘못 알고 그 흔적을 찾기 위해 역사를 뒤적이는 사람이 늘어나고, 때로는 있는 일을 없다고 부정하고 없던 것을 있는 것처럼 조작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서로를 증오하며 없어지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스스로가 상대방의 존재감을 더 부각시키는 줄은 정작 모르고 있다. 한국인이 중국의 문자와 문화를 비교적 격의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세계인 중 일부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최근 움직임과 그것을 지배하는 사고의 근저는 우려스럽다.

압제와 제국주의로부터 중국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대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켜낸다는 소명감으로 참여한 한국전쟁, 그 전쟁이 결국 스탈린의 꼭두각시군대 노릇을 했던 것으로 밝혀진 지금, 장진호 전투를 비롯한 숱한 전투에서 죽은 수많은 동료 가운데서 살아남은 중국의 노병은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전쟁이었는지 체감하고 다시는 그런 전쟁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난하이(中南海, 베이징의 고궁故宫 서측에 있는 2개의 연결된 호수, 중국 국무원国务院 등 중요 기관이 소재한 곳)의 ‘지도자(領導)’들은 어리석은 역사의식의 최면 속에서 유사한 일을 예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일이 현실화되면 그것은 곧 현 집단지도체제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고 후세인들은 현재의 중국 집단지도체제 시대를, 역사 속에서 냉소적이고 부정적 의미를 지닌 채 묘사되고 있는, ‘과두정치 시대’와 동의어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기원전 372년에 태어난 맹가(孟軻)는 이렇게 말했다. "패자(覇者)는 무력으로 인정을 가장하는 자를 가리키고 왕자(王者)는 덕으로 인정을 베푸는 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패자가 되려면 큰 나라를 소유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왕자는 꼭 큰 나라를 지닐 필요가 없다. 탕(湯)임금은 70리의 나라로 왕자가 될 수 있었고 문왕(文王)은 100리의 나라로 왕자가 될 수 있었다. 무력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존중하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경우 복종하는 자는 힘이 약해서 그러는 것뿐이다. 그러나 덕으로 승복시키는 자는 마음속으로부터 기뻐서 따르게 한다".16)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민들이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않은 의중의 일단(一端)과 변화하고 있는 한국인의 대(對)중국관 한 모퉁이를 여기서 전했다. 이미 수만 리의 광활한 영토를 갖고 있는 중국은 패자의 길을 지향할까 왕자의 길을 지향할까. 한국민은 세계와 함께 지켜볼 것이다.
 

◆각주

13) 1,400여 년 전 100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한 수나라 장수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을지문덕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신비로운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꿰뚫었고(神策究天文), 기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다 깨쳤네(妙算窮地理), 싸움에서 이겨 공 이미 높으니(戰勝功旣高), 족한 줄 알고 그만 그치는 게 어떤가(知足願云止).

14) 외국투자기업이 현지 정부의 불합리한 정책이나 차별대우, 협정 및 계약 위반 등으로 인해 손실을 입었을 경우 해당국 법원이 아닌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제소하여 보상을 청구하는 제도를 가리킨다. FTA 협정을 체결할 때 투자자유화 촉진과 투자자 보호를 위하여 도입한다. 한중FTA에서도 도입한 조항이다. 비록 중국정부가 법에 의한 것이라고 강변하고는 있지만 중국 정부의 롯데 탄압은 투자자 국가 제소 사항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15) 전국시대 초나라 혜왕에게는 노나라에서 초빙한 공수반이라는 탁월한 목수가 있었다. 혜왕은 송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공수반에게 빠른 시일 내에 성을 공격하는 도구인 운제를 많이 만들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묵자는 초나라에 가서 혜왕을 만나 이렇게 말한다. "초나라는 사방 5천리의 땅으로 물자도 풍부하고 땅도 비옥한 반면 송나라는 사방 5백리에 물자도 부족하고 땅도 척박합니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취하려는 것은 화려한 수레를 갖고 있으면서도 남의 헌 수레를 훔치고, 수를 놓은 비단을 갖고 있으면서도 남의 거친 삼베옷을 훔치는 것과 같습니다 ([墨子 公輸 2] 舍其文軒,鄰有敝轝,而欲竊之;舍其錦繡,鄰有短褐,而欲竊之... 荊之地,方五千里,宋之地,方五百里 ...)." 초 혜왕은 묵자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운제로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보고 송나라 공격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묵자는 운제로 공격한다고 해도 성공할 수 있음을 실연해 보여줌으로써 초 혜왕이 송나라 공격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16) [孟子 公孫丑上 3] 孟子曰:「以力假仁者霸,霸必有大國,以德行仁者王,王不待大。湯以七十里,文王以百里。以力服人者,非心服也,力不贍也;以德服人者,中心悅而誠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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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17.05.05.일, "중화(中華) 민족주의에 기댄 불매운동의 역사...승자는 없었다".

Washington Post April 19, 2017, "Trump’s claim that 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 Fact Checker.

◆아래의 중국사서, 만주원류고, 제자백가 등의 원문은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Chinese Text Project) 홈페이지에 등재된 전자문서에서 인용하고 권수, 편명, 문단번호도 그에 의거함. 예컨대 '舊唐書 卷二百一十一 34'에서 숫자 '34'는 http://ctext.org가 제공하는 문서에 부여된 문단 번호임.

司馬遷, '史記'.
魏收, '魏書'.
沈約, '宋書'.
蕭子顯, '南齊書'.
魏徵ㆍ姚思廉, '梁書'.
劉昫ㆍ趙瑩, '舊唐書'.
歐陽脩ㆍ宋祁, '新唐書'.
司馬光, '資治通鑑'.
乾隆帝, '欽定滿洲源流考'.
孟軻, '孟子'.
墨翟, '默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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