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업계 리더에게 듣다 ④]김기문 포스텍 교수
김 교수 "연구는 현장, 불꺼지지 않는 연구소 당연하다"
"연구 막는 부처이기주의 없어지고 대선주자 진심어린 관심 필요"

쿠커비투빌 연구 대가 김기문 교수. 그는 "연구를 방해하는 부처이기주의는 사라져야 하고 연구자들은 변화를 위해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한다.<사진=길애경 기자>
쿠커비투빌 연구 대가 김기문 교수. 그는 "연구를 방해하는 부처이기주의는 사라져야 하고 연구자들은 변화를 위해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한다.<사진=길애경 기자>
"부서간, 부처간 과제가 맞물려 있을 경우 부처 이기주의로 연구자들을 어렵게 한다. 출연연도 이에 못지 않을 것이다. 이런 행정은 없어져야 한다. 변화를 위해 과학계도 함께 목소리를 내고 대선 주자들은 다음 정권에 앞서 과학계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다면 노벨상은 물론 산업계 발전도 이어질 것이다."

"연구자는 성과로 평가된다. 자신의 사이언스가 확고한 위치에 오르기 전까지 연구소에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한다. 연구비는 국민의 세금이라는 원칙에 의해 아껴쓰고 연구자는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 

화학연구의 거장 김기문 포스텍 교수는 대한민국의 미래, 과학계의 미래를 위해 이같이 고언했다.

연구자로, 후학을 양성하는 스승으로서 남다른 발자취를 걷고 있는 김기문 포스텍(POSTECH) 교수(IBS 복잡계 자기조립 연구단 단장).

우리나라 대학 기준으로 은퇴를 앞 둔 63세의 나이지만 세계적 수준의 교육과 연구성과를 이룩한 교원에게 주어지는 포스텍 유니버시티 프로페서(POSTECH UniversityProfessor)에 선정되며 그의 정년은 70세로 미뤄졌다.

또 2012년 IBS 연구단장에 선임되면서 제자들과 같이 여전히 늦은밤까지 연구하고 토론하며 연구열정을 불태우는 과학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의 주인공이다.

제자들에게 맡기고 조금 느슨하게 정리하는 삶을 유혹받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 교수는 "'국민의 세금을 더 쓴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합성 연구 분야 과학 선진국들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는 해야한다. 중국과 일본의 과학자들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학회도 토요일과 일요일에 한다"고 거침없이 답한다.

그는 이어 "일부에서 주장하는 불이 꺼지는 연구소가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맞지만 자신의 사이언스에 대해 확고한 위치에 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겉멋으로 보인다. 특히 합성연구는 종이 위에 쓰는 것이 아니라 실험이기 때문에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자들이, 이공계 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은 연구자로 꼽는 것은 물론 노벨상 수상에 근접한 한국 연구자로 이름이 오르고 있는 김기문 교수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 유신 시위로 제적됐다가 우여곡절 끝에 복학, 사회기여 위해 연구자 길 선택

김 교수는 서울대와 KAIST를 거쳐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얼핏보면 순탄한 엘리트 코스다. 하지만 그가 화학 연구자로 들어서는 결정적인 계기는 옥고를 치르면서 시작된다.

그가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시기다. 중학교 때 담임 교사가 물상수업을 맡으면서 시험관에 이런저런 약품을 넣고 산소가 발생되는 실험을 보여줘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뚜렷한 목표가 없어 재능이 있었던 미학과로 전과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던 1973년 가을, 유신헌법이 선포된지 1년. 많은 대학생들이 독재정치라며 유신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구속당하고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김 교수 역시 유신헌법 반대시위에 나섰다. 학교에서는 제명통보를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미성년자로 분류되면서 형무소에서 한달간 옥고를 치르고 복학하게 된다. 

그는 형무소에 있는 동안 인생의 밑그림을 다시 그렸다. 그리고 정치는 못할 것 같다는 결론과 함께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 사회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과학자의 길을 선택한다. 이후 그는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화학 분야 공부와 연구에 전념하며 단 한 번의 한 눈도 팔지 않고 한 길을 걸어왔다. 

김 교수는 "처음 입학했을때는 우리나라 경제나 정치 상황이 너무 암담해 기초과학을 한다는 것이 사치처럼 생각돼 방황하기도 했었다"면서 "하지만 형무소에서 있다보니 내가 정말 잘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목소리를 냈을 때 영향을 줄수 있을까 등을 고민하다가 가장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화학으로 결정했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고 소회했다.

열심히 한 만큼 좋은 스승도 많이 만났다. 김 교수는 "많은 분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는데 지남이 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면서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던 콜만 스탠퍼드 대학 교수를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꼽았다.

콜만 교수는 평생 보직을 거부하고 연구와 교육에 몰두했다. 노벨상을 받을 만큼의 성과도 냈지만 노벨상을 받은 제자 2명을 배출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8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김 교수는 "콜만 교수는 제자들에게 항상 큰 그림을 가지고 중요한 문제에 열정적으로 도전하라며 격려해 주셨다"면서 "국내에 귀국해 연구주제를 잡으면서 스승에게 배운것을 이어서 하는 대신 남들이 안하는 것을 찾았다. 그때는 인터넷이 안돼 매주 도서관에 가 저널을 보는게 일상이었는데 거기서 쿠커비투릴(Cucurbituril)을 처음 알게돼 연구해보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 남들 안하는 연구 주제 잡아, 5년간 성과 없어 마음 고생도

김 교수는 부친이 붓으로 직접 써준 서산대사의 시 '눈 덮인 벌판을 함부로 걷지마라. 오늘 내 발자국이 뒷사람에겐 이정표가 될 것이니'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스승으로서 연구자로서 남다른 길을 가고 있다.<사진=길애경 기자>
김 교수는 부친이 붓으로 직접 써준 서산대사의 시 '눈 덮인 벌판을 함부로 걷지마라. 오늘 내 발자국이 뒷사람에겐 이정표가 될 것이니'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스승으로서 연구자로서 남다른 길을 가고 있다.<사진=길애경 기자>
김 교수는 1988년 포스텍에 부임했다. 제자들 앞에 서는 그에게 부친은 '눈 덮인 벌판을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 발자국이 뒷사람에겐 이정표가 될 것이니(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라는 서산대사의 시를 직접 붓으로 써주며 당부했다. 이 글은 김 교수의 인생에 각인되며 평생 좌우명이 됐다.

남다른 소명의식으로 교직에 부임한 그는 박사후 연구과정에서 했던 연구 대신 그동안 제대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주제들에 도전했다. 

스스로 기준도 정했다. 논문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개념적으로 새롭고 창의적인 연구에 집중하겠노라고. 그러면서 쿠커비투릴을 연구주제로 정한다. 

"쿠커비투릴은 1905년 독일에서 처음 합성됐는데 구조를 포함 그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다. 1981년 미국 윌리엄 목(William Mock)박사는 이 분자가  글리코루릴 6조각이 메틸렌기로 연결된 거대고리 분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속이 빈 호박처럼 생겼다하여 쿠커비투릴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그 뒤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아 관심이 갔다."

하지만 5년 내내 성과가 없어 마음 고생을 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새로운 연구를 하겠다고 큰소리는 쳤는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쿠커비툴릴 물질에 대해 무수한 실험을 했지만 성과가 나오지 않아 힘들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쿠커비투릴은 자기 조립을 통해 만들어지는 초분자의 일종이다. 강산성에도 구조가 바뀌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인 화합물이며 미국의 연구자에 의해 속이 빈 호박모양의 분자 6개로 이어진 고리 화합물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졌다. 

김 교수는 "물질을 활용하려면 용해 시켜야 한다. 하지만 쿠커비투릴은 너무 안정적인 구조로 강산에서만 녹아 활용도가 낮았다. 유도체를 만들어 실험했는데 계속 실패했다"고 회고했다.

반복되는 실패로 자신감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안식년을 맞아 MIT를 방문한 그는 다른 연구 주제를 찾아 볼 생각까지 하게된다. 하지만 학생들과 매주 주간보고를 통해 소통하며 쿠커비투릴 연구는 지속됐다. 그러던 중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됐다. 그렇게 안 녹던 쿠커비투릴이 소금물에 스르르 녹는 것이 아닌가.

안식년에서 돌아온 김교수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쿠커비투릴을 이용해 작은 분자를 가두고 내보내는 '분자용기'를 개발했다. 연구에 속도가 붙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김교수는 쿠커비투릴을 '분자구슬'로 이용해 '줄줄이 사탕' 모양의 1차원 폴리로택산 그리고 구슬이 벌집 모양의 그물망에 꿰어진 2차원 폴리로택산을 합성했다.

김 교수팀은 1996년 쿠커비투릴을 이용해 암세포 등 원하는 부위에만 작용하는 나노캡슐, 몸속 세포에서 특정한 성분만을 찾아내는 바이오센터, 이산화탄소 흡착물질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미국 화학학회지에 2편의 논문이 게재되며 쿠커비투릴 연구에 큰 획을 긋는다.

그는 "쿠커비투릴 동족체에 관한 논문이 미국학회지에 발표되고 지금까지 1000회 가까이 인용되며 관련 연구가 확산됐다"면서 "매년 전세계에서 발표되는 쿠커비투릴 논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2009년 쿠커비투릴 학회가 조직되어 매 2년마다 학회가 열리고 있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연달아 1997년 1월에도 논문이 발표되고 3편의 논문 중 2편이 미국화학학회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C&EN에 하일라이트로 게재되며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 국내 연구성과 중 처음으로 C&EN에 소개되며 국내 과학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모교의 스카웃 제의도 이어졌다.

물론 김 교수는 거절했다. 많은 이들이 서울행을 선택하기도 했지만 그는 좌우명처럼 함부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으며 연구에 충실했다.  

◆ 연달아 국책과제에 선정되며 굵직한 성과 이어져

"1997년 IMF 사태가 발생했는데 당시 정부에서는 계획대로 창의과제를 진행하고 다른쪽 예산을 줄여 첫해 10억원을 지원해줬다. 다른 연구자들은 연구비 사정이 나빠져 혹독한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안다. 상대적으로 특혜을 받았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연구에 더욱 집중했다."

김 교수는 막중한 부담감에 연구에 더욱 매진한다. 그러면서 2000년 창의적연구진흥사업단 최초로 유명 과학저널 '네이처'에 2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간단한 유기분자를 금속이온으로 연결해 '키랄 다공성 물질'을 합성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키랄 물질은 거울상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이성질체가 존재하는데 김 교수팀은 하나의 이성질체만 골라 만드는 원리를 보여주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의 연구성과가  산업체에서 활용될 경우 무해성을 검증하는 공정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김 교수팀의 논문은 2-3년전까지도 한국인 과학자가 쓴 논문 중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논문을 준비할 당시 중국에서 학회가 있어 참석자 모두 일정을 마치고 황산 투어에 나섰는데 제자들만 일하라고 하고 혼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바로 귀국했다"면서 "논문을 마무리하는 6개월간 모두 지옥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좋은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지금도 같은 상황이면 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그 성과 이후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고 많은 연구자들과 교류도 있었다. 특히 일본의 과학자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 지난해 노벨상화학상을 받은 장피에르 소바주 교수, 프레이저 스토다트교수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면서 "연구자는 연구성과로 평가된다. 그리고 성과가 있기전까지 실험은 계속되어야 하고 늦도록 실험실에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의 연구방향도 여전히 초심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표된 논문이 273편으로 많지 않지만 스스로 정한 기준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김 교수는 연구에 몰입하며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도 살짝 표현했다. 그는 "아이들이 어릴때는 집에가서 아이들과 저녁 식사하는게 전부였다. 저녁시간에 가장 집중이 잘돼 식사 후 연구실로 나와 늦도록 논문을 쓰거나 수정한다"면서 "연구에 바빠 다른 분야는 잘 생각하지 못했는데 은퇴 후 그림을 그리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고 기대했다.

◆ 노벨상 지속해 받는 일본 분명히 배우고 우리 모델 만들어야

김기문 교수.<사진=길애경 기자>
김기문 교수.<사진=길애경 기자>
김 교수는 지속적으로 한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하지만 지난해 자신의 연구분야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고 고백했다.

2016년 노벨화학상은 분자기계를 구현한 장피에르 소바주 프랑스 스트라부르대 교수, 프레이저 스토더트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 베르나르트 페링하 네덜란드 흐로닝언대 교수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김 교수와 같은 초분자 화학 분야의 연구자다. 소바주 교수는 1983년 고리형태의 분자 두 개가 기계적으로 맞물려 있는 카테난이라는 초기 분자 기계를 개발했다. 영국 출신인 스토더트 교수는 1991년 분자 막대 하나와 분자 고리 하나를 연결시킨 로택산이란 분자를 분자 기계로 한 단계 발전시켰다.

김 교수는 "우리도 분자기계에 대한 연구를 잠시 했었지만 그들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뭘했을까, 나중에 사람들은 뭘 기억해줄까 다시 생각해봤다"면서 "다른 노벨상이 한건만 잘해서 받는다면 노벨화학상은 한 가지 주제에서 발전 단계마다 기여한 사람이 받게된다. 지난해 수상자들이 그런 분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우리분야가 받아 기쁘기도 했지만 우리도 나름 기여했지만 받지못해 아쉬움도 있었다"면서 "우리나라 과학계의 연구 문화는 서양을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만의 모델을 만들어야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일본과 중국의 사례를 들었다. 김 교수에 의하면 일본과 중국의 연구자들은 토요일에도 연구에 집중한다.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학회도 일요일에 열 정도다. 일본은 2000년부터 지속적으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다. 

김 교수는 "그처럼 열심히 하는 그들과 경쟁하려면 연구소에 불이 꺼질 수 없다. 일본도 위계질서가 무척 강하지만 개인의 창의력은 존중하며 힘을 모은다. 그들 시스템의 장점"이라면서 "우리나라의 경직된 연구문화와 권위의식 등은 분명 바꿔야 한다. 그리고 겉멋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만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젊은 연구자들 중에도 열심히 잘하는 친구들도 많다. 열심히 하고 좋은 논문을 내면 국제적으로도 금방 알려진다"면서 "우리 연구문화도 잘하는 사람이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기회를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와 관료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김 교수는 "일부 부처는 여전히 부처 이기주의가 우선하며 연구과제 진행을 막거나 아예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과학계와 우리나라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새정부에서는 부처 이기주의에 의한 행정은 근절돼야 한다.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진심으로 과학계를 생각하고 격려하면 노벨상은 물론 산업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렇게 변할 수 있도록 과학계도 한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최근 김 교수는 쿠커비투릴을 이용해 특정 단백질만 고순도로 분리·정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사하' 약물을 변형해 만든 분자를 분자 미끼로 사용해 특정 단백질을 얻을 수 있는 '단백질 낚시법'으로 약물 부작용이 최소화된 신약개발에 도움이 될 전망이다.

김 교수는 여전히 토요일에도 제자들과 만나 연구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연구에 몰입한다. 매주 70시간씩 연구실에서 보낸다. 그의 열정과 행보는 과학자로서 스승으로서 후배와 제자들에게 남다른 이정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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