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수석 출연연연구발전협의회 총연합회장

글: 양수석 출연연연구발전협의회 총연합회장
글: 양수석 출연연연구발전협의회 총연합회장
최근 한국을 방문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코스털리츠 교수는 "모든 연구자들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연구하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성과가 전혀 사회에 사용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과연 한국 과학기술을 담당하는 정부 관료들은 이 말을 인정해 연구자들을 신뢰하고 그 결과를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한 연구자의 연구를 40년간 지원해 줄 수 있을까?

이런 신뢰에 바탕을 둔 계속적이고도 안정적인 연구지원이 없는 풍토에서 노벨상을 받는 연구자들이 탄생하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망상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과학기술 분야마다 결과가 만들어지는 시간은 다르다. ICT와 같은 분야는 2년, 3년마다 기술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ICT 분야는 기술 발전의 속도가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산업과 밀접하게 연계해 연구개발이 진행돼야 하고 그 결과도 기업 이윤과 성장으로 곧바로 나타난다. 반면 물리학, 화학과 같은 자연과학 그리고 생명공학과 천문우주학과 같은 공학 분야의 연구개발은 연구 개발의 주기가 20년, 30년은 된다.

즉 ICT 분야와 비교하면 10배, 20배정도로 성과 주기가 차이가 난다. 한국의 25개 출연연 연구 분야를 살펴보면 천문, 지질, 생명에서부터 철도, 항공에 이르기까지 연구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또 같은 공학분야라 할지라도 분야마다, 기술의 형태마다 그 소요되는 시간이 다르다. 예를 들어, 우주분야에서 발사체나 위성을 개발하기 위한 체계개발은 5년, 길어야 10년 안에 그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우주분야라도 천체우주과학, 심우주 탐사 분야 등은 더 긴 시간동안 인내하고 기다려야 하고 그 결과가 아무런 성과를 가져오지 못할 수도 있다.

이처럼 광범위한 과학기술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고, 매년 혹은 길어야 3년마다 단기적인 성과를 요구하는 연구풍토에서 연구자들은 과연 어떻게 연구하여야 하는지 묻고 싶다.

연구하는 분야 특성에 따라 연구자 양심적인 판단에 맡겨 연구 결과를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연구풍토가 조성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연구자는 늘 단기적인 연구성과에 연연할 수 밖에 없고, 하나의 연구에 몰입하는 깊이 있는 연구는 꿈도 꿀 수가 없다.

따라서 과제를 수주하기에만 급급하고, 정부가 요구하는 단기 성과로 적당히 치장해 성공 과제로 평가 받고, 또 다른 과제를 수주하러 나선다. 이처럼 다람쥐 채바퀴 돌듯이 돌아가는 악순환의 고리, 불필요한 연구과제를 양산하는 작금의 행태를 끊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뛰어난 연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제 연구결과에 대한 성과와 평가는 과감하게 연구자에게 돌려야 한다. 그러면 평가 주체인 정부는 "연구자들을 어떻게 믿고 연구를 맡길 수 있는가?"라고 반문을 할 것이다. 여기에는 신뢰만이 답이다.

평가자와 연구자간에 신뢰가 없다면 평가자는 온갖 규정과 방안을 동원해 연구자를 관리하고 감시할 것이다. 그만큼 평가 관리의 인원도 늘어나고 평가 관리에 소요되는 비용도 눈덩이처럼 커지게 된다.

물론 모든 연구자가 양심적으로 연구를 수행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신뢰를 깨는 연구자에게는 퇴출이라는 강한 책임이 제도적으로 뒤따라야 한다. 이제 국민들과 정부 관료는 국민의 혈세인 많은 R&D 비용을 쓰면서 무슨 성과를 내느냐고 비난하고 닦달만할 것이 아니라 시간을 가지고 참고 기다려주는 신뢰가 필요하다.

신생아도 태어나기 위해서는 엄마의 뱃속에서 10개월이란 기간을 참고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세상을 바꿀만한 놀라운 연구 결과도 연구자 양심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가운데에서 탄생할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과학기술계에서 지금까지의 관행과 풍토에 대한 일대 대변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그 일환으로 '한국 과학기술계 합리적 질서'를 찾기 위한 대화도 지역을 찾아가면서 개최되었고, 많은 과학기술자들과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마지막 토론회도 오는 9일 오후 3시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이제는 방관자적 입장에서 벗어나 과학기술계 스스로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이런 풍토 및 질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합리적 질서 아래에서 서로 신뢰하고 기다려주는 연구풍토가 조성되어야 과학기술이 대한민국의 지속 가능한 성장의 가장 필수적인 밑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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