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성원 STEPI 미래연구센터 부연구위원

고수(高手)를 만나러갈 때면 늘 즐겁고 흥분이 된다. 서로 문답하는 과정에서 비록 질문하는 편에 줄곧 있더라도 대답하는 상대방과 실력의 높고 낮음을 가늠하기 힘들다. 질문이 좋아야 좋은 답변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문답을 통해, 만남은 한 편의 배움 여행기가 되고 서로의 지적 성장을 경험하게 한다.

송종국 STEPI 원장과 필자가 여행 가방을 메고 유럽의 연구 고수들 만나러 갈 때에도 이런 성장의 여정을 기대했다. 지난 6월 초순의 유럽은 여름에 진입한 한국과 달리 하늘은 높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연구원의 여러 일로 떠났던 유럽 출장이었지만, 이 글에서는 우리가 만났던 과학기술 분야 고수들의 이야기만 쓰기로 한다. 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혁신을 위한 10가지 노하우를 정리해 봤다.

우리는 유럽에 있는 연구소 세 곳을 방문했다. 독일의 프라운호퍼(Fraunhofer) 세라믹기술시스템 연구소, 스웨덴의 카롤린스카(Karolinska) 연구소, 그리고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International Institute for Applied Systems Analysis, 이하 IIASA) 연구소이다.

프라운호퍼연구소는 유럽 내 응용연구를 선도하고 있으며, 독일 전지역에 67개 연구소, 2만 4000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있다. 연간 연구비로 쓰는 돈만 21억 유로(한화 2조 7000억원)에 달한다. 카롤린스 연구소는 노벨 생리의학상을 주관하고 수여하는 곳이며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역량을 확보하고 있는 의대 연구소로 잘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IIASA는 지난 1972년 냉전시대 동서 과학기술 협력의 증진을 위해 설립됐다. 21세기가 직면한 에너지 안보, 고령화, 지속가능한 환경 등의 문제를 풀기 위해 현재 49개국에서 온 300여명의 과학자, 엔지니어, 경제학자, 사회학자 등이 전 세계 1800여명의 전문가들과 함께 연구를 수행한다.

1. 실용적 국제화(More than international)

스웨덴의 카롤린스카 연구소, 독일의 프라운호퍼연구소, 오스트리아 IIASA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은 인적 구성의 다채로움이다. 스웨덴, 독일, 오스트리아 연구소라고 부르기가 어색할 정도로 다국적 인재들이 연구소를 가득 채우고 있다. 카롤린스카 연구소에서도 가장 많은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롤프 루프트(the Rolf Luft) 당뇨병·대사질환 연구센터는 30여명의 연구원 중 스웨덴 연구원은 소수다. 독일,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영국, 싱가포르, 한국 등에서 온 연구원들이 일하고 있다.

연구센터 내에서는 100% 영어로 말해야 한다. 이 연구센터 소장인 퍼-올로프 베르그렌(Per-Olof
Berggren) 교수는 "전세계를 뒤져서라도 도약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인재를 찾아야 한다"며 "연구비도 10%만 스웨덴에서 조달할 뿐 나머지 90%는 해외에서 받는다"고 말했다. 프라운호퍼 연구소도 40%의 인력만 독일인이지 나머지는 다국적 출신들이다.

2. 모방 연구는 하지 않는다(Never me too!)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 있는 연구소들은 한 가지 절대 하지 않는 연구가 있다. '남들이 하는', 또는 '남들이 했던' 연구다. 이들은 단호하게 "me too(모방이나 흉내) 프로젝트는 필요 없다"고 강조한다. 이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한 단계 올라서느냐다. 여기서 한 단계 올라선다는 의미는 단순히 기존 연구의 효율성을 높이는 연구가 아니다.

세계 어떤 연구자도 실현한 적이 없는 독보적인 연구를 하는 것이다. 물론 선행연구들의 토대 위에서, 그러나 선행연구에서 질문하지 못한 대담한 가설이나 콘셉트를 제안하고 이를 증명(proof of concept)하는 것이 "연구한다"는 본래의 의미다. 이런 목표를 좇다보니 1번에서 언급한 것처럼 국내에서 인재를 찾지 못할 경우 해외로 달려간다.

3. 좋은 연구는 국제적 문제의 대안이 된다(Challenging global problems)

20세기 국제적 분쟁을 유엔(United Nations)이 해결하려고 했다면 21세기는 '유알(U n i t e d
Researchers)'이 이 역할을 대신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이념 대결과 경제성장 지향의 20세기는 국가연합기구였던 유엔이 국가 간 갈등과 분쟁을 조정했다. 그러나 21세기는 문제의 내용과 지형이 매우 복잡하다.

예컨대 경제성장을 추구하면서도 자원을 아껴써야 하고, 환경오염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기후변화 같은 국제적 이슈에도 대응해야 한다. 문제의 범위가 여러 국가에 걸쳐있고 그 원인도 누구의 책임이라고 딱 부러지게 드러나지 않는다.

분쟁을 조절하려면 이해 당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객관적 사실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사실을 밝히는데 국제적 연구기관만큼 적절한 곳도 없다. 우리가 방문했던 오스트리아 IIASA는 다국적 연구자들과 협업해 과학적 증거를 밝혀내고 이를 근거로 글로벌 이슈에 대응한다.

이 연구소 소장 파베 카밧(Pavel Kabat) 박사는 "여러 나라의 이권이 달려 있는 북극 개발이나 경제성장과 동시에 환경보존도 생각해야 하는 아시아 개발에는 복잡한 문제들이 있어 어느 한 나라의 연구소가 해결할 수 없다"며 "각 나라를 대표하는 연구소끼리 서로 연합하든지 다국적 연구소가 나서야 좋은 연구를 수행할 수 있고 국제 정치적 대안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STEPI는 지난 2014년 IIASA와 글로벌 이슈 대응을 위한 국제공동연구와 연구자 교류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바 있다.

4. 선생은 언제나 옳진 않다(Teachers are not always right)

"선생이 언제나 옳다면 창의력은 생기지 않는다."

교실이나 강단에서 가르치는 교사나 교수가 항상 옳다면 학생들은 그 권위에 짓눌려 새로운 시도를 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미 답이 있고, 답을 아는 사람이 있는데 굳이 도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카롤린스카 연구소 베르그렌 교수는 "생명과학이나 의학에선 변화가 심해 많은 경우 선생의 의견은 옳지 않다"며 "학생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기하고 검증해볼 수 있도록 교육 시스템을 더욱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창의력을 배양하는 방법은 학생들 스스로 아이디어를 제기하고 직접 실현하도록 도와주면 된다. 

5. 엉뚱한 생각을 알아주는 명망가의 존재(Visionaries turn ridiculous ideas into reality)

참신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일수록 관련 학계나 업계에서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아직 명확하게 증명되지 않았을 테고, 설령 증거가 있어도 그것이 새롭다면 기존의 학설이나 산업을 대체할 가능성이 높아 자신의 연구 분야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당대에 외면당하기 일쑤다.

프라운호퍼 연구소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MP3(고음질 오디오 압축기술)도 자국인 독일 기업들에게 그 유용성을 인정받지 못했다가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이 관심을 받는 바람에 외국에서 먼저 사업화가 진행됐다.

카롤린스카 베르그렌 교수가 겪은 경험이 재미있다. 그는 췌장 소도(췌장에서 작은 섬처럼 존재, 췌장의 1%) 연구에서 세계적인 업적을 이룬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소도를 떼어내 동물의 눈에 이식한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눈에도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미세한 기관인 소도의 활동을 좀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어서다. 소도는 체내 혈당이 올라갈 때 인슐린을 분비하는 미세기관으로 당뇨병 연구의 핵심이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낼 때 대부분의 동료 연구자들은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스웨덴의 세계적 의류업체 H&M의 창업자는 그의 아이디어에 미래가치를 부여하고 연구를 지원했다. 한 사회에 이처럼 엉뚱한 아이디어라도 들어주고 지원해주는 비저너리(visionary)의 존재는 혁신적 연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6. 새로운 흐름과 새로운 니즈를 찾아라(Finding new trends and needs)

프라운호퍼 연구소는 연구비의 70%를 민간 수탁 및 공공과제에서 충당한다. 그러다보니 연구소 밖으로 나가 시민의 삶의 현장에서, 기업에서 어떤 수요가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구소의 팀 리더들은 끊임없이 고객을 만나 대화하면서 "뭐가 필요하냐?"고 물으며 새로운 니즈가 있는지 탐문하는 것이 일상이다.

또 사회의 새로운 흐름을 파악해 역으로 고객들에게 흐름을 따라가거나 리드할 수 있는 기술이나 서비스를 제안하기도 한다.

독일 드레스덴에 있는 프라운호퍼 세라믹기술시스템 연구소 부소장 분더리히(Wunderlich) 박사는 "새로운 흐름과 니즈를 파악하고, 이를 연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내고 프로젝트를 설계하는 것은 연구 리더들의 필수 업무"라고 설명했다.

7. 작게 시작하고 길게 지원하라(Starting small, supporting long-term)

혁신적인 연구는 앞서 언급했듯 선례가 많지 않고 아직 증명해야 할 것이 많아 당장 많은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남 따라하는 연구는 큰 의미가 없다.

우리처럼 선진국 대열에 선 국가일수록 더 그렇다. 혁신적인 연구를 죽이지 않고 살리려면 작게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길게 지원해야 열매를 맺는다. 예컨대 제약산업의 경우 혁신적 연구는 20~30년은 지나야 꽃을 피운다. 지속적으로 연구자금을 제공하지 않으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그렇다고 눈 감고 지원할 수는 없다. 엄격한 심판이 필요하다. 철저하게 동료 평가(peer review)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가능하면 외국인이 심판을 맡는 것이 더 좋다. 국내의 연구외적 영향력 (인맥이나 학맥, 이해관계)이 개입하는 길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또 연구결과는 모든 국민에게 공개해 연구의 효과가 무엇인지 논의하고 토론하는 것이 좋 다. 세금을 내는 국민은 국가 연구개발사업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8. 기본급은 보장, 그 이상은 실력에 따라(In-between job security and performance)

직업 안정성을 보장하면 혁신적인 성과를 낼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역으로 혁신적 성과를 내는데 도움이 될까. 의견이 분분하다. 안정적인 직장에선 경쟁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아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게 된다.

반면 직업의 안정성이 흔들리면 그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시도, 비윤리적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직장에서 쫓겨난다면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성과를 낸 것
처럼 위장할 수 있다.

자칫 연구원 전체의 평판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스웨덴과 독일 연구소들은 직업의 안정성을 어느 정도 보장해준다. 연구를 조작하거나 업체와 부정하게 결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연구원들은 기본급보다 더 받으려면 치열하게 연구해야 한다. 이것이 이들 인센티브 시스템의 골격이다.

9. 약간의 혼돈은 약이 된다(Allowing a certain chaos)

서로 다른 학문적,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이 모여 융합연구를 수행하다보면 여러 가지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교차지대(Trading zone)가 형성된다.

교차지대는 서로 다른 배경, 지식, 문화 등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아이디어, 전문용어, 경험, 지
식, 문제해결 방안 등을 교환하는 장이다. 이런 교차지대에선 말처럼 쉽게 서로를 이해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 과정이 순조롭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서로의 언어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또 새로운 만남의 결과가 어떻게 연구에 적용될지도 잘 모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혼돈이 생기는데, 우리가 만난 연구의 고수들은 약간의 혼돈은 약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혼돈이 발생할 때 당장은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멀리 보면 획기적인 연구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혼돈을 겪으면서 연구자들은 이전에는 생각지 못한 새로운 분야를 만나게 되고, 한계에 봉착했던 연구에 새로운 가능성과 재미를 경험한다.

10. 체계적 차세대 육성 시스템(A system for nurturing young scholars)

연구소의 경쟁력은 현재 주축이 되는 연구원들이 어떤 성과를 내느냐에 달려 있지만, 이제 막 대학원을 졸업하고 들어온 젊고 유망한 연구자들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에도 달려 있다.

세대를 이어 연구의 노하우가 축적, 전승되고 평판과 소문을 듣고 유능한 젊은 과학기술자들이 끊임없이 들어와야 그 연구소의 미래가 밝다. 우리는 이 부분을 연구의 고수들에게 물었고, 이들은 한결같이 젊고 유능한 연구자의 확보, 육성 시스템의 중요성에 동의했다.

프라운호퍼 연구소, 카롤린스카 연구소, IIASA 같은 유럽의 연구소들은 대학과 연구소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연구소 소장이 대학의 교수를 겸직한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 자연스럽게 유능한 인재를 먼저 알아보게 된다. 교수는 그 인재들에게 대학원 진학과 연구자로서의 삶을 권유하게 되고, 이런 권유를 받은 학생은 일찍이 연구자로서의 삶을 준비할 수 있다.

이렇게 연구소에 들어온 젊은 학자들은 연구의 경쟁력을 갖추는 노력뿐 아니라 다른 연구자들과 협업하는 능력, 이를 통해 동료와 선배 연구자로부터 신뢰를 받는 방법을 배운다. 실력 못지않게 연구자로서 갖춰야 할 윤리의식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연구의 고수들과 대화하면서 느낀 점 하나는 일상에서 연구의 주제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일상은 많은 문제점들이 교차하는 매우 복잡한 삶의 현장이다.

여기서 발견하는 문제는 당사자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경험하는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독일 드레스덴에서 만난 토마스 그리스 아헨공대 교수는 창업자의 70%가 사업에 성공한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통상 열에 아홉은 망하는 것이 벤처기업 생태계의 원리인데, 독일은 무엇이 다르기에 성공률이 월등히 높다는 것일까. 그 교수는 "일상에서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겠다는데 누가 이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라며 "시장성이 있는 기술은 우리 일상의 문제를 푸는 기술"이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독일서 방문했던 벤처기업 Cloud and Heat도 지역대학의 한 교수가 일상의 문제를 풀려고 했던 데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새집을 지으면서 친환경적인 기술을 활용하고 싶었고, 그 일환으로 그가 사용하는 각종 컴퓨터나 서버 등에서 배출되는 열을 난방에 활용하려고 시도했다. 이 업체는 서버에서 나오는 열을 물로 식히고, 덥혀진 물을 난방과 온수에 활용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 기술은 최근 서버를 분산해서 관리하는 시장의 추세에 힘입어 많은 수요를 낳고 있다. 혁신의 아이템들은 우리 일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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