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장비 국산화 - 해외편 ①]김유수 이화학연구소 종신 주임연구원, 연구장비 '환골탈태' 주도
"범용 장비 구입해 심장부 해체, 세상에 하나 뿐인 장비로 변신"···버전 4까지 개발

버려진 연구장비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김 교수. 연구자들이 버리고 간 장비 부품(왼쪽)을 연구장비 개조에 사용한다. 그는 개조로 완전히 새로운 연구장비를 만들어 낸다.<사진=박은희 기자>
버려진 연구장비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김 교수. 연구자들이 버리고 간 장비 부품(왼쪽)을 연구장비 개조에 사용한다. 그는 개조로 완전히 새로운 연구장비를 만들어 낸다.<사진=박은희 기자>
연구실 한편에 고철(?)로 보이는 장비 부품들이 여기저기에 몰려 있다. 작은 부품부터 덩치가 제법 큰 연구 장비의 일부분까지 다양하다.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부품으로 보이지 않는다. 연구자들이 연구소를 떠나며 버리고 간 연구 장비의 일부다. 

바로 이웃한 연구동엔 제 모습을 갖춘 연구 장비가 '위용'을 자랑한다. 버려진 장비 부품들이 새로운 장비 구축에 활용된다. 연구 장비의 환골탈태(換骨奪胎)다. 장비 개조로 버전업(version-up)만 4번째. 이 장비는 물질 표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원자 수준에서 관찰이 가능토록 개발돼 일본 학계를 놀라게 했다.   

도쿄에서 전철로 1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사이타마현 와코시. 한적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곳에는 일본 최대의 종합연구소인 이화학연구소(RIKEN) 본원이 자리하고 있다. 연구소 안쪽에 위치한 나노사이언스 빌딩의 김유수 박사 연구실은 개조된 연구 장비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다.  

김 박사는 리켄에서 연구자로는 가장 높은 직책인 '종신 주임연구원(Chief Scientist)'이다. 종신연구원 30여명과 임기제 주임연구원 20여명 중 외국인은 3명. 일본인을 제외한 아시아 과학자로는 그가 유일하다. 

연구 분야는 계면과학이다. 주사터널현미경(STM)을 이용해 원자나 분자 수준에서 물질의 표면이나 성질이 다른 두 물질이 맞닿아 있는 지점(계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이나 에너지 이동 및 변환을 연구한다. 그가 학계에서 인정받는데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연구 장비다. 

김 박사는 "연구자는 최고의 연구 장비로 최고의 연구 성과를 얻는 것을 중요한 역할이라 여긴다. 하지만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기존 장비로는 한계가 있다"며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려면 기존의 장비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해야 한다. 장비를 개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 "심장부 완전히 다른 장비로 만든다"···연구장비 개발은 '연구의 한 축' 

돈 주고 산 멀쩡한 연구장비를 개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 교수는 개조를 통해 새로운 기능을 덧붙여 기존 장비로는 할 수 없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사진=박은희 기자>
돈 주고 산 멀쩡한 연구장비를 개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 교수는 개조를 통해 새로운 기능을 덧붙여 기존 장비로는 할 수 없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사진=박은희 기자>
"좋은 연구성과를 내고 싶었지만 3년 계약의 포스트닥터로서 연구 장비를 통째로 만들 능력과 시간은 없었어요. 겁없이 고가의 연구 장비를 사달라고 했죠(웃음). 그것도 일본산 장비가 아닌 독일산으로요." 

1999년 리켄에 포스트닥터로 인연을 맺은 그는 다음 해에 장비 구입을 요청했다. STM을 사용한 원자 분자 레벨의 연구가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당시에 일본에서는 장비를 직접 만들어 연구를 하는 분위기였다. 그의 요구는 기존의 틀을 깨는 도전과도 같았다.  

그는 "혼자서 최고 수준의 STM을 만들려면 5년에서 10년은 넘게 걸리지만 범용 장비를 튜닝(개조)해 새로운 기능을 덧붙이는 것은 수개월이면 가능하다"며 "리켄에 오기 전부터 독일산 장비를 썼다. 연구자에겐 '손맛'이라는 것이 있어 익숙한 독일산 장비를 사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당돌한 요구로 보일 수 있지만 연구성과로 말하겠다는 그의 주장은 받아졌다. 얼마 후 고가의 독일산 연구 장비가 그의 연구실로 들어왔고 분주히 움직였다. 

"장비의 심장부를 완전히 교체합니다." 

애써 비싸게 산 장비를 다시 개조해 사용한다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못 봤던 것을 보려면 세상에 있는 장비로는 불가능하다"고 개조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개조한 장비로 2년여 만에 표면과 분자와의 상호관계를 밝혀내며 관련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원자 1개, 분자 1개의 반응을 관찰하고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 냈다.

김 박사는 "그동안은 연구자가 직접 만든 장비로만 연구 성과를 냈다면 내 경우에는 범용장비로 연구성과를 냈기에 더욱 부각된 것"이라며 "누구나 사서 쓸 수 있는 장비로 연구성과를 낸 것이다. 그러나 범용장비를 그대로 쓴 것이 아닌 개조를 통해 새로운 장비를 만들었기에 새로운 연구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 연구장비 제작 주문 시 정보 유출?···"그건 작전 실패"

 김 교수는 연구 장비를 계속해서 버전업을 해 오고 있다. 그의 연구실에 있는 연구장비들.<사진=박은희 기자>
김 교수는 연구 장비를 계속해서 버전업을 해 오고 있다. 그의 연구실에 있는 연구장비들.<사진=박은희 기자>
그의 연구에서 연구장비 개발은 연구의 중요한 한 축이다. 연구장비의 '몸통'에 해당하는 장비는 여전히 독일산이지만, 몸통 장비에 결합되는 장비들은 일본 기업에서 주문 제작한다. 새로운 심장을 단 장비가 탄생하는 셈이다. 

현재 그가 사용하고 있는 STM 중 최신 장비는 6년 동안 개조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췄다. 버전업만 4차례. 그동안 개발된 장비와 부품들이 그의 연구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김 박사는 "한 장비를 오랫동안 사용하다보면 장비 능력을 100% 활용할 수 있게 된다. 20년 가까이 한 장비를 사용했으니 개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기업에게 무조건 만들어 달라고 하면 돈과 시간을 모두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장비의 주문 제작 과정에서 장비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주문제작 과정에서 장비에 관한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은 있다"며 "그러나 정보가 유출되는 건 작전 실패"라고 단언했다. 

우선 장비를 개조하기 전 어떻게 만들어야 할 지 방향을 정한다. 장비는 부분별로 나눠 디자인해 각각 다른 업체에 제작을 의뢰한다. 이후 납품된 부분별 장비를 몸통 장비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장비를 완성한다.  

그는 "메이저급으로 인정받고 있는 저온 초고진공 STM 장비는 독일, 일본, 다국적 기업 등 주로 4개 회사에서 만들고 있다. 이 중 같은 회사 제품을 20여 년 가까이 4대 구입했다. 이 장비는 기본이 충실한 장비다. 키(key)만 돌리면 잘 나가는 자동차로 비유할 수 있다"며 "반면 일본장비는 연구자의 주문을 받아 튜닝 자동차를 만들어 준다. 심지어 싼 편이다. 매력은 크지만 내겐 기본이 충실한 장비가 나에게 맞는 개조를 하는데 더 좋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분자 한 개에 전자를 넣어서 나오는 미약한 빛을 검출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광학 및 측정장치를 결합해야 하므로 장비의 개방성을 높여야 한다. 몸통 장비에 접속구를 많이 내달라고 주문한다"며 "결합될 장비들은 한 업체가 아닌 2~3곳에 나누어 주문을 넣는다. 장비들이 모아지면 연구실에서 합체해 장비를 완성한다"고 설명했다. 

매순간 성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실패를 거듭하고 나서야 완성품이 만들어졌다. 현재 4호기도 수많은 실패가 알려준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김 박사는 "장비 개발을 함께 하는 포스트닥터는 나와 7년을 함께 했다. 최근에서야 성공했으니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장비니 가격으로는 환산할 수가 없다. 볼트, 너트 가격만 따져 장비 값을 매길 수는 없는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 세상에 하나 뿐인 장비 개발 지속···"수중촬영도 가능한 장비 개발할 것"

연구 장비 개발은 그의 연구에서 중요한 한 축이다. 연구 성과도 장비 개발도 해야 할 일이 많지만 목표가 있기에 가능하다.<사진=박은희 기자>
연구 장비 개발은 그의 연구에서 중요한 한 축이다. 연구 성과도 장비 개발도 해야 할 일이 많지만 목표가 있기에 가능하다.<사진=박은희 기자>
"연구 장비만 개발하는 연구실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연구 성과도 내야 합니다. 힘들지만 둘 다 가능토록 하는 건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김 박사는 계속 연구 분야를 발전시켜 STM이 현재의 초고진공 저온에서 동작할 뿐 아니라 빛과 자성은 물론 용액 내에서도 같은 수준의 분석이 가능하도록 연구장비를 개발할 계획이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나노테크놀로지 시대가 오면서 연구비가 집중되고 새로운 연구 성과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런 트렌드에 올라탄 장비 업체들이 새로운 장비를 엄청나게 만들어 내고 있다. 돈이 있다면 더 이상 장비를 만들어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며 "문제는 단기간의 연구 성과만 중시하며 장비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채 새 장비만 사서 쓰려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 박사는 "예를 들자면 취사버튼만 누르면 밥이 나오는 전기밥솥. 그냥 밥 하는 것에 만족한다. 나머지 기능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설명서를 잘 읽어보면 활용가치가 많다"며 "밥솥의 기능을 다 활용하게 되면 호기심이 생겨 개조하거나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연구자의 자율성 부재도 연구 장비 개발의 발목을 잡는다고 꼬집는다. 그는 "서둘러 논문 내는데 만 급급하면 긴 호흡으로 새로운 연구 장비를 개발할 수 없다. 연구 분야에 따라 결과가 다른데 동일 선상에서 연구자를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리켄은 연구자의 의도가 분명하다면 믿어주는 편이다. 내가 수입 장비로 연구를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평가제도는 전 세계 동료 학자들의 평가를 중시하는 피어리뷰(peer review)에 기반을 둔다. 연구자들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장비 개발에 있어 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처리비가 없어서 방치되는 연구 장비들이 많다. 학생들이 장비에 대한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한 교육이 이뤄진다면 장비개발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며 "연구논문이 없어도 장비를 고치거나 개조하는 것만으로 석사급 학생이 졸업할 수 있게끔 교육 문화가 바뀌길 바래본다"고 희망했다.  

김 박사는 인터뷰 이후에 새소식을 전해왔다. 두 분자간의 에너지 이동의 모습을 이미징하는 연구로 '네이처'에 논문을 게재했다. 그가 개조한 STM 장비가 세계 최초의 연구 성과를 가져온 결과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