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 자성없는 對정부 변화 요구 실효 없어
대학‧출연연 등 범 과학계 동참해 큰 틀에서 국민공감 비전 제시해야

대한민국이 '알파고 쇼크'로 들썩이는 요즘 과학계의 발언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전보다 조금 강경해졌다. 중력파에 이은 알파고 여파로 과학기술에 국민적 이목이 쏠리다보니 과학계 의견에 무게가 실리는 모양새다.

최근 KAIST·POSTECH·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 상당비중의 정부R&D예산을 지원받고 있는 5개 대학이 기초과학 연구를 양적(量的)으로 평가하는 행태를 개혁해야 한다는 취지의 공동 선언문 초안을 정부에 전달했다. 보기 드물게 과학계가 정부에 일종의 경고를 날린 셈이다. 정부가 연구과정에서 시시콜콜 간섭하고, 단기(2~3년) 중심의 정량(定量)평가 시스템을 개혁하지 않으면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위기감의 발로로 해석된다.

정부로부터 60~70%비중의 예산을 지원받아 온 종속적 관계에서 과학계가 연구환경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환영할만한 일이다. 정부 관료주의에 대한 다양한 문제 지적도 충분히 공감된다. 과학기술계의 현실을 이해하고 제도를 설계하는 정부 본연의 역할을 기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정부만 탓할 수 없다. 여러 악조건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과학기술인의 숙명이다. 사실 이번 5개 대학의 공동 선언문은 분명 과학기술인들의 속을 시원하게는 해준다. 속된 말로 갑질하는 정부 관료들을 좋게 봐줄 연구자들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일부 대학들의 입에서 정부탓만 하는 선언이 과학계의 진정한 변화에 득이 될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정부 관료와 연구자들간 서로에 대한 불신이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상대방만 잘하라고 지적하기에는 한국 과학계가 워낙 위중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없이 현장과 괴리된 정책입안의 허점을 드러낸 정부에만 기대서는 안된다. 정부의 혁신으로만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그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과학계가 스스로 풀어 내야 할 고질적인 문제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집단 이기주의로 흐르는 연구문화, PBS(프로젝트 과제수주방식)에 따른 연구주체별 경쟁적 연구생태계, 연구소 경영의 업그레이드, 외부와의 소통과 교류 등 과학계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가 산재해 있다. 연구윤리 의식을 똑바로 세우는 것은 기본이다. 과학계의 문제는 과학계 스스로 풀어나가야 건강한 생태계가 될 수 있다. 과학계 스스로 강해져야 문제를 더욱 강력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다.

과학계는 국가와 인류의 미래를 위해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특단의 비전을 먼저 내놔야 한다. 정부의 행태만 변해야 한다는 것은 소극적인 대응이다. 이 수준의 요구는 과학계 말고도 다른 분야에서도 다 하고 있다. 과학계는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면서 정부, 사회가 변화되기를 바라는 식으로는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과학계 내부 개혁부터 시작돼야 진정한 과학 강국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아울러 이번 공동 선언문은 일부 대학의 참여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국가R&D핵심 주체인 정부출연연구기관과 대학, 기업 등 범 과학기술계가 동참해야 한다. 과학계 내부의 비전이 담긴 메시지가 공동 선언문에 담길 때 앞으로 과학공동체가 내딛을 한걸음 한걸음에 힘이 더욱 실릴 것이다. 과학계가 국가와 인류를 위해 목표와 비전, 전략을 추진하려고 하니 정부에서도, 국민들도 적극 동참해 달라는 시국선언이 필요한 시점이다.

◆ 다음은 5개 대학이 정부에 전달한 '공동 선언문'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 지난 50여년간 눈부신 산업 발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발전을 가능케 한 것은 선진국을 벤치마킹하고 그에 따라 정량적 목표를 설정하여 추진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우리 산업이 고도화된 지금 더 이상 이러한 성장 전략은 통하지 않는다.

연구개발에 있어서도 지난 30여년 동안 논문의 양과 세계적 평가에 있어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학술논문 수는 세계 10위권에 이르렀고 세계대학랭킹 100위권에 드는 대학도 여럿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정량적 연구 실적 증가는 이제 정체 상태이며, 특히 연구 업적의 질을 보여주는 피인용도는 OECD 회원국 중 하위권에 계속 머물고 있다. 이는 많은 연구자들이 정량적 실적을 채우는 데 급급한 결과 남들이 해 본 연구를 따라 함으로써 손쉽게 결과를 내는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 연구자들이 바뀌어야 함은 물론이나, 그 근간에는 잘못된 평가방식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평가 기준인 SCI 국제학술지 논문 수와 Impact Factor 등 각종 정량 지표들은 연구자로 하여금 독창적이고 모험적인 과제에 도전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렇게 정량화된 지표에만 의존하는 평가로는 연구의 질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다. 우리 대학들은 선도적으로 대학 내 업적평가 시스템을 개선하여 보다 모험적이며 세계를 선도하는 연구가 가능하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학들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연구개발 재원의 상당 부분을 정부에서 부담하고 있고 많은 연구자들이 정부 연구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의적이고 모험적 주제를 추구할 수 있도록 연구 풍토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부의 연구업적 평가 시스템이 대폭 개선되어야 한다.

- 현재 정량 지표 일변도인 연구 업적 평가를 지양하고 전문가 집단의 판단에 따른 정성평가를 도입하여야 한다.

- 정량적 목표 도달로 연구개발의 성공 여부를 판별하는 지금의 방법으로는 모험적 주제에 도전하는 연구 풍토를 만들 수 없으며 연구결과 본연의 가치가 평가되도록 하여야 한다.

- 공정성만 강조한 나머지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을 평가자 풀에서 배제하여 평가의 전문성을 떨어뜨리는 일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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