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 사이언스코리아 - 해외기획취재]연구풍토①"실험결과에 덩실 춤까지…연구재미에 푹빠진 해외연구자들"

# 세계 최대 연구소 미국 국립보건원(NIH). 연간 30조원의 R&D예산을 쓰는 이 거대 연구소의 과학자들 대부분은 연구를 즐긴다. 어떤 과학자를 붙잡고 물어봐도 자신이 하는 연구가 재밌고 좋단다. 70세가 넘은 피터 블룸버그 과학자는 만성 패쇄성 폐질환 치료제 개발을 위해 NIH에서 죽을 때까지 연구할 거라고 말한다. 연구에 대한 자율성이 확실히 보장되기 때문에 연구를 억지로 하거나 또는 압박을 받으면서 연구하지 않는다.

#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 B 실험실. 몇 개월 동안 실험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좀처럼 해결되지 않던 노이즈 문제가 해결됐다. 평소에는 연구에 집중 하느라 말도 아끼던 외국 연구자가 "We solved this problem!"이라고 큰소리로 외치더니 갑자기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야말로 축제분위기다. 연구주제를 정하고 열망 속에서 연구를 진행해 오던 그들에게는 새로운 결과가 나올 때마다 큰 산의 등반을 마친 듯 온몸으로 기뻐하는 게 당연한 과정 중 하나다.

# 일본과 한국 연구현장에서 만난 일본 연구자들 모두 '연구가 즐겁다', '연구를 사랑한다' '돈을 10배로 줘도 다른 것을 할 생각이 없다'라는 표현들을 자연스럽게 쏟아냈다. KIST, KAIST 등 국내에서 연구하는 일본인 연구자들도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연구를 즐기며 매진하려는 모습들이 동료 연구원들 사이에 귀감이 되고 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유럽과 미국, 일본 등 과학 강대국에서 만난 연구자들의 모습이 그랬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듯 "현재 하는 연구가 정말 재미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과제수주를 위해 또는 단기간 내 성과를 내야하는 압박감이 만연한 한국 연구현장의 분위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일단 여유가 있고, 연구과정 자체에 흥미를 느끼며 집중하는 연구풍토다.

◆ 카피연구? 있을 수 없는 일…"과학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
 

 

국립암연구소(NCI) Peter Blumberg 박사(왼쪽에서 두번째)가 김영호 메디프론 디비티 대표(왼쪽에서 첫번째)와 만성 패쇄성 폐질환 치료제 공동연구를 위해 논의하고 있다.<사진=김요셉 기자>
국립암연구소(NCI) Peter Blumberg 박사(왼쪽에서 두번째)가 김영호 메디프론 디비티 대표(왼쪽에서 첫번째)와 만성 패쇄성 폐질환 치료제 공동연구를 위해 논의하고 있다.<사진=김요셉 기자>

 

NIH는 연구자가 원하면 어떤 주제이든 상관없이 연구그룹 책임자(lab chief, boss)와 자유롭게 상의한 후 파일럿 프로젝트 형태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일이 추진되는 과정에 따라 실험실의 새로운 메인 연구프로젝트가 되기도 한다. 어느 연구자라도 새로운 연구주제가 생기면 연구가 가능한 구조다. 수천여개의 실험 조직들이 각기 추구하는 목표가 있고, 이를 우선시 하기는 하지만 어떤 연구자라도 하고 싶은 연구를 못하지는 않는다.

최의묵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연구원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할 때 기본적으로 그동안 인류가 해보지 않았던 연구이거나 자신이 해왔던 연구에 도전적 진보를 가져오는 연구를 시작한다"라며 "남들 하는 것처럼 유행에 휩쓸리거나 다른 사람의 연구과제를 카피하는 사례는 NIH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 군사전문 기술개발 연구재단 DARPA(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의 경우 DARPA 연구비를 받는 연구자들은 남들이 보기에 미친 짓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할 정도로 새로움을 추구한다. DARPA 연구자들 스스로 '우리가 세상을 창조한다'고 말한다. 무엇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능한 것을 창조해 낸다는 연구문화가 강하다.

DARPA는 소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가진 연구자를 찾는다. 가령 컴퓨터, 기계, 모터 등으로 동작하는 로봇의 기존 원리를 깨고, 공기 압력으로만 움직이겠다고 말하는 연구자를 DARPA는 지원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과학자가 DARPA 프로젝트를 통해 풍선으로 움직이는 로봇을 개발, 공기 압력으로만 움직이는 로봇을 결국 실현시켰다.

DARPA 전문가 리쳐드 반 아타 IDA(미국 국방분석연구소) 박사는 "DARPA의 주요 임무는 아주 훌륭한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들을 연구자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보통 수준의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연구비를 안준다"며 "혁신이라는 것은 민주적인 합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소수 연구자들에 의해 가장 성공적인 혁신이 만들어져 왔다"고 강조했다.

독일 막스 플랑크는 협회는 기초과학과 인문과학, 생물의학 분야 등 80여개 연구소로 이뤄졌다. 예산의 80%는 연방정부와 주정부에서 지원받고 나머지는 과제를 통해 확보한다. 막스 플랑크 산하 연구소의 수장은 대학교수로 대학과 연계성이 높으며 석·박사 과정 학생들도 막스 플랑크에서 연구하며 학위를 받는다.

그중 슈투트가르트 막스 플랑크는 고체물리분야 연구소. 물리학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사업화나 기술이전 성과보다 학문과 진리탐구 중심이다. 때문에 카피 연구는 있을 수 없고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끊임없는 연구과정을 넘어서기 어렵다. 그런 이유에서 이들은 연구과정을 한 단계 넘어설 때마다 축제처럼 즐긴다.

한인 과학자로 슈투트가르트 막스 플랑크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손광효 씨는 연구팀의 슈퍼바이져와 실험을 진행하다 깜짝 놀라는 경험을 했다.

"x-ray실험 중이었는데 시그널에 잡음이 해결되지 않아 실험을 거듭하면서 다들 머리아파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잡음이 보이지 않는 거에요.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이었죠. 그런데 슈퍼바이저가 갑자기 'We solved this problem!"을 외치더니 실험실 내부을 오가며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분 나이가 40대 정도인데 말이죠."

손 박사과정생은 "슈퍼바이저는 연구하면서 학생들도 지도하는데 일종의 연구 리더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들 대부분은 연구가 좋아 평생 연구현장에 남는 분들"이라면서 "하나의 성과가 나올때 우리는 '이젠 다음단계를 해야지' 하고 반응한다면 그들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문화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행복감과 자부심이 남다르다"고 말했다.

쿠니에다 나고야 대학 부총장.<사진=이은미 기자>
쿠니에다 나고야 대학 부총장.<사진=이은미 기자>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청색 LED) 수상자를 배출한 나고야 대학의 히데오 쿠니에다 기금·연구·학생지원 부총장은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쿠니에다 부총장에 따르면 ‘우연한 발견’이나 ‘운 좋은 뜻밖의 발견’을 뜻하는 이 단어는 일본 기초연구 문화를 대변한다.

 

일본이 연구성과에 있어 좋은 결과를 내는 비결은 연구자 개인의 호기심으로 연구를 시작하면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꾸준히 지속하는 것이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연구소나 정부의 지원은 이러한 문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쿠니에다 부총장은 "세렌디피티는 혁신이다. 혁신은 모든 사람이 안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많은 실패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며 "혁신은 예상할 수 없기에 각 사람이 가진 독창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독창적 연구에도 연구비를 지원해야 세렌디피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며 "일본도 전 세계의 기준에 맞춰 전반적으로 연구비가 탑다운 형태로 많이 나오는데 대학은 기초연구의 산실로서 주류가 아닌 연구에 꾸준히 지원해야 하며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기초부터 산업까지 연계가 탄탄하다는 평을 듣는다. 연구자 개인 호기심으로 시작한 연구가 사회를 이롭게 하는 데까지의 연결고리가 튼실하다는 뜻이다.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연구를 하지만 연구자의 호기심에 근거한 오리지널리티를 동시에 추구하는 모습이 일본 연구문화의 바탕이 되고 있다.

◆ 한 연구테마 꾸준히 10년은 기본…독창성‧연속성 중시하는 문화 밑바탕

이경상 미국 국립암연구소(NCI) PI(Project investigator) 책임연구원은 한국의 고향이 그립지만 항상성을 갖고 끊임없이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 덕분에 NIH에서 연구의 즐거움을 느끼고 산다고 말했다.

이경상 박사의 최근 연구테마는 피부암 활성물질 최적화를 통한 항암 후보물질 발굴. 관련분야를 10년 넘게 파고든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었고, 그 때문에 테뉴어를 받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이 박사는 NIH는 세계 최고 연구환경을 갖춘 연구소라며 한국 보다 장기적으로 큰 문제와 변화없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연구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NCI에서 70세가 넘은 피터 블룸버그 박사(lab chief)는 자신이 매진하고 있는 만성 폐질환 연구를 죽을 때까지 할 것 같다고 말한다. NIH에는 사실상 정년이 없다. 블룸버그 박사 말고도 70세를 웃도는 과학자들이 적지 않다. 유전자 코드를 밝힌 마샬 니렌버그 노벨과학상 수상 과학자도 NIH에서 연구하다 생을 마감했다.

뮌헨에 위치한 막스 플랑크 디지털라이브러리에 책임을 맡고 있는 랄프 쉼머(Ralf Schimmer) 박사. 그는 어릴 적부터 라이브러리에 관심이 많아 관련 분야를 섭렵하며 꾸준하게 연구해 왔다. 학위 후 막스 플랑크에서 근무하며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연구를 계속 연구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쉼머 박사는 전 세계 연구자들이 논문을 자유롭게 볼수 있도록 하는 2003년 오픈액세스 운동이 선언된 이후 10년 넘게 오픈액세스 확산을 위해 주도적으로 연구활동을 진행 중이다.

쉼머 박사는 "막스 플랑크 디지털 라이브러리는 40여명의 연구자들이 도서관 개념을 넘어 관련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개발하고 다수의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면서 "100% 정부 지원을 받지만 우리가 연구주제를 정한다. 우리는 독일에 기여하는 것도 있지만 EU 나아가 아메리카 아시아 등 글로벌 차원의 성장에 기여하기 위한 연구를 한다"며 연구자로서 포부를 밝혔다.

 

막스플랑크 라이브러리의 랄프 쉼머 박사가 오픈액세스 확산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길애경 기자>
막스플랑크 라이브러리의 랄프 쉼머 박사가 오픈액세스 확산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길애경 기자>

평생 대를 이어 일하는 것을 존중하는 일본의 문화는 연구현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장경수 한일연구자교류협회장은 "일본 연구자들은 평생 한 가지 테마를 연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분야 집중하게 되고 결국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이면 그 분야의 대가가 됐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고 설명했다.

일본 대학에서는 한 명의 교수가 한가지 연구테마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시스템이다.
보통 한 연구실을 교수와 조교수(부교수 격) 조수(조교수 격) 이렇게 세 명이 같이 쓰는데, 같은 연구실에서도 교수는 백혈병, 조교수는 진드기 원충, 조수는 종양 바이러스 등 한 연구테마를 거의 평생 파헤친다.

장 회장에 따르면 일본 연구자들은 얼마만큼 연구했는지, 얼마만큼 경험이 쌓였는지가 중요하며 기초와 응용, 실용화까지 함께 연결되도록 연구한다. 그는 "한 주제의 논문이 40년간 나온다면 믿겠느냐, 그런데 일본은 그렇다"고 전제한 뒤 "선택한 학문에 긍지를 가지고 평생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꾸준히 가는데 목표를 두는 것이 일본의 연구문화"라고 정의했다. 

한국 과학기술계 한 원로는 "'퍼스트무버'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성과를 창출하려면 근본적으로 한국 과학자들에게 연구하는 즐거움을 되찾아 줘야 한다"며 "해외 선진 연구소들에 뿌리내린 연구문화처럼 모든 과학기술 정책의 혁신은 과학자들이 지속적으로 연구를 즐기며 파고들 수 있는 방향으로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슈투트가르트 막스플랑크에서 만난 한인 젊은 과학자들. 이들은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독일의 연구환경, 인프라 등에 부러움을 표시하며 한국의 연구환경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사진 왼쪽부터 박영우 서울대 교수(잠시 방문), 양태열 박사, 천정환 박사, 정민수 박사, 김훈호 석사 과정, 손광효 박사과정, 정현호 박사과정<사진=길애경 기자>
슈투트가르트 막스플랑크에서 만난 한인 젊은 과학자들. 이들은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독일의 연구환경, 인프라 등에 부러움을 표시하며 한국의 연구환경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사진 왼쪽부터 박영우 서울대 교수(잠시 방문), 양태열 박사, 천정환 박사, 정민수 박사, 김훈호 석사 과정, 손광효 박사과정, 정현호 박사과정<사진=길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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