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 - 연구정신 ①]과학계, '왜 연구하는가' 大성찰 시점이공계 학업·연구현장서 과학사·과학철학 교육 부재과학계 90% "과학 교육 필요하다"

과거를 돌아봐야 지금을 알 수 있다. 연구현장에서 40년 인생을 지낸 한 원로 과학자는 한국 과학계의 과거와 현재의 가장 큰 차이는 연구정신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70년대 유치과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은 연구를 할 때 모든 게 국가로부터 시작됐다. 국가를 위해 연구한다는 정신력이 기반이 돼 기술을 개발했다. 이른바 '못살던 나라'를 위해 정말 열심히 연구했다. 선진국 기술을 빼오려고 죽음도 불사했다. 연구동료들과 부둥켜 안고 울기도 많이 울었고, 당시에는 동료들간 정이라는게 흘렀다. 50년 전 우리가 상상했던 제철보국, 반도체IT 강국, 조선강국 등은 현실이 됐다. 당시 연구자들은 미래를 그리면서도 반신반의했다. 그러한 상상이 50년이 지난 지금 기적처럼 현실이 됐다. 전기가 끊겨 실험실에 호롱불을 사용하던 시절이 불과 몇 십년 전 일이다. 그렇게 50년이 쏜 살 같이 지났다. 대통령도 과학자들을 아꼈고 수시로 대화하며 어려운 점을 해결해 줬다. 그땐 그랬다.

요즘에는 기술을 개발하긴 하는데 연구자들이 너무 정신 없이 과제수주와 수행에만 열을 올린다. 너무 쓸데없는 업무에 바쁘다. 지금은 아니다 싶은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큰 목표나 방향보단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갖는 연구자가 많다. 연구가 생계를 꾸려가는 직업이 된 사람이 허다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 과학기술이 많이 삭막해졌다. 우리 과학계가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많이 발달했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도토리 키재기가 됐다. 최강이 되기 위해서는 정상을 뛰어넘는 정신력과 국가적 사명감이 없인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힘들다.

P 원로 과학자는 까마득한 후배 연구자들에게 '연구를 왜하느냐'고 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밥 먹는 것과 똑같은 일상"이라는 답이 돌아오기 일쑤다.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가?' 그런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P 원로 과학자의 증언처럼 과거에 비해 연구정신과 사명감이 약해진 이유에 대해 현장 과학자들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경제 성장의 수단'의 역할을 강요받아 왔다고 말한다. 연구를 하는 것은 '직업'이기에 할 수밖에 없는 '노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과학자로서의 개인적 영달을 넘어 '한국 과학계 전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야 할 겨를도, 이유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떨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도 여념이 없는 모양새다. 

연구의 기본 자세나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 등 사실 왜 연구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나 성찰을 배우거나 해본 적이 거의 없던게 사실이다.

출연연 한 연구자는 "이공계 학생들이나 연구자들을 연구하는 기계로 정의하는 사회의 현실을 경계해야 한다"라며 "항상 답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맹목적으로 연구만 진행해 왔는데 앞으로는 현시점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먼저 이뤄지고 교육과 토론 등을 통해 개선돼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 "연구정신은 어디서 배우나?"…'체계적 접근' 필요

KAIST의 P 대학원생. 어떤 연구를 해야 할지 몰라 일단 학부생에서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과연 이 길이 맞는 것인지 아직도 확신이 없다. 학부생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월급을 가장 잘 번다는 전공을 선택했는데, 이제 와서 학과를 바꾸거나 다른 길을 선택할 용기도 없다. P 대학원생은 자신의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연구실을 오가는 자신과 같은 친구들이 절반 이상은 될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이공계 주요 고등학교 및 대학들의 교육현장을 보면 왜 연구하는가에 대한 연구의 뿌리가 어디있는지 고민하고 체험하는 교과과정을 찾아보기 힘들다. 과학사 또는 과학철학, 과학사회론과 같은 교육커리큘럼 현황을 자체 조사한 결과 거의 관련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이공계특성화 대학(KAIST·POSTECH·GIST·UNIST·DGIST) 뿐만 아니라 전국 과학고등학교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공계특성화 대학 과학사 관련 교과 개설 현황.<자료=대덕넷>
이공계특성화 대학 과학사 관련 교과 개설 현황.<자료=대덕넷>

KAIST의 경우 History of Science, 한국과학기술사 등 총 3개의 과학사 관련 교과가 개설됐다. 포항공대(POSTECH)와 광주과기원(GIST)은 각각 한과목씩만 개설됐다. 이마저도 '선택'과목이었으며, 울산과기대(UNIST)와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의 경우에는 아예 개설된 과목이 없었다.

KAIST 재학중인 L대학원생은 "어릴적부터 배워온 과학은 항상 '인류와 사회를 이롭게 한다'는 '환상'만 심어놓았다"며 "과학교과서에는 '가치'라는 알맹이는 빠진 채 항상 답만 정의내리기 바빴다. 왜 과학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해답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고등학교의 경우 한국과학영재학교와 과학영재학교(서울과고, 대전과고, 경기과고)의 경우에만 과학적 철학을 다루는 교과목이 개설돼 있고 나머지 학교들은 개설과목이 전무했다.

 

 

과학고 과학철학 관련 교과목 개설 현황.<자료=대덕넷>
과학고 과학철학 관련 교과목 개설 현황.<자료=대덕넷>

출연연 연구현장도 과학사를 비롯한 연구정신과 사명감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이 부족한 현실이다. 가끔 저명한 문학인이나 예술인, 철학자 등을 초청해 과학기술 외 타분야의 강연을 듣고 정신을 환기하는 정도다.

출연연 K 연구자는 "과학사적으로 볼 때 중요한 '터닝포인트'들이 많다. 당시 어떤 인물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런 터닝포인트를 만들었는지 이해하면 과학자들도 유용할 것"이라며 "이공 계열 학생이나 연구자들에게도 과학 개념을 가르치는 것보다 역사적 접근을 통해 연구의 가치를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과학 교육 절실"

"과학자로서의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과학 교육보다 인성 교육이 선행돼야 합니다. 과학은 연구기계 부품으로서의 역할이 아닌 인류의 삶의 질문인 왜?라는 것에 답해야 합니다."

대덕넷 설문조사를 통해 한국 과학계를 위한 과학 교육의 방향성에 대해 많은 고언이 쏟아졌다. 많은 응답자가 이공계열 학생들 대상 과학 교육이 대부분 암기식으로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과학을 학문으로만 대하는 현 교육 실태를 꼬집었다. 특히 과학도들이 과학을 일상 생활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생생한 과학 체험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주입식이 아닌 체험식 교육 현장이 마련돼야 한다. 어릴때부터 자연 현상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왜'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기도록 도와야 한다. 또 그 의문을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게 하고, 그 의문을 해소해주는 지도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속에 있다. 삶의 현장 속에서 호기심과 의문을 갖고 그것을 여타 학문과 연계해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초중고 과학 실험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현장 체험이 가미된 문제 해결형 교육이 필요하다.
▲변화하는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최신과학기술을 이해하는 현장 중심의 실험교육이 필요하다.
▲중,고등학생 때 수학과 과학사가 어떤 과정을 통해 발달했는지 알려주는 등, 흥미를 높이는 교육이 필요한 것 같다. 또 성공스토리 위주가 아닌 실패는 했지만 의미있는 도전까지 포함하는 사례 중심으로 교육이 필요하다.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늘 격려하고 존중하는 교육방식과 문화 정착이 필요하다. 이미 과거 역사에서 그것을 어떻게 풀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도 현재 누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과학사와 사회적 관점에서 토론하고 생각할 수 있는 교육이 절실하다.
▲학생들에게 연구 개발 현장(연구소, 기업체)을 보여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교과서에만 의존한 대학 교육은 실용성 없는 지식만 주입하는 것이다.
▲발견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창의성 교육이 바탕이 돼야 하며, 기초 학문 교육이 중요하다.
▲단순히 정보 나열식이 아닌, 왜 과학이 이렇게 발전해 올 수 밖에 없었는지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또 기존 지식들을 머리에 집어넣기만 하는 교육 보다는 하나를 집어넣었으면 그걸 이용해 열을 생각해보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과학교육을 '과학사'만으로 한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과학정책과 과학사회론 등이 중심이 돼야 한다. 현재는 과학 교육이 지식 전달 위주로 돼 있어 흥미가 없다. 인간 본성인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 가운데 대덕넷이 과학계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 과학기술인(이공계 과학도 포함)에게 과학사 교육이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매우 부족하다' 또는 '부족하다'는 응답한 비율이 88.4%(214명)으로 조사됐다. 나머지 7%(17명)은 '우수하다' 또는 '매우 우수하다'고 응답했다. 나머지 11명은 응답하지 않았다.

 

 

또 한국 과학기술인(이공계 과학도 포함)에게 과학사 교육이 필요하느냐는 질문에는 117명(49.2%)이 '매우 필요하다', 99명(40.9%)이 '필요하다'라는 의견을 보였다. 15명(5.4%)는 '필요없다'라고 응답했으며 나머지 11명은 응답을 포기했다.

 

'과학기술인들(이공계 과학도 포함)에게 해외 선진국의 연구현장과 인프라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한가'를 묻는 질문에는 119명(51.5%)이 '매우 필요하다', 99명(42.9%)이 '필요하다'라는 의견을 보였다. 13명(5.6%)은 '필요없다'라고 응답했으며, 나머지 11명은 응답하지 않았다.

 

과학계 한 인사는 "한국 과학계의 물리적 환경 자체가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선진 강대국들의 과학정신 세계와 비교해 보면 우리는 여전히 도전과 연구정신이 그들을 따라가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우리가 보다 창의적이고 과학을 통해 인류에 기여하려면 범국가적 연구정신 활성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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