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정에도 대전현충원 찾아 헌화하고 고인들 넋 기려
한국 과학·이공계 역사 이끈 4명의 주인공 '역사적 만남'

25일 오후 4시. 더위가 한풀 꺾일 시간이지만 차량 온도계는 여전히 섭씨 30도를 가리켰다. 한국원자력연구원과 국방과학연구소 방문 일정을 마친 오원철 전 경제수석·김창규 전 공군참모총장 두 원로는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아 고 최형섭 장관과 박충훈 대통령권한대행의 묘에 참배했다.

"우리 자리가 저기 어디메쯤"이라는 김창규 전 총장의 말에 오 전 수석은 말없이 따라 웃었다. 이들은 자신들보다 먼저 눈을 감은 이들의 명복을 빌며 헌화하고 묵념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 두 원로는 잠시 웃음과 말을 거뒀다. 한국 과학과 이공계의 역사에 잊을 수 없는 큰 족적을 남긴 네 명은 이렇게 만났다.

이공계 쉰들러 김 전 총장과 대한민국 공업화를 이끈 세 사람의 테크노크라트. 이들의 인연은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당시 공군본부 행정참모부장이었던 김창규 전 총장은 공군기술장교 제도를 만들어 이공계 대학 재학생과 학위를 가진 사람을 공군기술장교로 받아들인다. 전후 국가 재건을 위해서는 이공계인을 구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 제도로 공군기술장교가 돼 전란 중에 목숨을 구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오늘 김 전 총장과 함께 대덕을 찾은 오원철 전 수석, 그리고 현충원 국가유공자묘역에 나란히 묻혀 있는 최 장관과 박 권한대행이다. 1950년 12월 공군기술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한 세 사람은 함께 훈련을 받고 공군장교로 복무했다.

이들 세 사람의 이공계인은 1961년 5월 군사혁명 후 다시 모였다. 혁명정부의 상공부 장관으로 취임한 정래혁 육군 중장은 행정관료 중심이었던 상공부의 개혁을 주도하며 우수한 인재, 특히 엘리트 기술자들을 영입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상공부는 기술 전문가인 테크노크라트들로 채워졌다. 박충훈 차관과 최형섭 광무국장, 오원철 화학과장을 비롯해 이태현 공업국장, 함인영 차관보, 박승엽 과장 역시 공군기술장교 동기생들이다.

▲고 박충훈 대통령 권한대행의 묘. ⓒ2012 HelloDD.com

박충훈 대행은 1961년 공군을 소장으로 전역한 뒤 바로 상공부 차관에 임명됐으며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상공부 예산삭감의 부당함을 항변해 상공부 직원들의 존경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1963년 상공부장관에서 수출산업공단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박 대행은 10개월만인 1964년 5월 상공부장관으로 재임명된다.

이후 3년 5개월간 장기근무를 하며 '수출장관'으로 불렸던 박 대행은 새로운 수출전략팀을 이끌어갈 재능있고 젊은 테크노크라트들을 과감하게 발탁했다. "우리나라의 모든 공업을 수출체제로 전환하라"는 특명과 함께 37세의 젊은 화공학전문가 오원철 수석도 경공업과 화학공업을 담당하는 공업1국장에 임명됐다.

박 대행은 자신이 장관에 정해졌다는 것을 알자마자 개인적으로 오 수석을 불러 상공부가 취해야 할 수출전략에 대해 미리 의견을 교환했다. 박 대행은 장관 취임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약한 1964년 1억달러 수출목표를 숨기고 직원들에게는 목표를 1억 2000만달러로 발표했다.

8개월 안에 매월 평균 1000만 달러 이상을 수출해야 하는 당시로서는 비현실적 목표였다. 박 대행은 "현재 우리가 겪는 외환위기 해결책은 수출밖에 없다. 혼신의 힘을 다하자. 책임은 내가 진다"며 반발하는 수출업계를 설득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1억달러 목표는 예상보다 일찍 달성됐다. 1964년 11월 30일 최초로 거행된 '수출의날' 기념식에서 오 수석은 수출 1억달러 돌파에 공헌한 공로로 훈장을 받는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장관이 대통령에게 약속한 1억 2000만 달러 수출목표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고 시간은 채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 1964년 12월 31일 밤 10시. 박 대행은 대통령에게 마침내 수출대금 1억 2000만달러가 입금됐음을 보고했다.

전년 대비 39.3%의 신장률과 아울러 제1차 5개년 계획의 목표인 1억 1750만 달러를 초과달성한 것이다. 밤낮으로 수출현장을 뛰어다니며 땀과 눈물을 쏟았던 오 수석과 상공부 직원들은 대통령과 통화하는 장관 뒤에서 다함께 만세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고 최형섭 전 장관의 묘. ⓒ2012 HelloDD.com

상공부 광무국장으로 박 대행과 함께 수출제일주의 시대를 견인했던 최형섭 장관은 한국원자력연구소장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초대소장을 거쳐 1971년 과학기술처 장관이 된 뒤 같은해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에 임명된 오 수석과 함께 대한민국 공업화의 밑그림을 완성시켰다.

최 장관은 2004년 6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1919년 제주도 출생인 고 박충훈 대통령권한대행은 상공부 장관(1963~1966)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이사장(1979), 대통령 권한대행(1980) 등을 역임했으며 2001년 3월 16일 영면에 들었다.

'유신과 중화학공업-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의 저자 김형아는 6·25 전쟁 당시의 공군기술장교제도와 이들 상공부 테크노크라트들의 연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도의 자격을 갖추고 미 공군식 교육을 통해 강한 자제력과 목적지향적 효율성을 몸에 익힌 상공부 테크노크라트들은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룩하는 핵심이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이상대로 '근대화'를 실천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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