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프론티어 성과대전 '교과부 장관상' 김지현 생명연 박사 인터뷰
"프론티어 사업, 좋은 R&D 모델…전략 분야는 좀 더 밀어줘야"

"미생물 유전체를 해마다 한 종씩 해석을 해서 10년간 10종을 해석할 계획입니다." 김지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시스템연구본부 바이오합성연구센터 박사의 야심찬 포부에 다들 처음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간과 예산, 당시의 기술 수준을 감안했을 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진지했다.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일이었지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사업단 시작하면서 목표를 확실히 정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휴먼 게놈 프로젝트에서 인간 유전체 초안이 막 완성되었을 때였거든요. 그때 당시만 해도 미생물 유전체 해석에 3억에서 5억 정도 들어가는 일이었어요.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다들 우려했죠. 연구원의 유전체 분석 역량이 크지 않았을 때였고요.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더라고요. 프론티어 사업이 시작되면서 국내 관련 인력들이 조금씩 축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차근차근 추진했죠.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1년에 10∼20종은 거뜬하게 해석이 가능하죠. 기술의 진보가 이뤄진 셈입니다." 그의 자신감은 곧 성과로 나타났다.

꾸준한 연구 결과, 김 박사는 미생물 유전체 정보기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하고 미시간주립대학교 렌스키(Richard E. Lenski) 교수와 프랑스 조셉푸리에대학교 슈나이더(Dominique Schneider) 교수와 공동으로 생명체의 진화 과정과 환경적응의 상관 관계를 규명, 진화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공로로 프론티어 연구성과 지원센터에서 주관한 '2011 프론티어 연구성과대전'에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특히 김 박사의 연구 결과는 네이처 아티클 논문으로 게재돼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우리나라에서 네이처의 아티클 논문급으로 소개된 경우는 손가락으로 꼽는다. 김 박사팀은 유전체 분석 기술을 이용하면 실험실에서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대장균에서 여러 세대에 거쳐 일어나는 진화 과정의 실시간 추적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 여러 해에 걸쳐 관련 실험을 전개한 데이터를 분석해 결과를 도출해냈다.

그 결과 까다로운 네이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김 박사의 포기할 줄 모르는 근성과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제공해 준 프론티어 사업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의 자신감은 어릴 때부터 축적돼 왔던 일종의 신념에서 비롯됐다. 강원도 태백 출신인 그는 어릴 때부터 과학자의 꿈을 키워왔었다. 의대로 진학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식물과 미생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었던 그는 서울대 농생물학과에 진학했고, 이후 코넬대로 진학해 생명공학으로 식물병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김 박사는 "미생물의 유전체 연구는 생명의 신비를 풀 청사진을 제시하는 '보물지도'와 같다"며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개척자 정신이 이 길로 이끈 것 같다"고 현재의 일에 대해 만족감을 표했다. 실험실 귀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연구에만 몰두했던 그였다.

대학시절에는 밤늦게까지 실험실에 있으면서 출출해지면 라면에 고량주를 먹었다. 그러다 받은 것이 '시한부 선고'였다. 김 박사는 "대학원 시절 하루 종일 공부와 씨름하며 끼니를 라면으로 때울 때가 많았다"며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 건강이 나빠졌다. 앞날이 캄캄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줄 모르는 오기의 사나이였다. 김 박사는 건강해지기로 마음먹고 술도 끊고 건강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시한부 선고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국비 유학생 자격으로 코넬대학 유학길에 오른 또 한 번 정신적인 시련을 겪어야 했다.

부모님께서 경제적 시련을 겪으면서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그에게 아르바이트는 생계유지를 위한 희망줄이었다. "아침 2시간, 저녁 2시간동안 온실에서 식물에 물을 주는 아르바이트로 간간히 생활비를 마련하는가 하면 학교에서는 식물에 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연구하느라 정신없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헛된 시간은 아니었는지 좋은 곳으로 갈 기회를 얻었죠. 그때가 기로였습니다. 귀국하느냐 남느냐 였거든요. 그때 발동했던 게 제 알량했던 애국심이었죠. 아이를 한국에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국비로 유학했으니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 많았어요. 그래서 들어오게 됐죠." 때마침 자리가 났던 곳이 생명연이었다.

프론티어 사업단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미생물 유전체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준비가 한창인 때였다. 김 박사는 "귀국해서 여기 저기 다니면서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많이 피력했던 것 같다. 여러 분들의 노력으로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다"며 "생명연에서 미생물 분야에 대한 차세대 대형 국책 과제에 대한 아이이어들이 인큐베이션 됐던 것 같다. 그래서 프론티어 사업에 선정되고 나서도 안정적으로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프론티어 사업은 그에게 행운이었다. 10년 동안 안정적인 지원을 통해 다른 것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덕분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김 박사는 "프론티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R&D 시스템이 업그레이드 됐다고 생각한다"며 "정부와의 R&D 협약이 연 단위로 진행됐었던 것에 비해 프론티어는 3년 단위로 평가가 진행됐다. 이런 부분도 성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실험이 진행되는 실험실 내부. ⓒ2012 HelloDD.com
2002년부터 교육과학기술부 21C 프론티어 미생물유전체활용기술개발사업의 안정적인 지원을 받기 시작한 김 박사는 진화 분야 석학인 렌스키 교수와 공동으로 장기간 배양에 의한 진화(long-term evolution) 실험과 세대별 적응도 분석을 수행했다.

렌스키 교수는 20년 넘게 자신의 실험실에서 대장균을 배양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김 박사는 그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했다. 유전체 염기서열 해독에 대한 기술이 없었던 렌스키 교수에게는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고, 김 박사에게도 절호의 기회일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둘은 곧 손을 맞잡았다. 렌스키 교수는 대장균 조상 균주와 후손 균주의 직접적인 포도당 경쟁을 통해 환경 적응도를 정량적으로 비교하는 실험을 4만 세대에 거쳐 진행했고, 김 박사팀에서는 대용량 유전체 염기서열 해독을 통한 돌연변이 서열의 분석 연구를 담당했다.

약 20년에 걸친 장기간 진화실험 과정에서 유전체 돌연변이 양상의 수만 세대를 추적한 것은 이번 연구가 세계적으로 유일하다. 인류의 역사가 통틀어 약 8000세대에 불과한데, 대장균을 통해 5배에 해당하는 세대별 진화 과정을 추적하고 분석한 것이다.

그들의 연구 결과, 환경 조건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조건이라 하더라도 유전체 변이 속도와 환경적응도 간 상관관계는 일정하지 않음이 처음으로 입증됐다. 또 단백질로 만들어지는 부위에 발생한 돌연변이는 모두 아미노산 서열이 바뀌는 종류의 것이었으며, 대부분 돌연변이가 개체에 유익한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에 따르면 대장균의 진화는 2만 세대까지 시간에 비례해 돌연변이 수가 일정하게 증가했으나, 환경에 대한 적응도는 진화초기인 약 2000세대까지만 급격히 증가했다가 이후에는 돌연변이 증가폭이 점차 감소했다. 2만 세대에서는 증가 추이가 미미했다.

그러나 4만 세대에서는 돌연변이 발생이 폭증했다. 연구팀은 이에 대해 2만5600세대 경에 특정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 염기서열 복제의 오류가 정상세포보다 크게 증대된 데에 기인한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생명체 진화 메커니즘을 밝히려는 노력에 기여하게 돼 뜻 깊게 생각한다. 진화 개념을 응용하면 산업적으로 바이오합성 균주 시스템 최적화 등을 도모할 수 있다"며 "대장균이 시간에 따른 변이와 함께 나타나는 환경 적응을 통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모델로서 매우 중요한 균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공동 연구팀은 장기 실험진화 균주들의 유전체 서열 변이를 비교 분석하고 각각을 실험적으로 검증함으로써 유전체에 새겨진 유용형질의 진화 궤적과 개체의 환경 적응도 향상 패턴 사이의 상호 관계를 처음으로 밝혀냈다.

이를 통해 생명 진화 연구의 전기와 세포 공장을 이용한 고효율 바이오 합성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 "10년간 내 사람들과 함께 일했죠"…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2명 전환

안정적인 연구 환경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더욱 더 공고히 했다. 12명의 연구원 중 과반수이상의 사람들이 10년 간 연구를 함께 해왔다. 자신이 그만두는 경우가 아니면 해고되는 일은 없었다. 김 박사는 "프론티어 사업의 장점이 안정적인 연구 활동을 위해 지원되는 연구비에 있다.

인건비를 벌러 다닐 일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에 처음부터 함께 한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연구를 할 수 있었다"며 "사람이 연구를 한다. 축적되는 역량을 우습게 볼 수 없다는 말이다. 함께 해온 시간이 점차 늘어갈수록 성과 역시 질적인 면에서 효과를 거두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가 가장 뿌듯해 하는 점은 이들 모두가 전문가로 우뚝 섰다는 점이다.

10년간을 함께 해 온 이들이 어디에 가서든 연구를 끌 수 있는 책임자 급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가장 기쁜 일일 수밖에 없다. 비정규 계약직으로 들어온 이들도 실력을 인정받아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김 박사는 "인재가 곧 국력이라고 생각한다.

곧 프론티어 사업이 끝나긴 하지만 이들과 계속 함께 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제가 담을 그릇이 안 된다고 하면 좋은 곳에 소개를 시켜주고 싶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사실 현재 김 박사의 마음은 불안한 상태다. 올해 3월로 프론티어 사업이 종료되기 때문이다.

그는 "프론티어 사업이 끝난 다음에 후속이 없다. 아쉽다. 어쨌든 국가가 나서서 연구에 대대적인 지원을 해준 셈인데, 그냥 끝내지 말고 전략 분야는 좀 더 살려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며 "프론티어 사업 중 각 분야별로 하나 정도, 성공 모델이었다고 평가되는 것은 계속해서 밀어줘야 한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프론티어 사업이 당시 시작할 때만해도 단군 이래 최대·최장 연구 지원 프로젝트라고 불렸다. 좋은 R&D 모델이다. 미국이 처음 사람을 달에 보낸다는 계획을 세웠듯이 우리 역시 그런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 역량을 갖췄다"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하는 것이 있다.

의지 하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안정적인 연구 환경 기반이 갖춰진다면 우리나라 국부 창출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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