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첨성대 제작한 류재하 경북대 교수
"출연연과 예술협력 의사 있어…과학과 예술은 원래 한 몸"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원장 김흥남)의 잔디밭에 어스름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던 17일 오후 5시 무렵. 잔디 한쪽에 서 있던 초로의 남자가 지금은 이곳의 명물로 자리잡은 '미디어 첨성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첨성대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던 그는 함께 동행한 남성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연구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사라진 후 곧 미디어 첨성대에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미디어 첨성대를 고안하고 제작한 류재하 경북대학교 미술학과 교수였다. 그가 평일도 아닌 주말에, 인적조차 드문 연구원을 방문한 이유는 미디어 첨성대의 점검 때문이었다.

지난 달 중순에 세워진 이후부터 치면 이번이 대략 여섯 번째 방문. 엔지니어처럼 능숙하게 기계를 만지더니 미디어 첨성대에 입힐 다양한 콘텐츠를 적용해보고 제대로 작동을 하는지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류 교수는 "콘텐츠는 끝이 없다. 업그레이드할 때마다 이곳을 찾는다"며 "현재 미디어 첨성대 안에는 6가지의 콘텐츠가 들어있다"고 설명했다.

덥수룩한 머리에 대충 둘러 맨 머플러,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면바지와 갈색 점퍼를 갖춰 입은 그의 모습에서는 예술가의 예민함 보다는 오히려 털털한 면모가 덧보였다. ETRI가 제 집인 양 어딘가에서 라지에이터를 끌고오더니 "춥죠?"라고 한 마디 건넨다. 인터뷰에 앞서 스스로 긴장이 풀리고만다. 류 교수는 지난 G20 서울정상회의 때 뜻하지 않은 유명세를 치뤘다.

다름아니라 바로 '미디어 첨성대'가 코엑스 동관 로비에 설치돼 많은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미디어 첨성대는 가로 세로 20cm인 정사각형 발광다이오드(LED) 1350장으로 구성된 조형물로, 본래 첨성대 3분의 2 크기로 제작됐다. 수천 개의 LED에서는 한자 한글 문창살 천마총 등과 같은 역사이미지 등 다양한 영상이 나타난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지역 작가 출신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가 미디어 첨성대를 구상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서양화를 전공한 그가 영상을 작품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 부터였다. '시대가 바뀌면 미술의 재료와 형태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통과 현대의 결합에 관심을 갖게 된 후 부터는 모든 것이 미술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첨성대 역시 같은 차원에서 그의 작품 제작 데스크 위에 올라온 것이다.

"5년 전이었던가. 경주에 가서 첨성대를 봤는데,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그 가치에 비해 사람들에게 외면받고 있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첨성대가 조형적인 구조하고 전통 과학기술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니까 첨단기술과 결합한다면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류재하 교수가 미디어 첨성대에 콘텐츠를 입히고 있다.   ⓒ2011 HelloDD.com

미디어 첨성대는 그의 2호 작품이다. 1호 작품은 서울 붕산문화거리 앞 '봉산 하늘-미디어 스카이'다. 'LED로 작업하는 미디어 조각가'라는 흔치 않은 타이틀 덕분에 국가적인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가 제작한 미디어 첨성대를 보고 많은 이들이 전통 과학기술과 첨단 미디어의 결합에 감탄을 금치못했다.

그러나 미디어 첨성대의 탄생에는 굴곡이 자리잡고 있다. 예산 부족으로 미디어 첨성대는 해체 위기를 겪어야 했다. 수억 원에 달하는 작품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가 없었다. 그는 "ETRI 기부금으로 다시 복원한 것이다.

해체 될 때 사실 말이 많았다. 어떻게 해체하느냐고 말은 많이 했지만,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며 "국격을 높여보자는 의미에서 제작했던 건데, 너무 쉽게 해체가 돼 허무하기도 했다.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미디어 첨성대는 이제 ETRI의 불을 밝히고 있다. 류 교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체와 컨텐츠가 어떻게 맞물리느냐다. 맞물리는 와중에 줄 수 있는 감동이 커야 한다"며 "미디어 첨성대를 통해 사각형의 전광판 고유 패턴이 다양성을 가지게 됐다.

제3호 작품으로 전광판을 이용한 비너스도 제작했다. 미디어 첨성대보다 더욱 정밀하게 만들어졌다. 돈이 많이 들었다"고 유쾌하게 설명했다. 그가 전통 과학에 눈을 돌렸던 이유는 원래 한 몸통이었던 예술과의 결합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대덕연구개발특구 내 정부출연연구기관들과도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류 교수는 "중국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중국을 비하하고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조품 만드는 기술 보면 대단하다. 우리 눈에 보기에 거칠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며 "연구원들이 섭섭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기술은 평등하게 돌아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된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술도 창의적인 정신이 있어야 나온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특구는 너무 삭막하다. 삭막한 곳에서 어떤 창의적인 것이 나오겠나. 평등화에서도 우위에 서려면 창의적인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연구단지가 꼭 1970년대 같다. 그때에 머물러 있다. 교류도 안 하면서 왜 뭉쳐있는지도 의문스럽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류 교수는 "차 타고 들어오다가 어느 연구원 입구에 전광판이 세워져 있는 걸 봤다. 그 전광판과 미디어 첨성대가 다를 게 없다. 똑같은 돈에 똑같은 재료인데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며 "똑같은 기술도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기술의 개발도 중요하지만 활용도 중요하다. 기술의 활용을 생각하려면 울타리 속에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냥 이건 뭐 3자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그렇다는 거다. 민감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밝게 빛나는 미디어 첨성대. ⓒ2011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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