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②]연구과제 수행의 그늘…인건비 충당위한 선택
뛰어난 아인슈타인들의 무덤 '출연연'…현실과 이상의 차이 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 나쁜 것들이 좋은 것들을 압도하는 사회 병리현상을 설명할 때 많이 이용되는 경구다. 과학자들은 PBS 제도를 이처럼 '존 그레샴의 법칙'에 빗대고 있다.

과학자들의 순수 경쟁을 위해 만들어진 PBS가 연구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PBS의 존치를 위해 연구하는 꼴로 앞뒤가 바뀌었다는 지적이다. 과학기술계에 만연해 있는 PBS의 가장 큰 그늘은 '인건비 확보' 문제다. PBS로 인해 실질적인 인건비가 지원되지 않아 생기는 병폐들로 연구현장이 병들고 있지만, 통제와 규제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PBS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정부는 15년 째 나몰라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례로 똑같은 연구 과제를 대학 교수와 출연연 연구원이 각각 수행한다고 가정해보자. 5000만원 규모의 과제를 가지고 연구를 수행할 때, 대학 교수는 외부 인건비와 직접비로 운용하면 되지만, 출연연의 연구원들은 내부 인건비까지 포함해 운용해야 한다는 차이가 발생한다. 같은 비용을 가지고 연구를 하지만 사용하게 될 운용비는 연구원이 더 많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다.

PBS 제도의 문제점은 결국 연구원들이 직접 자신의 인건비를 벌어와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것만으로끝나지 않는다. 내부 인건비의 경우 기관 분담금까지 포함돼 있어 연구원이 느끼게 되는 부담감은 훨씬 커지게 된다. 5000만원 규모의 과제를 했을 때 오버헤드를 떼고 나면 약 80% 정도의 예산이 남는다.

대학 교수는 학생 인건비와 연구할 때 사용할 비용만 생각하면 되지만, 연구원들은 자신의 인건비와 학생 인건비, 연구할 때 사용할 비용을 모두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 교수는 필요한 연구를 하기 위해 5000만원 짜리 과제를 하지만, 연구원의 경우 인건비를 위해 5000만원 짜리 과제를 몇 개 이상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한다는 것과 인건비를 확보하기 위해 연구를 해야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럼에도 연구원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또 있다. 일정 경력 이상되는 연구원들의 경우 목표 연봉이라는 것이 발생한다. 모든 연구원들이 정해져 있는 연봉에 준할 만큼 인건비를 따와야 연구원의 운영이 가능하다. 연구원들의 연봉을 학생 인건비로 돌려도 목표 연봉은 존재하기 때문에 과제를 따와야 하는 부담감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지금의 과학기술계 현실이다.

인건비 확보는 그대로 평가의 잣대로도 사용된다. 아무리 다른 실적이 좋아도 할당된 만큼의 인건비를 확보하지 못하면 낮은 평가를 받게 된다. 기관 입장에서도 연구원들이 따온 과제로 인건비를 해결하지 못하면 전체 인건비가 펑크나는 상황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다 보니 연구원 1인당 수행하는 연구과제 수가 평균 4∼5개에 이르고, 심지어 10개에 육박하는 연구원들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여러 연구과제를 수행하면서 연구 외에도 실사나 평가 준비에 힘을 쏟아야 한다. 이쯤되면 질좋은 연구활동은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연구의 지속성을 위해 과제 제안은 연구 수행 중에도 계속 될 수 밖에 없다.

과제를 따려면 제안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도 두달 여의 시간이 걸린다. 과제 승인이 나는 것도 100%가 아니다. 100% 통과된다고 해도 4개의 과제를 하려면 8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한 과학자에게 '도대체 어떻게 과제를 따느냐'는 질문을 했더니 "그래서 잠을 못자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답했다. 실험에 집중하지 못하고 과제를 위한 문서작업에 시간을 쫓겨야 하니 과학자로서 느끼는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부족한 인건비를 충당하기 위해 연구 책임자의 과도한 연구수주 활동 때문에 출연연의 고유 역할이 희미해 진지도 오래다. 자잘한 1~3년 단위 연구프로젝트가 대부분이다보니 이렇다할 성과조차 드물다. 권철신 산업기술연구회 이사장의 체험담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지난 5월 이사장 취임 후 산하 출연연 연구성과 실태를 파악해 보고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수천여개의 연구과제들 중 소위 세계 최고 수준의 과제가 얼마나 되는지를 살펴봤지만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굳이 열거해도 3~4개 정도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는 'PBS같은 걸 왜 하느냐'고 현장 연구원들에게 물으니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돌아오는 말에 아예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덕넷과 정두언(한나라당) 의원실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과학기술 관련 정책 중 PBS제도가 출연연 생산성 향상에 큰 걸림돌인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설문결과 기사 바로가기 - 'PBS 제도' 15년 성적표?…과학계 10명중 7명 '연구에 有害'

과학기술계 한 원로 과학자는 "출연연 과학자들이 국가 미래 신성장동력을 창출할 수 있는 연구에서 벗어나, 단기적인 연구성과에 치우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며 "PBS의 문제는 과학기술계의 총체적인 질적 저하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 "PBS때문에 비정규직 양산"…아인슈타인같은 과학자 키우도 싶어도 못키워

"뛰어난 아인슈타인을 뽑고 키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죠. 그렇지만 인력을 뽑을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계약직도 뽑기 힘든 요즘입니다. 당장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연구를 진행할 수 있어요.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인재 양성은 턱도 없는 일이죠."

출연연 A 박사는 우수한 연구인력 확보가 해결해야할 과제 중 1순위다. 그러나 연구수행을 위해 사람을 뽑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당장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창의적인 연구는 요원할 수 밖에 없다. 연구과제 수행에 필요한 적정한 인건비가 책정되지 않아 유발되는 비정규직 문제는 출연연의 오랜 골치거리다. 대부분의 연구 책임자들은 부족한 인건비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적게 드는 비정규직 연구원을 고용해왔다. 3년짜리 과제를 한다고 치면, 1년차는 예비 실험을, 2년차는 본격 실험, 3년 차는 마무리를 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비정규직의 경우, 묶여있지 않고 자유롭다보니 1, 2년 사이 관두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미래가 명확하지 않으니, 다른 곳에서 러브콜이 들어오게 되면 바로 관둬버리는 것이다. 기간 만료된 비정규직 연구원이 나가고, 다시 비정규직 연구원을 받으면 이들에게 다시 새로운 교육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반복된다.

특히 실제 연구과제 수행 인력들이 비정규직에 해당되다 보니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연구 역량 축적에도 허점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 많다. 출연연 관계자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체념하고 있다. '본인의 발전을 위해서 간다는 사람들을 잡을 수야 없지 않겠느냐'는 대답이다.

어느 정도 연구 수행에 적응을 한 직원들을 내보내고 다른 인력을 수혈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비효율적이지만 PBS 제도 아래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출연연 비정규직 인력은 정규직 인력 규모와 거의 차이가 없다.

기초기술연구회 산하 소속 출연연의 비정규직 비율은 53.2%, 산업기술연구회 소관 출연연은 45.2%다. 이같은 비율은 공공 부문 비정규직 비율의 2.5배나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것도 10여 년 이상 지속적으로 증가해 오다가 50%대에서 고착화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PBS 문제와 더불어 인력확보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 공공기관 관리지침 규정이다. 기획재정부의 공공기관 관리지침에는 기관 총인건비를 제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연구원에서는 인력을 마음대로 충원하지도 못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A 박사는 "인력에 대한 재량권이 연구원에 주어진다면 인력 양성시스템이 어느 정도는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며 "어느 곳에서나 좋은 인재를 끌어들이고 싶은 욕심이 있고, 기관에서 스스로 인재를 키우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과학계 한 원로는 "출연연이 몇몇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연구하는 곳이라면 존재 가치가 없다"며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는 것은 출연연 존립의 근거인데 이 마저도 현재 길이 막혀 있다. 정부 차원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 과제많다 아우성인 과학자들 달래려 '3책 5공' 제도 실시, 결과는?

PBS 제도로 인해 과제가 많아지자 정부가 꺼내놓은 카드는 교육과학기술부의 '3책 5공 제도'와 지식경제부가 제안한 '참여율 제한'이었다. 이같은 대안들은 과도한 연구개발 과제 수주 경쟁을 막고 부실한 연구개발 성과를 차단하기 위해 만든 것. 하지만 이 제도 자체가 PBS 제도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3책 5공은 한 연구자가 책임지는 과제가 최대 3개를 넘지 못하게 하고 동시 수행할 수 있는 과제도 5개로 제한하는 것이다. 참여율 제한 규정은 지식경제부에서 제정한 규정으로, 출연연을 비롯한 전문 연구기관이 국가 연구개발 과제를 진행할 때 인건비 지출은 참여 연구원 총연봉(100%)을 넘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부 연구개발 예산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적용되는 연구인력 참여율 제한제도가 오히려 연구인력의 창의성을 저해하고 짜맞추기식 이중 굴레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참여율 병폐는 연구원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중소기업에까지 불똥이 튀고 있다. 다른 연구원들보다 중소기업 지원이 많은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의 경우 참여율 제한으로 인해 중소기업 지원에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이다.

출연연의 미션 중 하나인 중소기업 지원이 참여율 제한에 묶여 실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원들의 비리를 잡고 내실화한다는 목적으로 참여율 제한을 야심차게 만들어낸 정부 정책이 정작 과학기술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그들의 도움이 절실한 중소기업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형국이다.

출연연 한 과학자는 "한 가지를 해도 진지하게 하고 싶고, 파고들어도 깊이 파고 싶다. 그럼에도 PBS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생각은 안하고, 문제가 되자 그것을 규제하는 제도를 덧붙이기만 하고 있어 연구 현장은 점점 더 왜곡돼가고 있지 않는가"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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