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암연구 세계적 석학 레이몬드 에릭슨 하버드대 교수
"WCI 프로그램, 한국과 미국의 커뮤니케이션이 요구되는 프로그램"

 

"일단 입부터 열어라, 닫힌 입이 운명을 가로막는다." 질문의 중요성을 한마디로 압축한 경귀이다. 유태인의 인구는 세계 인구의 0.3%에 불과하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국적을 분류하면 놀라운 통계수치가 담겨 있다.

수상자 가운데 22%가 유태인이다. 유태인들은 원래 태어날 때 부터 머리가 좋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 유태인들이 머리가 좋은 이유는 남의 지식을 습득하는데 그치지 않고, 입을 열어 의문의 답을 찾아간다는 데 있다.

입과 머리를 열어 사고한다는 것이 그들의 비밀인 셈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원장 정혁) 세계수준의연구센터(WCI)의 책임자를 맡게 돼 지난 해부터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게 된 레이몬드 에릭슨 하버드대 분자세포생물학과 교수. 그 역시 기자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무엇을 연구할 때 있어서 첫 번째는 질문이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학문을 연구할 때 많은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은 기술 쪽으로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의문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모든 테크닉을 적용하는 것이 순서에 맞다. 물론 질문 자체도 정확해야 한다."

에릭슨 교수는 현재 미국 하버드대 분자세포생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네이처와 사이언스를 비롯한 주요 저널에 160여편의 논문을 게재하는 등 세계 최초로 단백질의 티로신 부위 인산화와 암 관련성을 발견한 암연구 선두과학자로 꼽히는 석학이다. 미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래스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한국에 온 이유는 놀랍게도 사명감 때문이다. 에릭슨 교수는 "한국 과학이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추세다. 그 과정에서 다른 나라의 연구자들과 교류가 요구됐다. 미국과 한국의 커뮤니케이션이 요구되는 프로그램"이라며 "내가 바로 이 대목에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런 활동이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동기를 설명했다. 에릭슨 교수가 한국을 찾는 데는 생명연 WCI 부센터장으로 재직 중인 김보연 박사의 공도 컸다. WCI의 성공적 개소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센터를 이끌 석학이었다.

김 박사는 "에릭슨 교수님 연구실에서 지도를 받았던 한국인 연구자들이 많았다. 이들 중 여러 사람들이 미국에서 현재도 독립적으로 연구를 수행 중인데, 이 분들과 인연이 있어 에릭슨 교수님을 알게 됐다"며 "WCI 프로젝트를 유치하게 되면서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응해주셨다"고 설명했다.

에릭슨 교수를 주축으로 한 'Kinomics 기반 항암연구센터'는 오는 2014년까지 매년 25억원씩 총 125억원의 연구비를 지원 받아 연구를 수행할 예정이다. 전세계 남성 암발병율 1위인 전립선암과 여성 암 발병률 1위인 유방암 등의 원인 유전자와 단백질을 발굴해 그 기능을 규명할 계획이다.

나아가 미생물·약용식물을 이용한 신개념의 천연 신항암 후보물질 및 세포 단백질 기능대체 유사 합성물질(Peptidomimetics) 발굴을 목표로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기존 항암제의 부작용을 대폭 줄일 수 있는 암 치료물질 발굴이 기대된다. 에릭슨 교수는 "현재 국제적으로 이 분야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연구 주제 자체가 프론티어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며 "다른 곳과의 협력을 통해 최신 기술들을 여기에서 배울 수 있고, 또한 최신의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국제적으로 상당한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 "애초부터 3년 생각하고 센터 개소했으면 그건 잘못"

"아직까지 성과를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한참 과정 중에 있다. 3년 정도는 기본적으로 연구를 해봐야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다. 한국 정부에서 WCI와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 때 2∼3년 정도해서 나올 수 있는 엄청난 결과를 기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장기적인 기대를 가지고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 에릭슨 교수는 단적인 예로 미국과의 연구개발 환경을 비교했다. 그는 "미국의 경우 7년짜리 과제를 받으면 그 기간 동안에는 아무런 평가가 없다.

처음 과제를 받을 때만 힘들고 그 이후부터는 연구자들이 마음껏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라며 "그러나 한국은 아직까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인들은 감내하지만 외국인들은 감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아직까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권위적인 부분 역시 그의 눈에 띤 한국의 고질적인 습성. 에릭슨 교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부분들이 많다. 연구에 관해서는 서로 평등하게 상호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아주 조그마한 부분에서 서로의 기분이 상하게 되면 연구 진행 자체도 어려움에 처해질 수 있다.

한국 과학기술계 시스템 개선이 기대되는 부분"이라고 조언했다. 'WCI 센터 임무가 끝난 후, 한국에서 다시 초청한다면 흔쾌히 수락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시 올 것이다. 한국의 긍정적인 실험 문화를 그동안 많이 봤다.

한국인들의 그런 점들이 미국 사람들의 정신과도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에서는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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