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록 생명연 박사, 바이오 분야 원천기술 확보
"항암제 상용화까지 30년 소요, 장기적 지원 중요해"

"암세포와 정상세포는 다른 점보다 닮은 점이 더 많아 항암제를 투여하면 정상세포도 함께 죽기 때문에 탈모와 구토, 피로감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죠. 따라서 암세포만 공격할 수 있는 타겟 발굴이 중요합니다. 타겟(target) 발굴이야말로 항암제 개발의 첫 단추입니다."

2011년 현재 국내 사망률 1위는 '암'이다. 완치가 어려워 환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지만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유전자 정보가 속속들이 밝혀지며 인류에게 정복당할 날이 머지않았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의학유전체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인 정초록 박사는 미지의 유전자를 규명하는 연구에 관한한 한국판 컬럼버스나 다름없다.

지금까지의 연구업적을 감안한다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앳된 얼굴이지만 항암제 개발용 타겟 연구에만 거의 10년을 올인 한 '달인'이라 할 수 있다.

2006년 7월 암 증식 단백질 UPC의 기능을 규명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에니그마(Enigma)와 암발생억제유전자와의 관계를 첫 발견하면서 간암, 위암 등 암 표적치료제 개발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올 1월에는 생명연 26주년 기념식에서 임동수 박사와 함께 우수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0년을 한결같이 실험실을 지키고 있는 그는 연구성과가 가시화되면서 많은 인터뷰 요청을 받아 왔지만, 실험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정중히 사양하곤 했다. 이번 인터뷰 요청에도 점심시간의 짬을 잠시 허용했을 뿐이다. 연구에 대한 열정의 또다른 표현이기에 기꺼이 찾아갔다.
 

▲실험실 동료들과 함께한 정초록 박사(오른쪽에서 두번째), 대학생 같은 앳된 외모
이면에는 연구열정으로 가득차 있다.
ⓒ2011 HelloDD.com

◆ 4년 만에 첫 성과, 후속 연구가 더 중요

"항암치료 타겟은 '암세포에만 발현을 할 것, 효소활성을 할 것, 발암기전이 명확할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합니다. 이러한 유전자를 발굴해 항암제 타겟으로 가능하다고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원천기술이죠."

정 박사는 지난 3월 종료된 21세기프론티어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을 통해 암 표적 치료제 개발용 타겟 2종을 처음으로 제시하며 원천기술을 독자적으로 확보했다. UCP는 효소활성, 명확한 기전, 발암성을 확증했고, 에니그마는 특이적 기전과 발암성을 검증했다.

에니그마(Enigma)의 발암성을 근거로 하는 암 치료기술에 관한 연구 결과는 국제적으로 저명한 논문인 'J Clinical Investigation' 2010년 12월에 게재했다. 현재 해외특허 출원을 하고 등록을 진행 중이다.

연구의 시작은 2002년 5월, 21세기프론티어 인간유전체기능연구 2단계 사업을 수행하던 임동수 박사와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이 연구자들에게 유용할 것이라며 공개한 리스트에 있는 유전자들이 발암과 관련있는지 검증하는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타겟 발굴 연구를 진행해 왔다.

바이오분야는 1~2년 연구로는 깊이 있는 결과를 얻기 힘든 분야다. 그럼에도 당시 출연연에는 단기성과를 강조하던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같은 분위기를 깬 것은 당시 실험 책임자였던 임동수 단장이었다.

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연구를 진행해 영향력 있는 성과를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팀원들을 독려했다. 연구가 첫 성과를 보인 것은 2006년. 연구시작 4년 만에 UCP로 첫 성과를 냈다.

2010년에는 UCP 기전 중 허혈성 질환 치료에 도움을 될 만한 기전을 해외에 특허 출원했다. 현재 UCP를 저해할 수 있는 유효화합유기물까지 도출했으며, 타겟 분자 UCP를 과발현시킨 마우스 모델을 활용한 맞춤치료를 위한 바이오 마커 발굴 시스템을 확립했다.

에니그마에 대한 연구는 2006년 시작해 프론티어사업 종료 직전인 2010년 12월에 논문으로 출간됐다. 에니그마의 원천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특허를 미국, 일본, 유럽에 출원했다. 올해 5월의 일이다.

정 박사는 세포단계에서 검증한 내용을 형질전환 생쥐를 통해 유전자를 과발현 시키는 방법으로 검증, 에니그마가 과발현된 생쥐가 암에 걸리는 것을 확인했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에니그마가 간암, 위암 등을 포함하는 암 표적 치료제 개발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간 에니그마와 암 발생 및 진행과의 연관성은 전혀 알려진 바 없었다.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유전자 기능을 하나 밝히면 그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UCP처럼 암에 도움이 되는 유전자는 허혈성 질환 등 여러 부분에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의 연구가 밭에 씨를 뿌린 것이라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열매를 수확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해야 합니다."

에니그마를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는 앞으로 에니그마가 실현된 형질전환 생쥐를 활용한 발암성을 더욱 심도 있게 검증하고, 에니그마를 억제할 수 있는 화합물을 발굴하여 그 효과를 검증해야 한다.

형질전환 동물실험을 위해서는 한 달에 기본으로 시스템을 유지하는데만 250~300만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실험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사업단의 추가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원천기술 확보가 가능한 과제를 추가로 지원하고 있는 우수유망기술도약지원사업이 다행히 정 박사의 연구를 주목하고 타겟 발굴과 검증을 위한 연구비 지원을 결정했다.
 

▲UCP형질전환 생쥐에서 간암 발생을 확인한 사진 ⓒ2011 HelloDD.com

◆ "10년 동안 매일 같은 일만 했다고요? 연구는 발견이에요"

"우수유망기술도약지원사업을 두고 10년 동안 해도 안 되는데 1, 2년 더한다고 상품화가 되겠냐며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10년 해도 안나오는 이유는 Discovery(발견)와 비슷하기 때문이에요."

우연한 기회에 발견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중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떤 경우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연구자는 연구실을 지켜야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정박사. 그는 "비슷한 주제로 연구하는 해외 연구기관도 많고 다들 한계상황에서 싸우는 만큼 누가 더 인내심을 갖고 누가 더 꾸준히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반복되는 실험 속에서 새로운 것들이 매일 매일 조금씩 바뀌죠. 기술은 똑같아도 안에 내용들은 매일 매일 달라요. 속된 말로 우리 계통에서는 유전자를 증폭시키는 기술인 PCR를 100번하면 100번 모두 결과가 다르다고 해요. 매번 내용과 목적이 틀리기 때문이죠."

정 박사의 일상은 반복이다. 아침에 출근하면 밤새 못본 '세포(cell)'들에게 아침밥을 주며 밤새 잘 있었는지 점검한 뒤 전날 퇴근할 때는 시행한 실험값의 결과를 확인하고, 유전자 발현 변화를 확인한다. 오후에는 형질전환 생쥐를 돌보고 연구자들과 토론한다.

저녁에는 각종의 생화학적실험을 하고 퇴근 전에 다시 세포들에게 밥을 주고 인사한다. 매일 같은 실험을 반복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매일 다른 내용의 실험을 시도하며 그 속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스위스의 노바르티스가 개발한 골수암 치료제 '글리벡'은 하루 1회 복용으로 만성 골수성 백혈병(CML)을 치료하는 맞춤치료 대표 약이다. 글리벡은 타켓분자를 발견한 뒤 약으로 출시되기 까지 30년이 걸렸다.

정 박사는 "타겟분자를 발견한 뒤에도 후보물질 도출, 전임상과 임상 등을 통해 효과를 검증해야 신약으로 제품화되기 때문에 바이오 분야의 연구는 사업화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글리벡의 경우도 한세대를 온전히 투자해 얻은 결과였다.

아쉽게도 국내에는 그런 항암제가 아직 개발되지 못했다. 정 박사의 최종 목표는 '글리벡'과 같은 맞춤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다. 정 박사의 연구는 신약개발 가능성이 크지만, 상품화까지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걸릴지 확신할 수 없다.

때문에 정 박사는 "신약개발을 위해서는 사업화, 제품화 이전에 기초원천기술 확보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생명공학 분야의 기초원천기술 특히 'high risk, high return'이 예상되는 연구 분야는 자본 구조가 열악한 국내 제약기업체가 투자하기가 어려우므로 국가 차원에서 인내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정 박사는 연구에 대한 얘기를 들려줄 때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그럼에도 눈 빛 안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결기가 묻어있다. 타겟을 저해하여 약이 되는 물질을 찾을 가능성이 자신에게 올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맞춤 항암제를 찾는 최종 목표를 위해 그의 연구는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듣는 기자도 덩달아 그의 다부진 꿈이 실현돼 맞춤 항암제가 암을 정복하는 그날이 오기를 고대해 본다.

한편 우수유망기술의 과제풀(pool)을 구축하고 있는 프론티어연구성과지원센터의 송지용 센터장은 “우수유망기술의 성과가 사장되지 않도록 후속지원하는 것은 정책적으로 의미가 크다”며 “정부 대형연구개발사업의 계보가 꾸준히 이어지고, 그 성과가 경제․산업적으로 잘 파급되도록 성과활용․확산을 촉진하며 추적조사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송 센터장은 “정부 대형연구개발사업의 성과를 후속적인 관리와 성과활용․확산으로 성공모델을 만들도록 지원하겠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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