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명장은 국가의 보물-11] '시계장인' 김영범 표준연 박사
"찰나의 순간까지 측정하겠다는 일념으로 30년 연구"

연구실 벽면이나 책상, 책장 등 뭔가를 걸거나 세워놓을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빈틈없이 시계들로 가득 차 있다. 온갖 국적의 그리고 온갖 형태의 시계들이다. 혹시 시계 수집이 취미? 한국표준과학연구원(원장 김명수) 기반표준본부의 김영범 박사 연구실은 다양한 시계들로 꽉 차 마치 시계를 만드는 공방을 연상케 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시계장인'이라고 부른다. 국내에서 막 시간표준을 보급하기 시작한 1982년 연구원에 들어와 시간연구에 열정을 쏟아온 지도 어느덧 30년. 지난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그의 책상 뒤 벽면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수년 내에 모든 국민과 산업현장이 평생 1초도 틀리지 않는 시계를 갖도록 하겠다'는 그의 확고한 목표가 적힌 커다란 플랜카드가 걸려 있다.

◆ 연구원이 될 수밖에 없었던 '다락방 소년' 이야기

그의 어린 시절은 집안의 '골칫덩어리' 그 자체였다. 물론 사고치는 내용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 중학생 때부터 공작이나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부모님 몰래 시계나 라디오, 전화기 등 각종 전자기기를 분해하곤 했다. 집안은 늘 고물상처럼 돼 있었다.

"너 때문에 집안에 남아나는 게 하나도 없어~!" 집안에 있어야 할 물건들을 가져다 못 쓰게 만들어 놓기 일쑤인 그는 어머니에게 혼도 많이 났다. 얼마 후에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 다락방 구석에 온갖 가전제품들을 숨겨놓고 분해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엔 밤늦도록 캄캄한 다락에서 몇 시간씩 머물며 기기를 분해했고, 무더운 여름날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오랜 시간 쭈그리고 앉아 분해하고 조립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각종 기기 안에 있는 조그만 부속품들을 서로 다른 곳에 적용해보기도 하며 다락방에 있는 동안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집안에는 연탄이나 곡식을 보관하는 광이 있었는데, 그곳은 그의 또 다른 비밀기지였다. 그는 광에 질산칼륨이나 숯을 간 탄소가루 등 각종 화공약품들을 감춰놓고 폭약을 만들곤 했다. 어머니는 집에 불이라도 날세라 혼을 내곤 하셨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집안에 사람이 없는 시간을 노려 틈틈이 화약을 만들어 동네 미장원에 던지고 도망가거나 친구들이 걸어가는 뒤편에 던지는 짓궂은 장난도 서슴지 않았다. 비록 학창 시절엔 별난 호기심으로 주변을 놀라게도 했지만, 워낙 명확했던 성향 덕분에 향후 과학계로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는 수월했다고 한다.

학업을 마친 후 1982년도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시간전자파실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국내 한 대기업과 표준연 양측 모두 합격된 상태였다. 고민 끝에 연구원을 택하게 되었는데, 하나의 목표를 갖고 조직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기업에 비해 연구원에서 보다 자유롭게 연구 테마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특히 표준연은 기초물리를 다루기 때문에 연구원들이 자발적으로 테마를 설정하는 것이 수월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국가 목표에 걸맞은 연구테마를 정하고 수행하기에도 유리한 분위기였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돌이켜봐도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사실 입사할 때에는 연구원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대기업에 비해 선호도가 낮았다. 지금 표준연은 국가적으로도 최고의 연구소로 평가받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보낸 세월만큼 연구원이 지금과 같이 발전한 데에 보람도 많이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 시계장인, 시간을 세상에 선보이다
 

▲시간 측정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 박사의 모습.  ⓒ2011 HelloDD.com

"모든 사람들이 시간을 갖고 있지만 시간을 매순간 피부로 느끼진 못하며 살고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없는 세상은 정지된 사진 한 컷에 불과하죠. 그 한 컷 한 컷을 시간 순으로 연결했을 때 비로소 그것은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됩니다."

그가 30년간 시간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간과 삶에 대한 철학이 있었다. 그로 인해 시간은 점차 보이지 않는 대상에서 눈에 띄는 존재로 변모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환경에서 탄생한 수많은 정보들이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 잣대가 필요하다.

과거에 비해 시간의 정확성이나 시간 체계의 동기화가 훨씬 중요해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시간연구의 필요성이 점점 더 증가하는 이유다. 꾸준히 지속돼온 시간연구 덕분에 우리 생활 곳곳에 시간연구의 노력이 깃들지 않은 곳은 없다.

시간 동기화는 올여름처럼 비가 많이 온 경우 발생하기 쉬운 재해를 방지하는데도 활용된다. 강의 상류에는 매순간 비의 양을 측정하는 강수량 센서가 설치돼 있는데, 그 센서에는 항상 시간이 함께 측정된다.

이때 측정된 시간기록을 통해 상류에서 댐까지 이어지는 거리 대비 물이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예측할 수 있다. 댐에서는 강수량과 도달 시점을 토대로 댐에 저장된 강수량을 방출하는 시점을 결정하고 수문을 조작한다.

만약 이때 강수량 센서에 입력된 시간과 댐의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댐에 저장된 강수량을 방출하기도 전에 댐이 붕괴돼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공공기관이나 사건 현장에 설치된 CCTV, 온라인상에서 활용되는 타임스탬프 등 특정 시간의 상황을 기록하는 장치가 있다.

이런 장치에는 특정 시점에 측정된 시간이 기록이라는 형태로 남아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이때 정확하게 동기화된 시간이 없으면 그런 장치들의 존재가 모두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장치에 입력되는 시간을 동기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이는 시간을 발생시키는 '소스'를 찾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된다. 흔히 알고 있듯 가장 작은 시간단위는 바로 '초'다.

이것이 모여 '분'과 '시간'이라는 보다 큰 단위로 나아간다. 시간단위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을 임의로 일정하게 나눈 단위이다. 눈 깜빡할 짧은 순간에도 시간은 엄밀히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초와 초 사이의 시간마저 쪼개 더 세밀한 단위로 나눠 측정할 수 있다면 자연히 시간의 정확도도 높아지게 된다.

김 박사는 시간을 알리는 정확한 전기적인 펄스(충격신호)를 산업현장과 국민이 쉽게 획득해 여러 분야의 시간측정에 활용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시간정보를 나타내는 신호펄스를 전달할 효율적인 방법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최대의 관심사다.

이러한 연구과정을 통해 측정된 보다 정확한 시간이 국민이나 산업체가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동기화된 상태로 보급되길 바라고 있다. 그는 1997년에 이미 모든 국민이 일정한 시간정보를 받아볼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했다.

장파방송에 비해 전달력이 떨어지는 단파방송의 한계를 딛고자 FM 방송주파수에 시간정보를 실어 방송하는 것이었다. MBC, 텔슨전자와 공동연구를 진행해 왔으나, IMF 시절 갑작스런 기업 사정의 변동으로 아쉽게 도중에 그만둬야 했다.

이후에는 기존 라디오방송의 시보서비스를 활용해 모든 시간을 동기화시키는 방식의 부품화된 소형장치를 개발했다. 정각을 알리는 소리주파수를 인지해서 시간으로 반영하는 것. 현재는 중소기업인 (주)에솜에 기술을 이전한 상태로 Penitus라는 상표로 출시된 디지털벽시계의 핵심부품으로 사용되어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다.

따로 시계를 맞추지 않아도 라디오에서 한 시간마다 방송되는 시보서비스에 따라 1초도 틀리지 않고 자동으로 시간이 맞춰진다. 2010년부터는 전기선에 전기만이 아니고 시간정보를 함께 넣어 시간을 알리는 'PLB(Power Line Broadcasting; 파워 라인 브로드캐스팅)' 연구를 우삼용 박사, 이영규 박사 등의 연구원과 함께 수행하고 있다.

전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정확한 시간을 받아볼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로서 스마트그리드를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서의 활용이 예상된다. 신임연구원 시절부터 현재까지 그는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

시간측정의 정확도를 높이고 보급하는 연구는 그의 삶 자체를 더욱 철저한 방향으로 이끌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제대로 해야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에 의문을 가지며, 그 궁금증이 해소될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바로 과학자의 자세입니다."

그의 '시계장인'이라는 별명에는 30년 동안 쌓인 연구자의 신념이 녹아있었다. 그가 시간 측정 연구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하는 데는 우리 국민과 우리 산업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개인의 직업을 넘어 사명으로 연구에 임하겠다는 김 박사의 생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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