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김진경 연변과기대 총장 "동북아 허브 이끌 인재 양성"
"좀 더 큰 삶의 가치를 기대한다"

지난 8월 말 중국 지린성 옌지에서 만난 김진경 연변과학기술대학 총장의 대학 설립과 관련한 경위 설명은 마치 한국 현대사의 일부를 엿듣는 듯하다.

"한국이 어려울때 목숨을 받쳐 싸웠고 일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은 내가 필요없다. 연변의 조선족은 다르다. 오늘 한국이 있기까지 큰 힘이 된 독립군들의 후손이지만 너무 어렵게 산다. 그들을 포함해 한민족 모두가 잘 살기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구석인 옌지에 대학을 세웠다."

김 총장의 중국과의 인연은 이미 30년 전에 시작됐다. 당시 중국사회는 개방의 물결이 막 시작되던 시기로 해외 인재가 무엇보다 시급한 때였다. 어느 날이었다. 평소 안면이 있던 중국의 사회과학원 원장이 그에게 인재 양성에 대한 강연을 부탁해 왔다.

"중국에 와서 보니 몇 시간 강의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으로서 학교를 세운다는 일 자체가 처음이었지만 강한 필요성을 느꼈다. 다행히 중국 정부에서도 환영했다."

그의 중국 생활, 옌볜 조선족을 위한 삶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가발과 의류사업이 성장을 거듭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의 모델이 돼 있었다. 그런 그가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그 자금을 학교 설립에 투자했다. 모두들 '갑자기 웬 학교?'라고 의아해 했지만 그의 뇌리에서는 이미 그림이 그려져 있던 일이었다고 한다.

◆한국전 당시 15세에 입대, 800명중 17명 살아 남아

"15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입대를 하려고 했으나 나이가 안된다고 했다. '나는 조국을 사랑한다'라고 혈서를 썼더니 입대를 시켜줬다." 김 총장의 애국심과 인재양성에 대한 관심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가 유년시절 기독교로 개종한 부친은 선교사와 함께 평양에 학교를 세웠고 1939년 중국 흑룡성으로 이주해 여학교를 세울 정도로 조국의 인재 양성에 관심이 깊었다. 그 역시 자연스럽게 부친의 삶을 닮아갔다.

한국전쟁 발발 후 그가 입대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전장터는 너무나 잔혹했다. 800명 소속 전우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며 17명만 살아 남았다. 이 당시 그가 간절하게 기도한 내용이 있다.

그는 "살려주면 나를 필요로 하는 지역에 평생을 받치겠다"고 기도를 했다. 이 기도는 그가 떠돌이(?) 생활을 하는 단초가 됐다. 전쟁이 끝나고 대학 졸업후 서울의 여학교에서 독학으로 배운 독일어를 지도하던 중 우연히 유럽 유학 기회가 왔다.

1972년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부산 고신대학교(전신 고려신학교)의 교수로 방향을 전환했다. 1970년대 한국의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을 거듭하던 시기 그는 사업에 뛰어 들었다. 이 나라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가발 산업으로 미국 시장을 점령하고 내친 걸음에 미국으로 이민, 의류사업까지 확장하면서 그야말로 대박을 거머쥐게 됐다. 한국의 산업이 급성장을 이루고 있을 때, 마침 준비라도 한 듯이 중국에서 지원을 요청해 왔다.

▲김 총장이 사진을 보며 학교 설립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2011 HelloDD.com

◆조선족 만나고 그들을 위해 일할 때라고 생각, 공동묘지터에 학교 세워

"중국에 학교를 세운다니 중국 정부에서도 처음에는 환영하더라. 그런데 베이징이 아닌 옌볜의 소도시 옌지에 세운다고 말했더니 중국 정부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견제를 했다. 조선족 밀집지역이니 당연했다."

당시 중국 정부는 인재양성을 위해 학교는 당연히 베이징에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 총장의 생각은 달랐다. 옌볜을 방문한 그는 옹기종기 모여사는 중국의 소수민족 조선족을 보았고 그들의 교육열을 목격했다.

그는 옌지에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지금 학교가 들어선 자리는 당시 공동묘지 자리로 풀한포기 없는 죽음의 땅이었다. 돌을 고르고 나무를 직접 심어 학교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학교 설립 과정에 걸림돌로 작용할까봐 처음부터 그는 민족운동으로 보이는 행동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30년 넘게 중국에 거주해온 그이지만 지금까지 백두산 한번을 가본적이 없을 정도다. 오로지 교육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연변과기대를 세운지 내년이면 20주년이 된다. 지금은 옌볜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가 됐다.

그리고 중국정부가 5년에 한번씩 2400여 개의 대학을 대상으로 100대 우수대학을 선정하는데 연변과기대도 포함되고 있다. 23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전 세계 유명대학으로 유학을 가거나 산업계 취업율도 높다.

연변과기대 학생들은 중국어, 한국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한국어를 모르는 학생은 6개월간의 한국유학을 통해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있다. 또 교수와 가족, 학생이 모두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며 생활을 하면서 인성 교육까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교육 프로그램에 중국정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군사 교육 프로그램을 넣어 신입생이 참여할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 학생들의 취업율은 100%를 자랑한다. 해외 유명대학으로의 유학도 17% 이상이다.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중국 정부도 이제는 그를 인정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방학중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신입생과 학교를 방문한 재학생과 함께 한 김 총장.  ⓒ2011 HelloDD.com

▲학교 복도마다 선조들이 사용하던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한국적인 것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란다.  ⓒ2011 HelloDD.com

◆민족운동과 민족심은 다르다.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해 달라

그가 보는 미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유럽연합으로 한 식구가 됐고 그 안에서는 국경의 의미도 없듯이, 언젠가는 동북아 지역도 그런 날이 올거라는 생각에 일을 추진하고 있다.

그때 한민족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모두 많이 배우고 잘 살아야 한다. 한국만 잘살아서는 안된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지난해 10월 평양에 과학대학을 설립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를 두고 말들이 많다. 어떤이는 빨갱이 취급을 한다. 그러나 민족운동과 민족심은 엄연히 다르다. 사람은 자신의 뿌리를 알아야 한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민족 운동은 하지 않지만 우리민족이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또 종교인으로 조건없이 사랑을 실천하고자 함이다."

김 총장이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북한의 실상에 대해 전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북한사회는 언론에 나오는 상황보다 훨씬 열악하다. 연변과기대는 학교 자체 기술로 식품을 개발해 북한의 유아 3만명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는 한국과 미국, 중국과 북한 네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 언제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지역을 누비며 다닌다. 스스로를 떠돌이라고 했다. 바로 전날까지 미국에서 있다가 귀국했다는 그는 인터뷰 내내 피곤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항상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는게 비결"이라고 귀뜸하며 "모든 이들이 가치있는 삶을 살기를 기원한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설립 당시 공동묘지에서 지금은 가장 아름다운 학교가 됐다.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2011 HelloDD.com

▲본관 입구에는 중국과 한국 국기를 중심으로 재학생 나라의 국기를 게양했다.  ⓒ2011 HelloDD.com

▲겨울철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로 학생들의 이동을 돕기위해 만는 1.4km의 연결통로. ⓒ2011 HelloDD.com

▲연변과기대 교문 입구.  ⓒ2011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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