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서재⑧]이명수 한국한의학연구원 뇌질환연구센터장
논문 읽을 때마다 모은 자료 바인더가 제1보물

매년 외국 저널 80여종을 구독한다. 구입 비용만해도 연간 1000만원이 넘는다. 온전히 자비 지출이다. 10년이 넘는 기간 한번도 빼먹지 않고 있다. 그의 손에는 어디가나 저널이 들려 있을 정도다. 그런 노력의 결실일까.

지난 14년간 외국 저널에 발표한 논문만 220편이다. 얼핏 따져봐도 일년에 15편 이상이 된다. 남들은 1년에 한두편 올리기도 버거워 하는 유명 SCI급이 단골 게재 저널이다. 최근에는 이같은 업적을 인정받아 관련분야 저널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European Journal of Integrative Medicine'의 아시아지역 담당 편집장에 선정됐다.

이명수 한국한의학연구원 뇌질환연구센터장의 이야기다. 충분히 자랑할만도 한 경력이건만 부산이 고향인 그는 경상도 남자 아니랄까봐 말이 별로 없다. 묻는 말에만 겨우 짤막하게 툭툭던지듯 답변을 할뿐이다.

'오늘 인터뷰 힘들겠군' 내심 걱정이 될 정도다. 그러나 웬걸~, 논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얽혔던 실타래 풀듯 술술 지난 이야기를 풀어낸다.

◆연구소 회의실이 서재로 변신하다

이 센터장과의 인터뷰를 위해 그가 안내하는대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테이블과 의자가 중앙을 차지한 것 외에 양쪽으로 길게 책장이 놓여있다. 물론 책들이 빽빽히 꽂힌 채다. 주변 지인들로부터 '과학자의 서재' 특집의 안성맞춤 인물로 추천을 받을 정도니 어쩌면 당연한 그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반 도서보다는 해외 저널들이 칸칸을 채우고 있었다. 의아한 생각이 들어 이명수 센터장의 얼굴을 바라보니 의도를 알아챘는지 웃으면서 "보이는대로 해외 저널들이다. 현재 책장에는 80여개의 해외 저널들이 있고 지금 직접 구독하고 있는건 50여 종이다.

원래 80종이었는데 좀 줄였다"고 설명했다. 5종도 아니고 50여종이라니. 그걸 다 읽을수나 있나? 이렇게 많은 저널을 보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해외 동향을 빨리 알기 위해서다. 어떤 저널은 한달에 20여 편의 논문이 실리기도 한다.

그만큼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증거다. 다행히 요즘에는 중요 내용을 요약해 놓은 저널도 있다. 그중 꼭 필요한 건 스캔해서 센터 구성원들이 보도록 하고 있다. 다양한 정보를 짧은 시간에 볼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책도 책이지만 영어 공부를 위해 구입한 DVD 역시 엄청나다. DVD 만으로 가득채운 상자가 책장위에 있는 것만도 족히 예닐곱 박스는 돼 보인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라니 그 다음은 상상에 맡기자.

또 하나 궁금한 점은 역시 경비 지출의 주체에 관해서다. 비용에 대해 질문하니 "이거 아내가 알면 안되는데…"라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저널도 DVD도 자비로 구입했다. 저널을 80여 종 구독할 때는 일년에 구독료로 1000만 원이 넘게 나갔다. 지금은 자제하고 있어 50여 종을 구독하고 있는데 집에서는 모르는 일"이니 아내만 빼고 공개하란다.

그렇다면 이 기사도 부인한테만 모자이크 처리다. 이런 열정 덕분인지 그가 한의학연에 와서 쓴 논문만 해도 지난 3년간 100여 편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해외 저널에 쓴 논문이다. 1년에 30여 편 이상 쓴 셈이다.

후배들과 같이 작업을 해 모두가 제1저자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의 책장에서 눈에 띄는게 또 있다. 각각의 이름표가 붙은 바인더들이다. 지금까지 쓴 논문 수만큼 100여개가 넘는 바인더들이 책장을 채우고 있다.

"논문을 쓰려면 주제를 정하고 자료를 지속적으로 모으는데 각각의 주제별로 모아둔다. 이렇게 모으면 나중에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고 해외저널에 논문이 나오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는데 그때도 도움이 많이 된다. 이런 방법은 영국에 유학 갔을 때 멘토에게 배운 방법이다. 지금은 후배들에게 그 방법을 전수해 주고 있다."

그가 보관하고 있는 바인더에는 전세계 침에 대한 논문들이 A에서 Z까지 다 있을 정도다. 언젠가 연구원을 떠나더라도 그는 이 자료를 연구원에 그대로 기증할 예정이다. 누군가 들여다 보면 좋은 자료가 될것이란 생각에서다.

누군가가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갖는다면 이를 활용해 새로운 논문이 나올것이란 기대감 때문이란다. 그에게 논문은 무엇일까. 그는 생활의 일부이며 취미라고 했다. 그리고 논문 쓰는 일이 재미있다고 말한다.

그가 이처럼 연구하고 논문을 많이 발표하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 박사는 중학교 시기 읽었던 과학서적 블루백스부터 시작됐다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각 바인더마다 주제에 따른 자료가 가득차 있다. ⓒ2011 HelloDD.com

◆천문학 꿈꾸던 소년 물리학으로 그리고…

"부모님이 자영업을 하셨다. 바빠서 집에 거의 안계셨지만 책을 사고 공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적극 지원해주셨고. 아마 부모님이 많이 배우지 못한 안타까움을 제게 모두 베풀어주신 것 같다."

이명수 센터장이 과학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때. 지금도 일본의 과학서적을 번역한 책으로 잘 알려진 책 블루백스 시리즈를 서점에서 처음 보는 순간 빠져들 듯 읽기 시작했다. 신세계라도 만난 듯 했다. 그는 책이 나오는대로 구입해 읽었다.

"그 책이 시리즈로 나왔는데 그걸 다 사봤다. 80년대 초는 우리나라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시기로 대부분의 집안이 그리 풍족하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이를 허락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 아마도 보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은 꼭 하고 마는 습관이 이때 생긴것 같다."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그가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천문학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당연히 이과를 선택했다. 천문학자를 꿈꾸던 소년은 수업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해주던 물리학 전공의 담임 교사를 만나면서 이번에는 물리학의 매력에 빠져든다.

한번 빠지면 몰두하는 성격인 그는 대학까지 물리학과로 진학하고 내친 걸음에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집안 어른과 지인들은 당연히 그가 물리학 박사가 될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물리학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공부는 해서 뭐하나 하는 회의감에 빠져들어갔다.

◆새롭게 만난 학문 '생물학'과 영국 유학, 하드워커라는 닉네임이

그후 2년동안 아무런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다만 건강을 위해 집 인근의 기공센터에 다녔다. 기공을 접하면서 또 다시 빠져드는 성격이 발동했다. 구체적으로 파고들면서 그는 면역력의 변화, 심리학까지 공부하게 됐다.

그러자 공부와 관심 분야가 완전히 바뀌었다. 천문학, 물리학이 생소한 생물학, 대체의학으로 옮겨간 것이다. 대학의 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여세를 몰아 박사 과정까지 마쳤다.

"물리학은 1+1인데 생물학은 달랐다. 어려웠지만 개론서, 연구방법, 심신의학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이 물질로 표현되는 과정을 넘어 이번에는 대체의학 인 정신적인 면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돌아 온 길이었지만 2005년 7월 소중한 기회가 다가왔다. 39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돼 영국의 엑시터 대학 페닌슐라 의과대학의 포닥으로 가게됐다. 하고 싶었던 공부였던만큼 열심히 했다.

영국의 교수와 동료들은 그에게 하드워커(hardworker)라는 닉네임을 지어줄 정도였다. "처음 영국에 가서는 깜짝 놀랐다. 모두들 오후 6시가 되면 무섭게 퇴근을 했다. 혼자 11시까지 남아서 하고 주말에도 공부를 계속했다.

주말에 집에 그냥 있으려니 오히려 힘들었다. 그래서 학교에 나갔는데 동료들이 혀를 내두르며 하드워커라고 부르더라." 그렇게 영국에서의 1년은 훌쩍 지나갔다. 아쉬움이 남았다. 고민끝에 2년을 더 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비장학생이 아닌 자비였다. 자연히 생활은 쪼들리고 힘이 들었다. 아내는 이 모든 과정을 묵묵히 따라주었다. 그는 아내에게 감사하다고 했다(이 부분은 모자이크 해제!). 지금까지 제대로 같이 있어준 적도 풍족하게 해준적이 없는데도 항상 자신을 응원해줬기 때문이란다.

그는 "아마 지금 같았으면 결혼 기피 대상 1호로 꼽혔을 것"이라며 아내와 가족에게 거듭 감사해 했다. 2년의 영국생활이 경제적으로는 힘들었지만 그에게는 많은 성과가 있었다. 영국의 교수진, 동료들과의 인적 네트워크가 돈독해졌기 때문이다.

"1년간 있는 동안 항상 아쉬웠던게 있었다. 뭔가 비주류에 있다는 생각이 많았다. 일은 같이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가까워지지 못했었다. 그런데 2년을 더 있는 동안 서로를 더 많이 알게 되면서 마음으로 통하는 친구가 됐다.

영국에 남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한국행을 결정했다." 지금도 그는 그들과 교류하며 한국뿐만 아니라 대체의학의 우수성과 필요성을 알리기 위한 논문 작업 등을 같이하고 있다.
 

▲이명수 센터장은 해외 저널 80여종을 자비로 구독해 왔다. 꼭 필요한 부분은 후배들이 돌려 볼 수 있도록 한다. ⓒ2011 HelloDD.com

◆독서방법은 학습독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읽어

그의 독서는 학습 독서다. 천문학에서 물리학으로 다시 생물학, 대체의학으로 바뀌면서 공부해야 할 분량이 많았던 그의 상황으로 보면 당연하다고 볼수 있다. 전공 관련 책을 많이 보면서 좋은 점도 있단다.

중요한 부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정도로 안목이 생겼다.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목차를 살핀다. 그런데 목차만 보면 읽어야 할 부분이 눈에 바로 들어온다. 가끔은 실수도 하지만(웃음). 무엇보다 매일 저널과 논문을 읽는다.

출장이라도 가는 날은 읽을 저널부터 몇권 챙겨둔다." 한번 빠지면 몰입하는 성격이라고 처음부터 밝힌 그답게 그는 인터뷰 중에도 간혹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좋은 논문 주제라도 떠오른 것일까.

최근에는 인문학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현재 그가 읽고 있는 책은 '성학집요'다. 한의학연 뇌연구센터장으로 부임해 오면서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을 조목조목 챙기기 위해서다. 또 그의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각 대학에서 논문 쓰는 법에 대한 강의를 요청해 오기 때문이다.

"과학관련 책만 봐서 그런지 말을 잘 못한다. 더 많은 정보를 전하고 싶은데 단답형으로 끝나는게 항상 아쉬웠다. 어릴적부터 인문학 서적도 병행해 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친한 후배들에게는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올해 우리 나이로 45세인 그에게 앞으로 꿈을 물어봤다. 꽤나 소박하다. 우선 뇌질환연구센터의 구성원 모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공부하는 환경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갈 계획이다. 한사람이 열걸음 앞서가는 것보다 열사람이 한걸음을 같이 가는 센터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년 퇴임 후 책을 한권 내는 일이다. 제목은 미정이지만 내용은 정해졌다고 한다. 그가 많은 논문을 쓰면서 경험을 통해 얻은 노하우와 과정을 후배들에게 생생히 전할 예정이다.
 

▲영어공부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구입한 DVD. 이런 박스들이 즐비하다.  ⓒ2011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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