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연석의 로켓과 우주개발]

얼마 전 '정복의 기술'이라는 EBS TV프로를 보면서 고려말에 화약을 국산화하고 화약무기를 개발한 과학기술자 최무선의 위대함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화약이 발명되고 화약무기가 만들어진 이후 화약무기를 갖고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의 위상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칭기즈칸의 유럽정벌과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이었다. 칭기즈칸의 몽골원정군은 1219년부터 1260년까지 중동은 물론 키에프, 폴란드 헝가리까지 동부유럽을 정벌하였는데 이때 몽골원정군은 로켓무기인 비화창과 폭발물인 진천뢰와 같은 신무기인 화약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몽고군은 유럽정벌에 화약무기를 최대한 이용하였기 때문에 화약무기가 없었던 동유럽보다는 전투에서 유리하였을 것이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던 1492년까지 아메리카 대륙에는 화약과 화약무기가 없었다.

지금의 멕시코지역에 수 백년에 걸쳐 아스텍 문명을 꽃피웠던 인구 수 천만 명의 아즈테카 제국은 1519년 총과 대포로 무장한 500명의 군사와 말 16마리를 11척의 배에 싣고 유카탄 반도에 상륙한 스페인의 페르난도 코르테스(Fernando Cortes)에게 3년 만에 멸망되었다. 코르데스는 현지에서 화약과 대포를 직접 제작하여 사용하여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 후 프란시스 피사로(Francisco Pizarro)는 1532년 대포와 총으로 무장한 180명의 군사를 이끌고 청동창과 돌화살로 무장한 잉카제국을 2년 만에 정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화약무기를 이용해서 북아메리카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결국 14~16세기에 화약과 화약무기를 갖추고 있던 유럽의 몇몇 나라들이 화약과 화약무기를 이용해서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 아프리카, 인도, 호주, 동남아시아 등 많은 나라들이 유럽 몇몇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도 화약무기를 갖추고 있지 않아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현재까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민족성을 유지하며 나라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고려 말에 최무선에 의해서 화약을 국산화하고 화약무기를 개발하여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약(火藥)은 '불을 만드는 약', '불을 만드는 가루'라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옛날 화약을 ‘흑색화약’이라고도 부른다. 즉 검은 색의 화약이라는 뜻이다. 화약의 재료는 염초, 유황, 숯의 3가지인데 이중 염초(焰硝)가 가장 중요하다. 염초는 초석 또는 질산칼륨이라 부르는데 화학식은 KNO₃이다. 화학식에서 알 수 있듯이 산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물질이다.

숯이 폭발적으로 탈 수 있도록 산소를 공급해 주는 물질이 바로 염초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염초를 광산에서 캐어 사용하였다. 물론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물에 넣고 끓이고 말려 순도를 높여 사용하였다,

유황(S)은 낮은 온도에서 화약에 불을 붙여서 화학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숯(C)은 연료의 역할을 하는데 버드나무 숯이 좋다. 이 3가지를 적당히 섞어서 화약을 만들면 숯 때문에 색깔이 흑색이어서 흑색화약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중국에서 서기 850년경 쓰인 도교경전 진원묘도요략(眞元妙道要略)에 '어떤 사람이 초석, 유황, 계관석, 벌꿀 등을 섞고 가열하였더니 연기와 불길이 일어나 화상을 입고 집을 태웠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을 화약에 대한 첫 번째 기록으로 보고 있다.

송의 역사를 기록한 송사(宋史)에는 서기 1000년 8월 당복(唐福)이라는 장수가 화전(火箭), 화구(火毬), 화질려(火蒺藜)와 같은 화약무기로 진격하였다는 기록이 보여 본격적으로 화약이 무기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약이라는 명칭과 그 조성에 대한 첫 기록은 1044년 편찬 된 무경총요(武經總要)에 기록되어있다. 1232년에는 처음으로 로켓형화기인 비화창(飛火槍)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즈음 금속으로 만든 총과 포가 처음 중국에서 등장한다.

중국에서 제작연대가 기록되어있는 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351년에 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375년경 최무선에 의해서 처음으로 화약이 국내에서 제작되었다. 그 전에도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화약의 재료와 화약무기를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나 필요할 때 사올 수가 없었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더욱 힘들었다. 고려 말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해져서 바닷가의 농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자 왜구를 무찌르기 위해서 최무선은 화약을 국산화하고 로켓화기인 주화(走火)등 화약무기를 개발한 것이다.

화약의 국산화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염초를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최무선은 많은 고생 끝에 중국의 상인인 이원(李元)으로부터 염초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익혀서 드디어 화약의 국산화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조정에 건의하여 화약의 생산과 화약무기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화통도감을 1377년 세웠다.

최무선은 화통도감에서 18종류의 화약무기를 만들었다. 이들 화약무기 들은 지금의 총, 포, 폭탄, 로켓화기들이다. 1380년 8월 500여척의 전선을 이끌고 우리나라의 서해를 쳐들어온 왜구들을 진포에서 모두 격침시켰다.

고려의 화약무기는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에 의해 조선시대에 계승되고 세종 때에는 세계 최고 성능의 독자적인 화약무기 체계를 갖추게 된다. 세종 때 개발한 우리의 화약무기 종류는 장군화통, 총통완구와 같은 대형포에서 이총통, 삼총통, 사전총통, 사전장총통, 8전총통, 일총통의 총통 그리고 로켓무기로는 잘 알려진 신기전(神機箭)이 있었다.

그리고 발화통, 진려포통과 같은 폭탄류도 있었다. 이러한 강력한 화약무기들을 이용하여 세종 때에는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우리 옛 영토를 되찾게 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에 장착되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잉카제국, 아즈테카 제국 등 아메리카의 멸망을 보면서 최무선의 위대함을, 과학기술자의 민족사랑에 대한 큰 힘을 알 수 있다.

▲채연석 박사  ⓒ2011 HelloDD.com
채연석 박사는 2005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수장을 지낸 바 있으며, 현재에는 연구원에서 전문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로켓 박사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2005년 KSR-Ⅲ 프로젝트를 진두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우주소년단 부총재로 우리나라의 국가 과학기술의 미래인 아이들에게 우주시대의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채 박사는 '채연석의 로켓과 우주개발'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국가 과학기술의 미래인 아이들에게 우주시대의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글로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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