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현장 '출연연 구조개편,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간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연일 뉴스메이커로 등장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장관 이주호), 지식경제부(장관 최중경), 국가과학기술위원회(위원장 김도연) 등 연구개발에 대한 예산권을 쥐고 있는 기관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한 건씩 터뜨리고 있다. 덕분에 연구 현장은 '카오스'나 다름없다.

이런 판에 과학기술 콘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국과위가 내놓은 답변은 천편일률이다. 국가위 수장인 김도연 위원장은 여전히 통합에 대한 의견을 내기 적절지 않다는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어 반발을 사고 있다.

2일 진행된 내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심의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출연연에 대한 구체적 의견을 갖고 있지 않다"며 "백점짜리 안은 없겠지만 미흡한 점이 있어도 수용하고 개선해 나가야 된다"는 요령부득의 답으로 상황을 방치하는 느낌이다.

연구현장은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반응 일색이다. '여러가지 문제가 산재해 있는데, 왜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지 모르겠다'는 목소리와 '출연연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너무 쉽게 접근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냉소적 의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 출연연-대학 통합…"시대의 역행"

이런 소동 속에서 한국해양대학교(총장 오거돈)는 졸지에 폐교 위기에 놓였다. 박희태 국회의장이 주도한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법안이 시작이었다. 이 법안에 따르면 한국해양대와 한국해양연구원(원장 강정극), 한국해양수산개발원(원장 김학소)은 해양 KAIST로 불리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으로 통폐합된다.

법안 제정의 취지는 다른 게 없다. 과학 불모지로 꼽혔던 부산과 경남을 변화시키는 게 목적이란다. 통합이 진행될 경우, 해양대 학생 일부는 해양과학기술원과 다른 대학으로 옮겨지게 되고 학교는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해당 기관들의 반발이 워낙 심해 급기야 박희태 국회의장은 관련 법안 상정을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어느 한쪽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2008년 이미 한 차례 통폐합 위기를 겪었던 한국생명공학연구원(원장 정혁)과 KAIST(한국과학기술원·총장 서남표)의 통합 이야기도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같은 과학 분야 정책들이 정책 토론이나 공청회, 관련기관 의견 청취 없이 너무 은밀하면서도 쏜살같이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통합 절차를 전혀 공개하지 않은 채 통합을 추진해 불신까지 증폭시키고 있다.

통합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분명하고, 국가 미래 성장 동력을 위한 조치라고 판단한다면 마땅히 출연연이나 연구회 이사회 등 관계자들을 만나 절차를 밟는 게 우선이 아니냐는 지적이 힘을 받는 이유다.

아무런 공식 절차나 해명도 없이 그저 언론 보도에 귀기울여야만 하는 상황에 연구 현장은 참담할 뿐이다. 전 세계적으로 해양과학과 바이오산업이 점차 비중을 키워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모습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무궁무진한 해양자원을 바탕으로 연구개발을 수행하고 있는 국책연구기관인 해양연과 미래 성장동력으로 손꼽히고 있는 생명공학 관련 연구기관인 생명연을 대학과 통합한다는 생각이 시대를 역행한다는 이야기다.

오로지 연구 외길만을 생각하고 들어온 과학자들이라면 이들을 치열하게 경쟁시켜서 연구개발의 파이를 점차 키워나가야 할 판에, 대학과 연구원을 동일선상에 놓고 판을 흔들어 떨어지는 사람은 나가고 붙어있는 사람들만 연구하라는 식으로 밖에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연구현장의 솔직한 반응이다.

한편 생명연연구발전협의회는 지난 달 28일 KAIST와의 통합 논의와 관련, 긴급총회를 개최하고 연구원 종사자의 의견을 수렴했다. 연발협 회원 185명 중 160명이 현장 설문과 이메일을 통해 참여했고, 이 중 155명이 통합에 대한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의 의견이 배제된 통합추진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학과 출연연은 성격과 특성이 상이하기에 협력방안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강제적인 물리적 통합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국가 바이오산업의 대계를 결정짓는 중차대한 문제를 처리하는 절차와 방식이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물리적 강제통합의 실패 혼란 사례를 답습할 가능성 높다'는 등의 의견이 취합됐다.

연발협은 "교과부가 추진하고 있는 이른바 출연연-대학 통합의 한 축으로서 생명연과 KAIST의 강제적인 물리적 통합에 반대 의견을 피력한다"며 "연구현장의 조속한 안정화와 출연연 선진화를 이룰 기관과 부처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 출연연 법인 통폐합…"중복연구 때문에?"

출연연에 산재해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해결책으로 출연연 민간위원회가 제시한 출연연 법인 통폐합이 거론되고 있다는 소식은 연구원들에게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정부가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민간위원회에서 결론을 낸 사항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국과위의 입장은 출연연에서 진행되는 연구들이 칸막이 형태로 막혀 있기 때문에 글로벌 대세인 융합연구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각 기관이 그들의 담장 안에서 소통과 교류를 무시한 채 묵묵히 연구만을 진행하고 있기에 중복 연구가 횡행하고 시너지 효과는 더더욱 기대할 수 없다고 정부는 설명한다. 국과위는 이같은 폐해의 원인으로 부처 영역 넓히기와 출연연 칸막이 구조, PBS(연구과제중심) 제도의 폐해를 꼽고 있다. 정부 부처들의 지나친 욕심으로 인한 무조건적인 연구 영역 확대로 인해 비슷한 연구들이 겹쳐서 추진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정부나 민간에서 연구 과제를 수탁해 인건비 등을 조달하는 PBS 제도 역시 돈이 되는 연구에만 몰리는 과열 현상으로 인해 여러 부작용이 있어왔다. 이같은 조사 결과는 최근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보고됐다. 김도연 위원장은 국과위 업무 현황 전반을 '중간 보고'하는 과정에서 함께 설명했고, 대통령도 이 자리에서 이같은 문제 인식에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부와 국과위의 갑작스런 입장 정리에 연구현장은 어리둥절 할 뿐이다. 지난 2006년 정부는 출연연 기능을 특성화하기 위해 기초기술과 산업기술연구 분야로 나뉘어 관리하기 시작했다. 한 지붕 두 가족은 연구소들이 아니라 바로 정부의 선택으로 시작된 것이다. '갑'과 '을'에 비교하자면 정부는 갑이고 연구현장은 을에 해당된다.

다시말해 오늘날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 데에는 정부의 책임이 더 크다는 소리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문제가 됐던 출연연 흔들기는 이제 5년마다 겪어야 하는 당연한 일로 치부되고 있다. 그때마다 출연연은 일방적으로 흔들림을 겪을 수 밖에 없다. 분명히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물론 국과위의 입장을 전면 부인할 수는 없다. 국민 혈세로 운영되는 국책연구기관인 만큼 효율적인 운영 시스템을 모색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사·중복 연구가 나쁘다는 관점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렇다'라고 볼 수 없다는 게 연구현장의 항변이다. 각각의 기관 특성에 맞게 연구를 진행하는 것을 '같은 것'이라고만 판단할 수는 없다는 시각이다. 융합의 정의를 꼭 서로 다른 분야의 결합으로 볼 게 아니라, 똑같은 분야라도 각기 다른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개발해 낼 수 있는 기술을 융합이라고 볼 수 있는 관점도 길러야 한다는 게 연구 현장의 의견이다.

뿐만 아니라 연구자간 경쟁을 통해 성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법인을 하나로 단일화해야 정부가 제시한 난점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도 넌센스라는 지적이다. 중복연구보다 진짜 범인은 과학기술계를 지원하는 콘트롤타워의 중복이라는 의견이다.

교과부, 지경부, 국과위 등 연구개발 관련 기관들이 소통을 하기 시작하면 중복·유사 연구의 불합리한 부분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는 이유는 연구개발 예산 지원을 결정하는 결정권자가 바로 중복의 주인공인 정부이기 때문이다.

물론 단일법인화를 찬성하는 입장도 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모두 차치하고, 현재의 문제만을 바라봤을 때 가장 현실적인 해결법은 단일 법인화라는 의견이다. 다만 단일 법인으로 가되 물리적인 통폐합보다는 소프트웨어가 개선된 운영제도 등이 함께 따라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 출연연 강소형 연구소 로드맵…"바람직한 방향"

통폐합 소식으로 어지러운 이 때에도 출연연 강소형 연구소 발전 로드맵 작업은 진행 중이다. 김도연 위원장은 2일 기자회견을 통해 "강소형은 조직개편이 아니다. 블록펀딩을 통해 출연연이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과제를 개발해달라는 것"이라며 "몇 개만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연구 분야를 선택해 묶음 예산으로 성과를 극대화시키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강소형 연구소 로드맵은 연구원 본래의 임무에 맞게 자율적으로 조직을 개편하는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다. 또한 올해 말 설립될 기초과학연구원과 연계한다는 방침도 세우고 있다. 이를 토대로 각 출연연의 개편 일정도 구체화되고 있는 가운데, 올해 말인 12월에 컨설팅 작업을 다시 수행할 계획이다. 출연연 운영정책과 관련해서는 정년 환원(우수연구자 대상 65세로 연장)과 PBS(연구과제중심) 제도 개선(출연금 비중 70% 확대)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인건비 내에서 인력을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는 원장 권한과 묶음예산 제도도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이 역시 연구 현장의 반응은 기대 반 우려 반이다. 출연연의 한 관계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융합이 대세인 만큼 핵심 연구 영역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전문화·특성화 연구조직으로의 전환이 필요할 것 같다"고 기대를 표명했다.

반면 다른 관계자는 "연구환경 개선에 뜻을 펼 줄 알고 국과위 설립에 찬성했건만, 이건 산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우선 순위의 개념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직접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학기술계 한 원로는 "출연연의 구조개편 문제가 사공들이 많아 산으로 가고 있는 형국"이라며 "출연연의 기능 재정립과 진정한 선진화를 위해서라도 과학기술 콘트롤타워가 통일된 방안을 가지고 나와 연구현장과의 소통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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