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연-KAIST, 해양연-해양대학 통합 '실현 불가'에 무게
과학자들 '장관 개인 치적 노린 과학기술계 흔들기' 비난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교육과 과학기술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한다는 명분으로 정부출연연구기관과 대학교의 통합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우선 수면 위로 떠오른 통합 대상은 지난 2008년에 이어 두 번째 통폐합을 추진중인 KAIST(한국과학기술원·총장 서남표)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원장 정혁), 그리고 한국해양연구원(원장 강정극)과 한국해양대학교(총장 오거돈)다. 현재는 교육과학기술부 차원에서 통합 추진을 위한 물밑 작업이 본격화 하는 양상이다.

정부에서는 담당 고위 공무원이 해당 출연연 기관장을 비공개 면담해 일차적으로 서로의 입장을 파악한 것으로 전해졌다. 연구 현장에서는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전직원 간담회를 개최했고, 노조 측에서는 통합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 중이다. 생명연과 KAIST 측은 정부의 통합 재추진 움직임에 대해 사실상 통합이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반응이다.

통합 재추진에 대한 명분과 실리, 철학 등 무엇하나 제대로 갖춰진 게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인지 연구자들은 오히려 과거와 달리 차분한 대응을 보이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해양연과 해양대학, 해양수산개발원의 경우 통합 추진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유관 기관들은 성명서 발표와 비대위 결성 등 통합 반대 활동을 진행 중이다.

이같은 현장의 반응과는 별도로 정부의 계속되는 통합추진 움직임과 연구현장 흔들기로 미래의 국익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현장 과학기술자들은 나름대로 통합이 불가능한 몇가지 이유로 몇 가지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 꺼지지 않는 이주호 장관 총선 출마설…"통합 추진 현실적으로 시간 부족"

우선 17대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을 지낸 이주호 장관이 내년 4월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 장관은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서 "총선 출마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교과부와 여권 일각에서는 그의 출마설이 여전히 회자되는 실정이다. 이 장관의 출마가 현실화 될 경우 늦어도 9월 말까지 교과부 장관직을 사퇴하지 않으면 안돼 2년간 추진해 온 출연연-대학 통합 움직임도 추진력을 잃은채 금새 시들해질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 중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교과부가 여름들어 부쩍 움직임을 활발히 하는 것도 어떻게든지 9월 이내에 서남표 KAIST 총장과 정혁 생명연 원장의 두 손을 맞잡게 하려는 복안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물론 정반대의 전망도 있다. 일각에서는 이 장관이 출마하지 않을 경우 청와대와 내각 모두 임기 마지막까지 보좌할 수 있는 '집권 마무리' 체제로 안정화되면서 '통합 굳히기 모드'로 들어가지 않겠느냐는 관측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경우든 출연연과 대학 통합을 성공시키려면 올해 말 정기국회에서 정부출연연구기관 관련 법안과 KAIST 법안의 수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하지만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들 사이에서는 정부 통합 정책에 반대 입장이 많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통합되면 생명연 연구자 10%도 KAIST에서 못버틸 것"

생명연이 KAIST 통합에 반대하는 가장 근본 이유는 연구자들의 신분 불안 요인이라는 연구현장 안팎의 분석이 많다. 생명연이 KAIST 산하 기구로 부설화될 경우 생명연 출신 연구자들 대부분이 KAIST 테뉴어 심사에 걸려 몇 년 지나지 않아 도태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생명연 박사 250여명 중 10%도 현 테뉴어 심사에서 통과하기 힘들 것이라는 자평이 나올 정도다. 이렇게 되면 결국 출연연 연구자가 KAIST 교수들의 연구 서포터즈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는 자조섞인 예측이다.

생명연 연구자 중에는 SCI급 논문 중심으로 성과를 내면서 연구하는 과학자도 많지만, R&D서비스 인프라를 지원하는 과학자들을 비롯해 다양한 공공 기능의 역할을 하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은 형편이다. 게다가 교수와 연구원간 연구를 위한 자원 측면에서 게임이 안된다는 게 정설이다.

교수는 연구를 위한 연구인력으로 석사 3명, 박사 1~2명을 배정받지만, 연구원은 현 R&D시스템상 인력배정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결론적으로 생명연 연구원 입장에서 통합될 경우 득은 별로 없고 잃을 것만 많은 꼴이 된다.

출연연 L 박사는 "어떻게 경쟁하고 살아남느냐의 문제에 교수와 연구원은 기본 출발이 다르다"면서 "필드 경험이 많은 생명연 연구자들이 교수 밑에서 컨트롤 받으며 연구하길 원할 것 같으냐"고 반문했다.

◆ '통합 논의 프로세스 실종' 밀실서만 거론…"모두가 통합 OK해도 어려운데"

정부가 출연연-대학 통합 절차를 전혀 공개하지 않은 채 통합을 추진하고 있어 연구원들의 불신도 커지고 있다. 명분과 가치, 미래 기대효과 등 통합에 대한 아무런 철학적 배경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모양새라는 지적이다.

현재까지 통합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공식 문서도 눈에 띄지 않는 상황이다. 암암리에 일부 공무원과 해당 출연연 관계자가 만나 의견을 나눈 정도만 파악되고 있다. 최근에는 통합 관련 문서 유출로 담당 공무원이 직위 해임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연구 현장에 퍼지기도 했다. 밀실에서 추진해야 하는 사안을 문서를 통해 의견을 전달한 잘못 때문에 해임됐다는 것이다.

현재 생명연과 해양연 상부기관인 기초기술연구회는 관련 사안에 대해 어떠한 공식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으며 정부 쪽 눈치만 보는 양상이다. 김창경 교과부 제2차관도 이번 통합 논의에서 비켜나 있는 모양새다. 새로 출범한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 측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라면 장관이 KAIST 이사회나 출연연 상위기관인 기초연구회 이사회를 만나 통합에 대한 진정성을 알리는 등 최소한의 공식 절차가 있어야 마땅한 것 아니냐고 묻고 있다. 그럼에도 현장은 장관이 통합을 추진하려 한다는 설만 난무할 뿐 통합에 대한 사실 여부는 전혀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출연연 P 선임연구원은 "출연연이 몇 명 움직이는 구멍가게도 아니고 장관 한 사람이 통합시킨다 해서 통합되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정부와 연구원, 학교, 국회의원들이 모두 통합에 찬성한다 해도 노조가 반대하면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지금 추진되는 통합 프로세스는 거의 권위주의 시대에 벌어지는 일 같다"고 꼬집었다.

◆ 시대 역행하는 과학정책…"바이오 전문연구소 더 늘려야 할 때"

"생명연이 KAIST 부설로 통합되는 것은 국가 바이오 미래를 죽이는 것입니다."(출연연 K 책임연구원) 생명공학이 인류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손꼽히면서 세계적으로 바이오 산업을 키우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판에 생명연을 대학 부설로 통폐합 시키는 정책은 시대를 역행하는 정책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전문 연구소 기능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 바이오를 키워야 할 판에 기관 운용 효율에 문제가 있다고 대학 부설화시키는 것은 국가적 정책 판단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연구자들은 오히려 바이오 분야를 세분화시켜 전문연구소 단위로 독립시켜 치열하게 키워나가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가령 국가 전염성 질병 연구소라든지 항체신약 연구소, 유전체 연구소, 줄기세포 연구소, 치매 연구소 등 바이오 각 세부 분야마다 엄청난 국가 성장 젖줄이 될 수 있는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 만큼 전문연구 단위 방향으로 과학정책이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학기술계 한 원로는 "진정한 과학기술계의 혁신을 꾀하려면, 국가 연구기관의 수월성과 자율책임, 유연성, 대융합이라는 키워드로 움직여 나가야 한다"며 "작금의 연구소 통합 논란으로 현장을 흔들지 말고, 현장으로부터 혁신과 개혁이 자발적으로 펼쳐질 수 있도록 국가 과학기술 리더들이 힘을 발휘해 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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