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계 지금 나서지 않으면 부실화 자초하는 셈
"정부, 과기인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이하 과학벨트)는 지금 우리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다. 20년,30년 후 국가의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지역 이기주의나 정치적 영향력으로 추진될 일이 아니다. 후보지 가운데 가장 적합한 지역으로 선정됐다고 본다. 이제는 내용을 잘 구성해야 할 일이 남았다. 과학기술인들과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A 대학 교수)

"정치인들이 왈가왈부하는 과학벨트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정권 바뀌면 과학벨트 사업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될 수도 있고 예산이 대폭 삭감될 수도 있다. 정치적 영향을 배제하기 위해서라도 과학기술인들이 적극 목소리를 내야 한다."(원로 과학자)

과학벨트 사업을 위한 첫단추가 끼워졌다. 하지만 과학벨트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진행은 첫삽도 뜨지 못한 상태다.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여전히 과학벨트의 중심축을 이루며 좌지우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학기술계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와 함께 본래 취지에 맞는 과학벨트를 설립을 위한 의견에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 과학벨트 입지가 발표될 당시 정치권의 입김으로 인해 내용상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과학기술인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기초연구를 통해 응용연구에도 날개를 달고 산업연계는 물론 노벨상에 한걸음 다가가며 새로운 과학강국의 면모를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정부는 과학벨트와 관련해 여전히 과학기술인들을 도외시하고 있다.

교과부 관계자에 따르면 정부는 기초과학연구원 등 각 분과별 워킹그룹을 조직해 구체적인 내용을 만들어 갈 예정이다. 문제는 워킹그룹의 내용이다. 인원 구성은 실무자를 포함해 관계기관 공무원 등 10명 내외로 꾸려질 전망이다.

입지에 이어 과학벨트의 핵심인 기초과학연구원과 연구단 구성 및 운영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에서도 실제 이용자 그룹인 과학기술인들의 의견은 철처히 배제되고 있는 셈이다. 과학기술인들은 이같은 정책 과정에 대해 "과학벨트는 단순한 국책사업이 아니다. 이는 우리 후손들을 위한 사업이다. 실질적 구성을 위해 과학기술인들의 의견을 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과학벨트 기본 계획은 과학자 의견 듣고 세워야

"과학기술인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과학계와 논의없이 정부가 임의로 기초과학연 산하 연구단을 전국으로 분산배치한 일이다. 무엇을 어떻게 연구할지 논의도 없이 정치권의 입김으로 각 지역에 선심쓰듯 연구단을 배분한 데는 문제가 있다."(출연연 B 박사)

정부는 지난 16일 연구인프라와 정주여건, 접근성이 뛰어난 대전시 신동과 둔곡지구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며 과학벨트 거점지구로 확정했다. 충청권을 비롯해 과학벨트 유치에 나섰던 광주와 대구·포항을 기능지구로 선정했다.

그리고 50개 연구단 중 25개는 거점지구에 나머지는 광주 10개, 대구·포항 15개 등으로 분산배치키로 했다. 기존 연구 인프라와의 연계성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난 민심을 달래기라도 하듯 나눠주기식으로 국가의 백년대계 사업을 확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거점지구와 기능지구 연구단 수는 확정된 사안이 아니다. 예산 배분을 위해 임의로 구분했다"면서 "연구 수월성을 고려해 변동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말이 마차를 끄는 것이 아니라 마차가 말을 끄는 형국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한 원로 과학자는 "지금까지 어떤 정부출연기관도 연구 분야 등 구체적인 논의 없이 설립된 사례가 없었다. 이번 정부의 결정은 이 사업이 제대로 진행 될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한다"면서 "연구 분야나 예산 등 구체적인 내용 등 과학기술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지금까지 진행된 과정으로 봐서 과학벨트 설립을 위해 어느것 하나 구체적인 게 없는 것 같다"면서 "더 이상 정치인과 공무원만으로 과학벨트 사업을 이끌어 가서는 안된다"고 쓴소리를 했다.

현재 교과부 산하 조직이 과학벨트 사무국 역할을 담당하며 구체적인 계획 수립을 위한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계획안이 나오면 과학벨트위원회를 열고 논의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도 과학기술인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출연연의 B 박사는 "과학벨트 사업은 대한민국과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원천기술을 확보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공무원들이 실무자라는 이유로 계획을 세운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과학기술인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권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일 없어야

"과학벨트의 기본원칙은 과학자들이 세워야 한다. 기초과학연구원 원장도 과학자를 중심으로 한 위원회에서 선임하고 연구단 설립도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이 결정할 수 있도록해야 한다."(출연연 기관장) 교육과학기술부와 대전시 등에 따르면 과학벨트에는 향후 7년간 5조2000억 원이 투입된다.

당초 예산은 3조5000억원이었으나 입지 발표 당일 1조7000억원이 늘어났다. 전체 과학벨트 예산 중 거점지구와 기능지구가 되는 대전과 청원·천안·연기에는 기초과학연구원과 KAIST연합캠퍼스, 중이온 가속기 및 기능지구 지원 프로그램 운영 등에 2조3000억원이 지원된다.

D.U.P연합캠퍼스인 대구·울산·포항의 우수한 연구자원을 통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1조5000억원을 지원하고, 광주과학기술원(GIST) 캠퍼스에는 6000억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또 전국의 대학과 출연연 등에 설치되는 개별 연구단에도 8000억원을 지원할 방침이다.

과학벨트 관계자에 따르면 발표 당일 아침까지 과학벨트위원회 위원들조차 이런 예산 내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정치권의 일방적 결정으로 예산이 확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출연연의 H 박사는 "정부 발표를 보면 기초과학연구원에 대한 운영계획도, 캠퍼스에 대한 언급도, 출연연과의 연계도 없다"면서 "단순히 출연연 하나 더 설립하는 차원으로 봐서는 안된다. 본래 취지를 잘 살려 차별화된 기초과학연구원이 될 수 있어야하고 출연연 선진화의 모델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과학자는 "과학벨트 사업은 대통령의 원점 발언이 있기 전까지는 충청권 입지가 확정됐었다. 대통령의 발언 이후 전국의 지자체에서 입지 유치를 위해 뛰어들었고 정치권이 가세했다"면서 "우여곡절 끝에 입지가 확정됐다. 이제는 정치권의 입김을 철저히 배제하고 과학기술인을 중심으로 기본 원칙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연연 관계자는 "지난번 국과위 설립시에도 과학기술인들의 의견은 배제되고 결국 공무원 중심으로 가고 말았다. 이번에는 과학기술인들도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울분을 토했다.

정부는 2017년까지 과학벨트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올해 말까지 가야 겨우 기본 계획이 확정될 예정이다. 과학벨트 예산으로 확보될 수 있는 예산도 4100억 원에 불과하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불투명성을 키우는 원인이 되고 있다.

과학기술인들은 이에 대해 "가장 우려 되는 부분이다. 과학벨트는 정권에 상관없이 국가의 미래를 보고 추진해야 하는 사업"이라면서 "이후 정권에서도 과학벨트 계획안을 축소하거나 예산을 삭감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도 목소리 내고, 정부는 귀담아 들어야

과학벨트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과학기술인들의 애정어린 조언이 줄을 잇고 있다. "과학벨트 설립으로 국내 우수 인력의 해외 유출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해외 유명과학자들이 찾아 올수 있도록 해야 한다."(출연연 P박사)

"기초과학연구원과 연구단 단장은 소속에 관계없이 국내외 우수과학자를 임용하고 연구 자율권을 줘야 한다. 중이온 가속기가 성과를 내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실패가 있을 것이다. 이를 인정하고 기다려주는 문화가 필요하다"(출연연 기관장)

"통일 후 한 때 절망적이었던 독일의 도시 드레스덴이 지금은 유럽판 실리콘 밸리이자 과학기술산업도시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기초와 응용연구 기반이 들어섰기에 가능했다. 대덕에는 이미 응용연구 인프라가 있으니 이들과의 협력연구를 통해 성과가 산업으로 연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공무원)

"기초과학연구원은 기존 출연연과 분명 달라야 한다. 연구자율성을 부여하고 '묶음 예산' 등으로 출연연의 새로운 모델이 돼야 한다. 성공적인 운영으로 기존 출연연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길 기대한다."(출연연 G박사) 

"과학기술인도 변화가 필요하다. 과학자들에게 할 일을 눈앞에 갖다 놔줬는데도 스스로 챙기지 못한다면 과학자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더 떨어질 수 있다. 과학자들이 직접 나서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원로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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