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공부 압박감에서 벗어난 인간관계 호소
징벌형 등록금 제도 개선 등 중지 모아야

연이은 비보, KAIST 캠퍼스를 거니는 학생들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어두운 듯하다. 학생들의 잇단 자살이 심상찮아 보인다. 올들어 벌써 3번째다. 그동안 개인적인 일이라고 치부해왔던 학생들조차 가까운 벗들의 연이은 자살 소식에 당혹스런 표정이 역력하다.

학교도 혼란스럽다. 올해 뿐만이 아니다. 지난 95년과 96년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2001년과 2003년 연이어 자살사건이 벌어지는 등 90년대 후반 KAIST 내 자살 사건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으나 학교 당국이나 학생들 스스로 원인 규명과 처방을 내놓지 못하는 실정이다.

30일, 캠퍼스 현장은 적막 그 자체였다. 분위기부터 착 가라앉은 채 이 교실에서 저 교실로 이동하는 학생들의 발걸음 소리만 무겁게 들린다. 최고를 향해 질주하던 20대 중반 꽃다운 나이의 친구들의 연이은 자살을 모두가 받아들이기 힘겨운 분위기다.

KAIST 학생 전용 사이트 아라게시판에는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자살한 소식을 접하는 애통함과 '도대체 왜 이러한 변고들이 연속해서 일어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들이 컴퓨터 화면을 가득 채웠다. 함께 수업에 참여했던 친구들은 말 없이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학생은 그저 눈물만 흘렸다.

학생들은 자살 소식에 좀처럼 믿기어렵다는 반응이다.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L군은 성격도 쾌활하고 대표적인 로봇 인재로 호평을 받아왔고, 지난 29일 목숨을 끊은 J군 역시 다소 소극적이었으나 늘 밝은 미래를 꿈꿔 왔던 학생이었다. 미래 진로에 대한 꿈을 이야기 하면서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에서 삶에 대한 불안은 찾을 길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친구들의 죽음을 맞이하는 KAIST 학부생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올해 KAIST에서 발생한 3차례 자살 사건은 모두 분명한 원인이 드러나진 않고 있지만 학생들 증언에 따르면 공통분모가 있다. 외부와의 단절과 그로 인한 외로움이 가장 크다. 우울함을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만의 심적 울타리에 갇혀 있어 친구들과 또는 이 사회와 교감할 수 있는 채널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KAIST는 학부생 대부분 거의 지방에서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정서적 안정이 요구되는 편이다. 대부분 가족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과의 정을 느낄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KAIST 학생들은 보통 군대를 가는 경우가 많지않아 복학생일 경우는 주변에 같이 어울릴 사람도 드물다.

관계의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KAIST는 다른 곳보다 더 심각한 편이다. 많은 학생들이 어렸을 때부터 계속 공부에만 전념해 왔기에 개인적으로 강박관념이 갖기 쉬운데다, 이에 대한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어렸을 때부터 최고 소리만 듣다가 KAIST에 들어와 갑자기 상대적 위치에 놓여야 하는 환경에 좌절감을 많이 겪었으리라는 이야기다.

KAIST는 같은 학번이라 해도 나이가 제각각이라 선후배 관념이 별로 없다. 선·후배 간의 정신적 교감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교수와 제자 관계에서도 학부생들은 수업 이외에 거의 교수들과 교류할 시간이 없다. KAIST 동아리 문화는 타 대학에 비해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개인의 정신적 고립 현상을 만드는 환경에 노출돼 있다는 점을 호소한다.

KAIST의 한 학생은 "지금까지 발생한 KAIST의 자살에서 나타나는 공통 원인은 과도한 개인 고립 상태라고 생각한다"며 "학생들이 연구나 학업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짙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관계 형성이나 사회를 보는 안목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한 학부생은 "자살한 학생들이 나름대로 주변에 자살 정황에 대한 사인을 보냈을 것인데, 워낙 서로 교류가 없는 문화를 가진 KAIST라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라며 "자살에는 여러가지 복합적 원인이 있겠지만 최소한 대인 관계에 관한 부분은 개선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KAIST의 자살 원인에 대해 학생들이 최근들어 주목하고 있는 학교 문제가 하나 더 있다고 한다. 다름아닌 징벌형 등록금 제도다.지난 21일 자살한 A군의 동아리 친구는 "친구가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전했다.
징벌형 등록금제도로 학생들의 학업 경쟁이 심화되는 경향이 있으며, 학생들 사이 장학금을 받아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전 보다 커졌다. 좋은 학점을 받으려고 공부를 더 하게 됐고, 상대적으로 동아리 활동이나 놀러다니는 시간이 줄었다.

지금까지의 정황상 KAIST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과 정서적 관계의 단절 문제는 전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분명 뭔가 개선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적어도 제2, 제3의 자살 사태를 막으려면 기존과 같은 대응방식을 뛰어 넘는 특단의 대책들이 시급해 보인다. 학교 당국과 KAIST 구성원들이 정신적·정서적 교감과 안정을 위해 중지를 모아야 할 때다. KAIST 수재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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