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국회의원인 전여옥 씨가 오래전 KBS 도쿄특파원 시절에 쓴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기자로서 일본 사회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한편, 생활 속에서 일본인들과 부딪치며 느낀 그들의 행동 양식 하나하나를 예리하게 비판하는 시각이 한국 독자들에게 어필한 면이 크지만, 제목에서 '~은 없다'라는 표현 자체도 꽤나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출판계의 평가를 빌리자면 제목 장사에서도 성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은 없다'를 일본어와 관련시켜 보면 재미있는 어원풀이가 가능해진다.

일본어에서는 가치가 없다거나 시시하다는 뜻으로 '구다라나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여기서 '구다라'는 백제(百濟)를 지칭하는 말이다. 지금도 충청남도 부여 군청을 중심으로 구드래라는 단어를 쓰는 지역이나 업소명이 많이 남아 있다. 구드래 조각공원도 있다. 백제 당시의 명동쯤 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지역명이 그대로 나라 이름으로 전이된 셈이다. "어디서 오셨나요?"라는 질문에 미국이라는 말보다 "뉴욕 맨해튼에서 왔어"가 더 멋있어 보이는 것과 같다.

다음으로 '나이'는 없다, 아니다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구다라+나이'를 축어적으로 옮기자면 '백제 없다'는 뜻이 된다. 이 단어의 어원을 추정해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백제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고대 일본 사회로서는 선진 백제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고 자연히 백제에서 전해져온 물건들마저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외제'쯤 된다.

그러니 백제에서 온 것들이 아니라면 시시하거나,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 하는 의미에서 "백제 것이 아니잖아?"라는 표현을 썼을 테고 이것이 구다라나이라는 단어로 발전됐을 것이다. 일본특파원을 지낸 저자는 이를 잘 알고 있었을 테니, 어법을 거꾸로 비틀어 일본을 깔보는 투의 표현으로 재창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한국인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일본도 별거 아니잖아!'라는 뉘앙스가 제목에 담겨 있는 셈이다.

과연 저자가 주장하듯이 일본은 없는 것일까. 과연 일본은 별게 아닌 것일까.

일본 역사상 처음이라는 진도 9.0의 대지진에 더해 엄청난 규모의 쓰나미가 덮치면서 일본은 지금 제2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가장 큰 국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그런 위기 앞에서 일본, 일본인, 일본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사건 현장이 시민들은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도 줄서기를 잊지 않는다. 누구하나 새치기하려 하지 않고 순번 지키기에 철저하다. 한계상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인들의 이기적 행위와 아우성은 찾아보려 해도 찾아보기 어렵다. "지구에 종말이 온다면 이처럼 왔으면 싶다"는 어느 중국인 일본 유학생의 현장감이 가슴을 저리게 할정도다.

어찌 탄식과 절규가 없겠는가마는 누구 하나 희생정신과 공동체 의식 앞에 자신만을 내세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일본의 힘이다. 그 무서운 힘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보도했듯이 '인류가 진보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일본인들은 보여주고 있다.'

3·11 동일본 대지진과 관련해 한국 매스컴에서 최근 '일본은 있다'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 일본은 있다. 그런 일본이 있기에 우리 한국 사회가 이만큼 경쟁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동안 애써 무시하려 했다. 일본이 없다면 한국도 없는 것이다. 다행히 일본은 있다. (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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