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식사하지 마세요.'

화장실은 밥을 먹는 데가 아니다. 아니, 먹은 밥을 소화시킨 다음 그 뒤에 발생하는 부산물을 배설하는 곳이다. 그런데도 이런 글귀가 화장실 벽에 적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은 도쿄(東京)대학 등 일부 대학 화장실에 이런 문구가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다고 보도했다. 대학생 등 젊은이들이 혼자 식사하는 모습을 남들에게 들킬까 두려워하면서(?) 공용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느니, 차라리 화장실에 쭈그려 앉은 채 밥을 먹는 사례가 많아지자 대학 당국이 이를 방지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매스컴 보도를 접한 일본 사회가 심한 충격을 받았다지만 이런 현상이 과연 일본에서만 나타나는 것일까.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그리고 자신의 고독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현대인의 모습이나 의식구조는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대중 앞에서 자신을 감추고 싶을 때 사용하는 수단이 달라질 뿐이다. 예를 들어 누구는 화장실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누구는 화장을 더 진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누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대신 인터넷 이메일이나 휴대폰 문자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예는 널려 있다. 청춘남녀가 맞선을 봤는데 맞선을 끝낸 남자가 여자 쪽을 마음에 들어 한다면? 용기 있는 남자라면 오후 늦게 여자 쪽에 전화를 걸어 다시 만날 기회를 갖고 싶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화장실에서 혼자 밥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나 홀로 식사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죽어도 싫은, 그렇게 용기 없는 남자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전화를 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 쪽에서 의외로 차가운 반응이 돌아올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문제다. "아, 죄송하지만 그 시간에는 제가 좀 일이 있어서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그것은 깨끗한 거절이다. 창피하고 치욕스런 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런 남자라면 휴대폰 문자를 사용할 수 있다. 설령 거절 문자가 오더라도 서로의 목소리를 교환하는 것이 아니기에 덜 창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휴대폰 문자는 이렇게 고독하지만 고독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현대인들의 훌륭한 도피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소통과 대화의 도구로 대접받아야 할 휴대폰 문자가 사실은 도피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순간이다. 게다가 화장실보다 얼마나 고상한가.

현대인은 저마다 손 안에 휴대폰을 쥔 채 누군가와 끊임없이 소통을 갈구한다. 젊은이들일수록 '엄지족'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문자 교환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들은 과연 타인과 무엇을 소통하려는 것일까. 그렇게 하면 고독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왜 고독을 피하려 한다면서 거꾸로 사람과 사람의 눈빛 교환은 피하려 드는 것일까.

인터넷 모바일 혁명으로 지구 전체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된다지만 소통할수록 더욱 더 고독해지는 군중 속의 개인이라는 아이러니는 계속된다. 이런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화질(High Definition) 텔레비전의 등장이다. HDTV의 성능이 고도화할수록 인간은 더욱 더 자신을 감추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에서 HDTV로 방송을 하게 되자 연예인을 비롯한 방송 종사자들에게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고 한다. 종전의 TV 카메라로는 찾아내지 못했던 얼굴의 사마귀나 피부염 증세, 나아가 자그마한 티끌조차 선명하게 노출시키면서 인기인들의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느 스포츠 캐스터는 옷깃에 묻어 있던 국물 흔적이 화면에 선명히 드러나는 바람에 칠칠치 못한 사람이라는 흉을 들어야 했다는 CNN방송의 보도다.

덕분에 요즘 방송 출연자들은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기 위한' 특수 화장에 더 민감해지고 있다. 그래서 주름살이나 여드름, 흉터 등을 지울 수 있도록 고안된 '화장용 에어브러시'가 인기를 끌기도 한다. 카메라맨들조차 자그마한 IT 카드를 카메라에 삽입해 출연자 얼굴을 일부러 흐릿하게 처리하기도 한다.

마크 저커버그는 평소 친구가 없어 페이스북에서 친구를 찾으려 했다. 트위터의 최고경영자였던 어번 윌리엄스가 트위터에 빠진 이유는 평소 수줍어 말을 잘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그들이 고안해낸 첨단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는 인류 사회에 획기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대화 채널과 소통의 장치를 제공해 주었다.

SNS는 이처럼 고독한 현대인에게 군중 속의 고독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하지만 SNS는 여전히 이중적이다. SNS가 오히려 대중의, 아니면 상대방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까. 이같은 수수께끼를 제대로 알 수 있어야만 우리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휴대폰 문자로 표현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정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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