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비즈니스벨트 원점 검토…정치 문제 판단 숙제
백년앞 내다보고 결정해야…과학계 성숙 계기되기를

지난 섣달 그믐날에 과학계는 현직 대통령으로부터 큰 숙제를 하나 받았다. 단군 이래 최대 과학 사업으로 여겨지는 과학비즈니스벨트의 입지와 관련해 원점서 재검토하겠고, 입지는 사용자인 과학자들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국무총리가 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그 위원회에서 충분히 검토하고 토론한 이후에 결정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전에 세종시 등 충청권을 지칭한 것에 대해서는 표를 의식해 혼선을 빚은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숙제를 받아든 과학계는 난감한 표정이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의중에서 세종시나, 충청권이 아니라는 점이 강하게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와는 무관하게 연구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알았는데 의도와 관계없이 결과적으로는 정치 게임에 발을 담그게 되는 상황이 조성되게 된 셈이다.

사실 한국의 과학계는 그동안 정치게임에는 참가한 사례가 별로 없다. 대개 권력자가 누구이던간에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여서 대다수가 예산을 늘리고 지원을 많이 해주었다. 때문에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맡은 프로젝트의 성공여부에만 관심을 두면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항에 과학자들이 직 간접적으로 관여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대통령이 원점에서 재검토한다며 과학자들에게 떠민 숙제의 답은 어찌보면 이미 나와있는 지도 모른다. 충청권을 제외한다면 현재 예상되는 유력지는 두 곳이다.
하나는 현 정권의 실세들의 고향인 대구 경북권. 이곳은 이미 포항에 가속기를 운용하고 있는데다 추가 건설까지 예정된만큼 모아서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논리가 나온다. 다른 하나는 행정기능의 정부 이전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갖고 있는 경기 등 수도권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들 지역이 갖고 있는 한계성이다. 이들 지역은 인프라와 수요자 두 측면에서 모두 한계를 갖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구 경북은 과학 인프라가 부족하고 수요자와도 거리상으로 떨어져 있다. 게다가 포항의 경우는 연약지반이라 지속적 보수가 필요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의 경우도 오사카 교외에 'SPRING 8'이란 가속기를 만들었는데 수요자와의 거리로 운영에 애로사항을 보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도권은 인프라와 수요자가 함께 있기는 하나 수도권 집중이 가속화되며 장기적으로 보아 국정 운영의 발목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대기업에 수도권 R&D거점을 허용한 마당에 무슨 문제냐 하겠지만 미래를 보아서는 부적절한 결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과학자들이 판단을 내리면서 부담으로 느낄 대목의 하나는 한시성이다. 이명박 정부의 수명은 5년 가운데 2년남짓 남았다. 대통령의 입으로 백년대계라고 하는만큼 미래를 보고 내려야 하는 결정이다. 과학자들이 2년뒤, 차기 정권과 국가의 미래를 생각할 경우, 현 정부의 의도된 답변을 써내기란 쉽지 않으리라고 본다.

과학비즈니스벨트 논의의 출발점은 실리콘밸리처럼 과학과 산업이 융합되고, 국가의 성장엔진이 되는 곳을 새롭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실리콘밸리의 역사는 그런 점에서 우리한테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실리콘밸리와 스탠포드 대학의 이인삼각 관계는 뗄레야 뗄수가 없다. 스탠포드 대학이 설립한 것이 1891년.
그로부터 40여년뒤인 1939년에 휴렛 팩커드가 만들어지며 그동안의 투자가 싹을 틔웠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성장했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80년대였다.
90년이 걸린 것이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하나의 클러스터가 자리잡고 국가적 성장엔진이 되기까지는 3대가 걸린다.

대덕특구는 대한민국 건국 25주년인 1973년에 입안됐다. 건설되고 입주가 시작된 것은 1978년, 완공 선언은 1992년이다. 길게보아 38년, 짧게 보아 19년의 역사를 안고 있고, 그래서 아직은 더 투자가 돼야 하는 곳이다.

대덕특구는 특정 대통령의 사업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국민적 기대를 받으며 국민들의 피와 땀이 녹아있는 곳이다. 이곳은 특정지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온국민의 자산이다. 지금까지 투자된 인프라와 쌓여진 인력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국의 장래를 열어나가야 하는 곳이다. 논의 단계부터 실무진 사이에서는 대덕연구단지와 인접한 세종시가 최적지로 거론됐고, 사전답사도 됐다. 여기에 대통령의 공약까지 더해졌다.

얼마전 일본에서는 기초과학의 효율성을 논하는 정부 관료의 주장에 대해 노벨상 수상자가 "말도 안돼는 소리"라며 일축해 버린 경우가 있다. 일본의 과학자들은 성과를 낸 만큼 사회에 대해, 정부에 대해 중립적 입장에서 할 말은 하는 풍토가 조성돼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일본의 대표적 연구기관인 이화학 연구소가 정치적 입김으로 좌우된다는 소리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이에 비해 한국의 과학자들은 정권의 눈치를 보며 할 소리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산을 받아 연구하고, 그에 비해 아직 세계적 성과는 내놓은 것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예산을 주는 사람은 권력자나 정부 관료가 아니라 국민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한국 과학계도 명확한 입장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국가를 위해서 과학계가 어떤 논거와 과정을 거쳐 의사결정을 하는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좋은 계기로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정답이 있다고 생각되는 답안지에 어떤 답을 써낼지는 과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현직 대통령이 과학자들의 백년대계에 대한 안목을 묻는 정치적 질문은 유사이래 처음있는 일인만큼 일단 현문이다. 그 질문에 현답을 할지, 우답을 할지는 이제 과학자들의 실력과 인격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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